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칼럼
한남규(55회), 한국 현대문학사 속의 숨어있는 보석(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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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in(24. 6.10)
한국 현대문학사 속의 숨어있는 보석, 한남규
소설가 한남규 - 이현식 / 문학평론가
젊은 시절의 한남규
소설가 한남규를 다시 보자
인천의 강화에서 태어난 소설가 한남규(韓南圭 1937~1993, 1958년 잡지 『사상계』로 등단할 때는 필명으로 한남철을 썼다가 1992년 『바닷가 소년』이라는 작품집을 낼 때는 본명인 한남규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여기에서는 한남규로 통일해서 지칭한다)는 인천의 문학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라면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인천을 배경으로 하는 『바닷가 소년』이라는 작품이나 어린 시절을 다룬 『강 건너 저쪽에서』, 『지붕 밑의 한낮』 같은 작품에서 인천을 주요 무대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인천에 대한 애정을 갖고 소설을 창작했던 한남규를 고향인 인천에서 호명하는 것은 그러므로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한남규를 인천을 그린 소설가로만 본다면 그의 면모를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게 한다.
『바닷가 소년』 출간 무렵의 한남규
그는 적어도 1950년대를 대표하는 잡지 『사상계』를 비롯해 1960년 4.19혁명의 자장 안에서 창간된 『청맥』, 지금까지 한국문학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창작과비평』 등의 창간과 편집에 관여하였고 이외에도 대한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등에 근무하며 신문이나 잡지 편집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런 점에서 한남규를 인천을 그린 소설가로만 국한 시켜 이해하는 것은 그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데에 부족함이 있다. 게다가 인천을 그린 소설가야 한남규 이외에도 많을 터인데 왜 그가 한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그가 그린 인천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그의 문학세계나 그가 살았던 삶의 궤적을 전반적으로 이해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한남규는 1937년 10월 인천 강화에서 태어났다. 배를 부리던 집안에서 태어나 유소년 시절 큰 어려움 없이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자전 소설 『강 건너 저쪽에서』를 보면 집안에서 부리던 배가 태풍에 풍비박산 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유복한 강화 출신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한남규 가족도 인천으로 이주해 창영초등학교를 나와 인천중학교를 3회로 졸업했다. 원래 경기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전쟁 통에 유야무야 되면서 인천중학교로 진학했다는 지인들의 술회가 있다. 인천중학교를 졸업하고 인천고등학교로 진학하여 졸업했다. 한남규가 인천중학교를 졸업한 때인 1953년은 아직 제물포고등학교가 개교되기 전이었다. 제물포고교는 1954년 8월에 개교하였다.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진학한 뒤인 1958년 단편 「실의(失意)」가 잡지 『사상계』에 입선하면서 그는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잡지 사상계사에 들어가 잡지 편집일을 시작한다. 집안이 가난했기에 학업을 이어가기 어려운 사정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남규의 사상계 입사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이 일로부터 그가 우리나라 주요한 잡지, 특히 문학 부분의 편집에 핵심적 역할을 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잡지 편집자, 문학기자로서 한남규
소설가 한남규 이외에 그에게 주목할 점은 바로 그가 문학 영역의 잡지나 신문 편집자로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는 데에 있다. 사상계 말고도 그는 청맥 편집에도 음으로 양으로 관여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한남규와 서울대 철학과 동문인 김상기가 잡지 『청맥』(靑脈)의 편집부장이었고 실제로 한남규는 이 잡지에 소설을 싣기도 한다. 성균관대 국문과 천정환 교수의 ‘우리가 알아야 할 대한민국 잡지의 역사’(https://contents.premium.naver.com/culturalhistory)에 따르면 잡지 『청맥』의 인적 기반은 4.19 이후의 서울대 문리대 출신들로 1970~80년대 한국인문사회과학계의 핵심 인물들이라고 한다. 한남규가 잡지사 『청맥』을 드나들며 이들과 교유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학월평에서 다뤄지며 신문에 실린 한남규 사진
한남규는 대한일보(평화신문을 인수한 한양재단이 1961년로 제호를 바꿔 낸 신문으로 1973년 폐간하였다)에서도 일을 했다. 문학기자로서 아마 문화부 기자 일을 맡지 않았을까 싶다. 이후에는 동아일보로 직장을 옮겨 잡지 신동아편집에 관여했고 이후에는 중앙일보사로 이직하여 월간중앙에 근무한다. 당시 신동아나 월간중앙 같은 종합지는 지금과 달리 문예면이 따로 있어 문학작품이나 문학 쪽 내용을 비중있게 다루던 때였다. 한남규는 문학기자라는 이름으로 이들 신문과 잡지의 편집에 핵심 역할을 하면서 이제 막 출발하는 새로운 세대의 문인들에게 지면을 제공해주지 않았을까 싶다. 잡지나 신문편집의 핵심 역할은 지면의 기획과 필진 선정에 있었으므로 한남규의 손안에서 굵직한 월간지나 일간지의 문학 면이 구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문학의 중요한 흐름 뒤에는 실제로 한남규를 빼 놓고 생각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는 것이다.
