창작글
아버지와의 동행
본문
아버지와의 동행
늘씬한 외모에 짙은 눈썹, 그리고 진강산이 떠날듯
우렁찬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의 아버지이시다.
부농의 막내로 태어나셔서 귀엽게만 자라
세상물정을 잘 모르시고 오직 후학양성을 위해
45년간 교편생활을 하셨던 아버지의 현 주소는
일요일 시골성당에서 사제회장으로서 미사집전 시
보혈조력을 마지막 봉사로 생각하시는 83세의
말쑥한 노신사이시다.
초등학교 5학년의 신학기 초 나는 아버지가 교감선생님으로
재직하고 계시는 박골 고개 넘어 내가초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이른 봄 양도벌판의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아버지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니 큰 저수지 옆에 자리한 아담한 학교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부터 어머니와 떨어져 학교사택에서 아버지랑
자취하며 다닐 학교였다.
전학 첫날부터 교실 마루를 닦고 초칠 하느라 점심시간을
훨씬 넘겨 학교사택으로 가니 아버지가 점심상을 차려놓고
기다리셨다.
식사를 하는 도중 갑자기 아버지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며
울음을 삼키시는 것이 아닌가?
어린 나는 영문을 모른 체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점심 식사를
마쳤다. 지나와 생각하니 어린것이 공부가 뭔지 제 어미와 떨어져
고생 하는구나하는 생각에 애처로워 눈물을 훔치신 것 같다.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아버지의 우는 모습을 보았다.
물설고 낯 설은 학교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내가시장 애들의 텃세는 급기야 나와 같은 반의 남자아이와
일명 ‘놓고 치기’라는 주먹싸움을 시켰다.
방과 후 학교 앞 산소 갓에서 일대일로 싸우기로 하고
교실 문을 나서는데 여자애들이 이 사실을 담임선생님에게
일러바쳐 나와 그 친구는 싸움한번 못하고 담임선생님에게 붙들려
회초리로 종아리 5대씩 맞았다.
텃세를 부리는 친구들도 미웠고 자초지종을 묻지도 않고 매를
드신 담임선생님도 싫었다.
너무 억울해 엉엉 울며 교무실로 가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 했으나 사나이 자존심상 허락되지 않았고 교무실 앞에서
하염없이 울어도 아버지는 내다보지도 않으셨다.
아 이리 매정하실 수 있으실까?
그때부터 나는 나 혼자라는 생각에 너무 외로웠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하니 점차 학교생활이
재미있어졌다.
아버지와의 일본식으로 지은 학교사택에서의 자취생활은 아침 점심은
아버지가 짓고 저녁은 아버지가 퇴근하시기 전에 연탄불에 쌀을 씻어
올려놓으면 아버지가 오셔서 저녁상을 차리셨다.
그중 어머니가 밑반찬으로 싸주신 일주일 분의 구운 망둥이는 정말 맛이
있었다.
아껴먹자는 아버지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부엌으로 숭늉을 뜨러
나가신 사이 잽싸게 망둥이를 벽장에서 꺼내 먹으면 아버지가 어떻게
아셨는지 “너 망둥이 또 꺼내 먹었구나?” 하시며 빙그레 웃으셨다.
저녁을 지을 때면 이웃집에 사는 선생님 따님인 6학년 은희라는 아주
예쁜 누나가 놀러왔다.
때로는 남자가 밥 짓는다고 놀리기도 했지만 서툰 나에게 쌀 조리질하는
법을 제법 솜씨 내어 알려주곤 하였다.
어느 날은 그 누나와 쌀을 씻다 바가지를 놓쳐 저녁쌀을 몽땅 흘려
고심 끝에 그 많은 쌀을 연탄재에 비벼버린 적도 있었다.
학교 사택의 밤은 무서웠다.
특히 아버지가 선생님들과 회식이 있어 술자리에서 늦게 귀가
하시는 날 혼자 잠을 자려면 정말 싫었다.
다다미식 방이 세 개가 있었는데 두 개는 창고로 쓰고 나머지
한방에서 잠을 청하려면 학교 운동장의 놀이기구에서 울리는
“뎅뎅” 소리는 귀신이 나타난다는 예고의 소리 같았다.
매년 저수지에서 익사사고가 있어 물귀신 얘기가 끊이지 않는
그곳의 밤은 어린 나를 힘들게 하였다.
어쩌다 아버지께서 혼자 있는 아들을 위해 내가시장의 제과점에서
사오 시는 딸기잼이 발라있는 빵의 그 달콤한 맛에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
그 후 정확히 38년 만에 아버지를 모시고 올해 내가초교동기
체육대회에 참석하였다.
당시는 아버지와 먼 길을 걸어서 갔지만 이제는 아들이 모는
차의 뒷좌석에 앉아 그 학교를 찾아 옛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든 구령대에서 지난 옛일을 회고하시며 쩌렁쩌렁 훈화를 하시니
아버지나 나나 감회가 새로웠다.
