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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출신 ‘정기용(49회) 원화랑 전 대표’(퍼온글)
본문
퍼온곳 : 경인일보(25. 8. 3)
원문
https://www.kyeongin.com/article/1747970
[박경호의 인천 문화현장]
백남준 발견한 전설의 컬렉터…
인천 출신 ‘정기용 원화랑 전 대표’, 조금 늦은 오비추어리
84년 새해 벽두, 백남준 ‘세기의 퍼포먼스’
숨은 후원자는 인천 출신 故 정기용 선생
백남준, 김환기 등 소개 ‘절대 안목’ 정평
신태범 박사의 결혼식 주례 등 인천 이야기
1984년 1월1일 새해 벽두, 미국공영방송 WNET 뉴욕 스튜디오와 프랑스 파리의 현대미술관 퐁피두센터를 위성으로 연결한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라이브 쇼가 생중계됐습니다.
조지 오웰(1903~1950)이 장편 소설 ‘1984’에서 보여준 인류가 TV 등 대중매체에 지배당하며 사는 디스토피아는 틀렸다는 내용을 담은 이 프로젝트의 제목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입니다. ‘1984’처럼 미디어에 의한 통제가 아닌 세계의 동시다발적 연결을 희망한 퍼포먼스였죠.
한국 태생의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이 기획하고, 독일 화가 요셉 보이스(1921~1986)와 현대음악의 거장 존 케이지(1912~1992), 현대무용가 머스 커닝햄(1919~2009) 등 세계적 예술인들이 참여해 당시로선 예술계에 큰 충격을 줬습니다.
이 세기의 퍼포먼스가 성사될 수 있도록 후원한 ‘숨은 공신’은 바로 인사동의 전설적인 컬렉터, 인천 출신 고(故) 정기용(1932~2025) 원화랑 전 대표입니다. 지난 6월23일 향년 93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정기용(가운데)과 인사동 원화랑에서 공간 화랑으로 이동 중인 백남준(오른쪽). 정기용 컬렉션. 백남준아트센터 아카이브. /백남준아트센터 소장 정기용(가운데)과 인사동 원화랑에서 공간 화랑으로 이동 중인 백남준(오른쪽). 정기용 컬렉션. 백남준아트센터 아카이브. /백남준아트센터 소장
정기용 대표는 1983년 파리에서 김창렬 작가, 박명자 현대화랑 회장 등과 함께 백남준을 만났습니다. 백남준은 정기용 대표에게 ‘굿모닝 미스터 오웰’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지만, 자금이 부족하다고 호소했다고 합니다. 정기용 대표는 백남준, 머스 커닝햄, 존 케이지의 판화를 다량 구매해 프로젝트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그해 2월 이들 3인의 판화 전시가 인사동 원화랑에서 열렸습니다. 백남준의 국내 첫 전시였습니다.
정기용 대표는 백남준뿐 아니라 김환기(1913~1974), 조각가 김종영(1915~1982) 등을 국내에 소개하며 재평가를 이뤄낸 ‘절대 안목’으로 유명한 화랑주였습니다.
생전 정기용 대표와 가깝게 지냈던 황인 미술평론가를 최근 인천의 한 모임에서 만나 이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황인 평론가에게 인천에 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정기용 대표는 인천 태생으로 인천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대기업에서 회사원으로 근무했었습니다. 대기업 근무 시절 회장의 지시로 미국 뉴욕에 있는 김환기 작가를 만나 후원했고, 이때 현대미술에 심취하면서 1978년 인사동에 화랑을 차렸다고 합니다.
황인 평론가는 인천의 유명한 외과의사이자 향토사학자였던 신태범(1912~2001) 박사가 청년 시절 정기용 대표의 결혼식 주례를 섰다고 했습니다. 신태범 박사는 ‘먹는 재미 사는 재미’라는 책을 낼 정도로 미식가로도 유명했죠. 황인 평론가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정기용 선생이 인천 출신이다 보니 미술평론가 이경성(1919~2009) 선생, 신태범 박사 등 인천 지식인들과 네트워크가 형성됐던 것 같아요. 정기용 선생도 미식가로 유명했는데, 자신의 ‘맛있는 음식 스승’으로 신태범 박사 얘기를 많이 했어요. 인천은 남자들이 손수 장을 보는 문화가 있다고 정기용 선생에게 들었습니다. 정 선생도 맛있는 시금치 한 단을 사기 위해 경동시장에서 발품을 팔았죠. 1980년대는 개인의 취향이랄 게 없던 시대인데, 신태범 박사나 정기용 선생이나 개인의 취향을 가진 멋진 분들이셨죠.”
황인 평론가는 지난달 21일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정기용 대표의 부고(‘가신이의 발자취’)에서 “고교생 시절부터 이미 고미술 컬렉터였”다며 “고미술과 현대미술을 관통하며 면면히 흐르는 조형정신을 읽을 수 있어야만 인류의 끈질긴 욕망인 미술의 정체가 비로소 보인다는 게 그의 소신이었다”고 했습니다.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정기용 대표 역시 평생 ‘고향의 맛과 정취’를 생각해 온 인천 인물이었습니다. 미술평론가에게 우연히 들은 인천 이야기가 반가우면서도, 정기용 선생의 부고가 안타까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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