창작과비평 창간호 표지(창비 홈페이지에서 캡처)
따라서 해방되고 전쟁과 분단을 겪은 뒤 4.19 혁명으로, 온전한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현대적 질서가 구축될 때 문학이나 문화에서도 새로운 세대가 막 등장하던 시기에, 잡지 편집자로서 한남규의 역할은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결정적인 것은 그가 창작과비평의 창간과 편집에 깊이 관여했다는 점이다. 창작과비평의 산 증인인 백낙청, 염무웅 두 사람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당시 잡지를 만드는 데 깊이 관여한 사람이 임재경, 이종구에, 지금은 작고했지만 당시 한남철(韓南哲)이라는 필명을 쓰던 소설가 한남규(韓南圭)와 문리대 철학과 조교를 하면서 『청맥』 편집부장을 하던 김상기(金相基) 그리고 채현국(蔡鉉國) 등이었는데, 이종구, 한남철, 김상기, 이 세 사람은 돈이 전혀 없어서 필자를 구하는 등 노력봉사를 한 반면… 후략
(백낙청의 회고 http://www.paiknakchung.net/회화록)
내가 한남철(한남규)씨와 특히 가까워지게 된 것은 69년 여름 백낙청씨가 다시 미국으로 공부하러 떠난 뒤부터이다. 신동문선생과 내가 ‘창비’의 책임을 떠맡아가지고 청진동에 있던 ‘신구문화사’의 귀퉁이방 하나를 얻어서 사무실로 쓰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그는 이틀거리로 거기 나타났었다. 백낙청씨가 문단쪽 후사를 그에게 부탁해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 무렵 월간중앙 문학담당 기자로 근무하던 그는 물주 나타나기만 기다리며 꾀죄죄하게 앉아 있던 ‘창비파’ 후배 문인들을 호기있게 거느리고 ‘돼지집’ 같은 데로 가서 감자탕과 소주를 거침없이 사곤 했었다. …중략… ‘창비’쪽 문인들에게 의식적으로 월간중앙 지면을 자주 제공함으로써 아직 문단의 소수파였던 우리들을 측면 지원했던 일 역시 지금으로선 아득한 ‘옛말’이 되고 말았다.
(염무웅, 「발문-이 작가를 보라!」, 한남규, 바닷가소년, 창작과비평사, 1992년)
문단의 마당발
한남규의 역할이나 활동과 관련해서는 박태순, 황석영 등 그 시기에 활동했던 다른 여러 문인들의 회고에 의해서도 재차 확인되고 있다. 이른바 문단의 마당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는 실로 다양하게 활약한다. 한남규는 1970년대 문인들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도 적극 나선다. 각종 시국 선언에 이름을 올리는 한편으로 민주화운동의 문인 대표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한다. 그 와중에 경찰에 연행되기도 하는데 그의 이름은 일일이 거론되기 힘들 정도로 당시 신문기사 곳곳에 등장한다. 그는 1972년 10월 4일 이제 갓 등단한 띠 동갑 12년 아래 소설가 이순(李筍)과 화촉을 밝히면서 소설가 부부로 문단의 화제를 모으기도 한다.
한남규 소설가의 부인 소설가 이순
그는 1980년 5공화국 등장 이후 시대에 좌절을 해서인지는 몰라도 다니던 직장도 그만 두고 뚜렷한 활동을 보이지 않다가 호구지책으로 KBS 홍보위원 일을 한다. 80년대 중반 갑자기 발병한 부인의 병구완으로 뒷수발을 들다가 간경화가 악화되어 1993년 부인보다 먼저 세상을 뜬다. 채 60이 되지 않은 나이였다.
병이 악화되면서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예감했던 것인지 뒤늦게 창작집 바닷가 소년(1992)을 묶어내는데 이 작품집으로 그는 한국소설문학상을 수상한다. 한남규 소설가와 생전에 가깝게 지냈던 문학평론가 최원식 교수에 따르면, 병이 회복되면 다시 손을 놓았던 창작에의 열정을 불태우리라 다짐했다고 한다. 마지막 소설 『강 건너 저쪽에서』는 일종의 자전 소설인데, 그는 병상에서도 가제로 ‘내 고향 서쪽 바다’를 정해 놓고 장편소설을 구상했다고 한다.