삼형제 대학시절 박봉을 자식들에게 다 털어 놓고 당신은 한 달 쓸
용돈도 거의 없어 어떤 때는 터미널에 동전 떨어진 것이 없나 생각
하셨다는 지난 후의 아버지 말씀에 가슴이 아팠다.
막내로 곱게 자란 분이 육이오의 혼란 중에 극적으로 살아 나셨고
평생을 교단에 몸을 바치셨다.
정년퇴임 후 습관적으로 어느 날은 가방을 챙기시더니 “학교가야지?”
하며 출근준비를 하셔서 어머니를 놀래 킨 적이 있으셨다.
주말이면 둘째아들이 온다고
그랬다고 용내뜰 다리에서 하염없이 기다리셨다는 동네분의 말씀에
얼마나 가슴이 저며 오는지 몰랐다.
그 여파로 나는 거의 매주 수년간 고향집을 찾았다.
탁구를 좋아하시는 아버지를 위해 매주 마지막 게임은 꼭 아버지에게
져 드렸다. 차마 이길 수가 없었다.
“아버지 몇 년 전 일을 정확히 기억합니다.
어머니가 방광암이라는 오진의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어머니를
잃을 까 뒷방에서 혼자 울면서 기도 하시던 모습 생생합니다.
내가 세브란스병원에서 최종결과 암이 아니라고 급히 전화로 알렸을
때 얼마나 기뻐 하시 던지요.“
이제는 인생의 뒤안길에 병드신 당신의 사랑하는 아내와 동행이
되셔서 도시 자식들의 간곡한 부탁에도 짐이 되기 싫다고 시골에서
매주 제단을 쌓다 가겠노라고 하시며 어머니의 손수 수발이 되신
당신이시다.
아들 삼형제중 제가 당신을 많이 닮았다고 당번이 되어 주말을
찾을 때면 제일 좋아 하신다.
지 지난주 동네어른들과 친척들을 모시고 생일상을 차려 드리니
매주가 이랬으면 좋겠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느끼는 바가 많다.
지금처럼 언제나 건강하셔서 더도 말고 백수하시기를 기도드린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댓글목록 0
신형섭님의 댓글
후배님 처럼 품위 있는 글을 올려야 하는건데....
춘부장 의 건강과 만수무강을 빔니다. 우리 부친은 5년전에 돌아가셨는데...
일본式 집 구조가 겨울에는 춥지요.
이환성(70회)님의 댓글
요즘 아버지씨리즈가 3 go 입니다...세입자님...따블입니다...아래글 인공위성참조..
이동열(73회)님의 댓글
우리네 부모님맘들은 어쩌면 그렇게 똑같지요?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해보는 만추의 저녁입니다.
이동열(73회)님의 댓글
<EMBED autostart=true autostart="false" style=": double; BORDER-TOP: # 5px double; FILTER: xray black() AllowScriptAccess=; BORDER-LEFT:px double; BACKGROUND-COLOR: #" src="http://ysin1.com.ne.kr/nahuna/11.wma" width=400 height=25 volume="0" loop="-1" enablecontextmenu="false"> <br>
이동열(73회)님의 댓글
아부지 야근데 母정의 세월이 나갑니다,,,힛
윤용혁님의 댓글
동열형 그래도 마음 뭉클합니다. 큣하신 형님! 감사합니다.
김태희(101)님의 댓글
저의 부친과 여러가지 닮으셨는데..저의 부친은 정년퇴임 후 곧 작고하셨습니다. 갈비 한 조각 못 사드렸는데 ㅠ.ㅠ 부친의 만수무강 빕니다.
이동열(73회)님의 댓글
돌아가시기전 머리맡에 앉은 저를 힘들게 쳐다 보시던 아버님의 눈망울이 가슴에 찐하게 박혀 잇습니다.애절하기도한,,,,
석광익님의 댓글
멋쟁이 아버님을 둔 행복한 용혁이............. 두분의 건강을 비네.
윤인문(74회)님의 댓글
용혁후배! 난 아버님께 효도 제대로 못하고 9년전 저세상으로 보내드려 아쉬움이 많았네..나중에 후회되지 않게 생존해 계실때 잘해 드리게
박홍규(73회)님의 댓글
후배님! 나두 16년전 아버님을 여의고 몇달을 술과 눈물로 보냈다네... 부디 살아실 제 효도하시고... 만수무강 기원합니다... 너훈아의 "모정의 세월"이 오늘따라 웬지...찌~~~잉...(^+^)
劉載峻 67回님의 댓글
친척 가운데 이리 바른 용혁 아우가 있어 자랑스럽고, 면식은 없지만 친척 아저씨, 아주머니의 건강하심과 천주의 은총이 늘 함께 하심을 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