최원식 교수는 “한남규 선배는 남에게 베풀기 좋아하고 모임 자리에서 대화도 적극적으로 이끌어나갔어요. 입담도 좋았지.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완벽주의여서 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철저한 분이었습니다.” 한남규의 문학적 면모에 대해서는 얼마 전 타계한 신경림 선생도 비슷한 증언을 한 바가 있다. 신경림 시인은 성북문화재단과 함께한 인터뷰에서 한남규 소설가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한남철(한남규) 소설가에 대한 이야기는 참 재미있으면서 무거운 것이 있지. 그는 월간 중앙 편집을 맡고 있었는데 정말 거침이 없었어. 마음에 들면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사정없이 퇴짜를 놓았지. 친구들의 소설을 읽고도 “재미가 없어!”라고 말하거나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아먹을 수가 없네!”라고 말하고는 했었어. 그래서 적도 많았지만, 그 시원시원한 태도 때문에 좋아하는 친구들이 더 많았어. 물론 문인들 중에는 드물게 직장을 가지고 있어서 술사기를 아까워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남철 소설가를 단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문학주의자라고 할 수 있어.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작품을 못 쓰면 마주 앉기를 싫어했거든. 그런 그가 나한테 전화를 했어. 창비에 실린 내 시를 보고 연락하는 거라면서 “나 한남철이외다. 시 잘 읽었어요. 내 후배들에게 시란 이렇게 쓰는 거라고 한소리 했지.” 그리고는 바로 술 한 잔 하자고 불러내더라고. 그렇게 그 사람하고는 십년지기처럼 가까워졌지.
(출처: https://sblib.tistory.com/190 [성북구립도서관 블로그:티스토리])
『바닷가 소년』에는 모두 14편의 소설이 묶여 있다. 30년 넘는 작가 생활동안 제대로 출간된 창작집이 이것 한 권이다 보니 과작으로 보이지만 그는 등단 초기에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1958년 등단하고 잡지사나 신문사에 근무하면서도 1년에 적게는 한편, 많게는 세편 씩 작품을 발표할 정도로 문학에 대한 열의가 높은 작가였다. 아쉬운 것은 30편을 훌쩍 넘는 그의 작품들이 바닷가 소년에 발표된 것 말고는 일반 독자들이 쉽게 접하기도 어렵고 작품 전체의 서지 목록이 아직도 온전히 정리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주로 활동한 1960년대에 발표된 작품들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지만 1970년대에도 종종, 80년대에는 드물지만 작품 쓰기를 중단하지 않고 이어나갔다. 그런데 특히 『바닷가 소년』은 1982년 KBS에서 <TV문학관>으로 방영된 후 당시 독일 후트라상(賞) 드라마 부분에 입상하여 유럽으로 수출되는 쾌거를 올리기도 했다.
『바닷가 소년』 출간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
1960~70년대 한국문학사 속 그의 역할 재평가되어야
그의 작품 전체를 일별하지 못하고 『바닷가 소년』에 실려있는 작품만 읽고 그의 문학세계를 평한다는 문제가 있기는 하나, 한남규의 소설은 삶의 실제에 기반을 두고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느끼는 구체적 정서를 소설의 주제로 하고 있다. 그는 정치적이거나 이념적인 목소리를 내기보다 사람들의 실제 사는 모습에 관심을 둔다. 물론 문명 비판적이거나 세태를 풍자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럴 때에도 그는 실제 사람들이 어떻게 무엇을 느끼는가에 주목한다.
그가 자기가 살았던 인천이나 강화를 소설의 무대로 자주 등장시켰던 것 역시 그런 이유가 크지 않았을까 한다. 그는 익숙하고 친근한 것에서 이야기를 만들고 구성함으로써 그 구체성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기를 원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그의 소설을 읽으면 우리가 한때는 익숙했으나 지금은 잃어버린 마을 공동체의 정서 같은 것이 짙게 배어나온다. 마을 공동체라는 것이 때로는 농촌이기도 하고 도시 서민들의 그것이기도 한데, 인천 사람들의 모습도 그런 속에서 자연스럽게 배어나온다. 그래서 바닷가 소년을 읽다보면 우리가 거쳐 지나온 생활과 정서, 그리고 지금은 사라져 버린 삶의 양태가 눈에 그린 듯 다가온다.
1992년 출간된 『바닷가 소년』 표지
안타깝게도 그는 56세, 젊다면 젊은 나이에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등졌다. 소설가로 그리고 문학편집자로 1950년대 말부터 1970년대까지 그가 한국문학사에 남긴 족적에 비해 제대로 된 조명과 평가를 받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 그를 두고 전후 인천의 모습을 잘 그려낸 소설가로 평가하는 것은 지나치게 일면적이다. 그의 작품 전체가 정리되어 세상에 다시 선 보이고 한국문학이 청년처럼 불쑥불쑥 커나가던 시절, 한남규가 한국 문학계의 장 안에서 거둔 성과나 역할도 다시 평가 받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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