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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스토리]3만7천명 동문중 고인이 된 137명 발자취 담은 '인천고 인물사' 발간(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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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경인일보(18. 4.13)
[이슈&스토리]3만7천명 동문중 고인이 된 137명 발자취 담은 '인천고 인물사' 발간
123년 학적부에 겹겹이 쌓인 '역사의 층계'
기업가·학자·독립투사등 연대별 수록
친일·월북한 졸업생도 가감없이 다뤄
27회 동문들 창씨개명·학병 거부 순국
작가 함세덕·야구 대부 김선웅 큰 업적
학계·종교계등 사회곳곳 수많은 인맥
123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인천고등학교가 '인천고 인물사'를 펴냈다.
3만7천명이나 되는 졸업생 가운데 한국 근현대사의 주역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인천고 총동창회는 당대에 큰 발자취를 남긴 동문 137명을 압축했다.
인천고 출신의 소설가 이원규를 비롯해 8명의 시인, 학자, 교수, 언론인으로 구성된 편찬위원회는 1년 동안 먼지 쌓인 옛 학적부와 신문기사, 국가기록원의 원문을 들춰보고, 유족들을 만나 인터뷰했다.
1895년 관립외국어학교 인천지교에서 출발한 인천고는 관립인천일어학교, 관립인천실업학교, 인천공립상업학교를 거쳐 1951년 지금의 인천고등학교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책은 기업가와 문화·체육·언론인, 학자·교수, 정치·행정가, 독립투사 등 각계에서 이름을 알린 졸업생을 연대별로 소개했다.
친일 행적이 있거나 공산주의자로서 월북한 인물들도 더러 있으나 미화나 찬양, 배척 없이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담아냈다는 게 편찬위 측의 설명이다. 여기 실린 137명은 이제는 고인이 된 졸업생들이다.
# 독립운동의 산실 인천고
남구 주안동 지금의 인천고등학교 교정에는 인상 제27회 동문의 추모비가 있다. '인상'은 인천고 전신인 인천공립상업학교의초반 일제의 창씨개명, 학병소집을 거부했다가 감옥에 갇혀 모진 옥고 끝에 순국한 인상 27회 동문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추모비다.
정구택(1921~2011)을 비롯한 안학순, 홍사성, 추중호 등 인상 27회 4명은 1학년이던 1936년 비밀 결사 '오륜조'를 결성해 항일 애국 활동을 벌였다.
오륜조를 중심으로 조선인 학생들이 여럿 뭉쳤다. 당시 우리나라 학생들은 일본인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하고는 했지만, 학교 측은 이를 눈감았다. 이런 차별에 분노한 정구택 등은 창씨개명에 반대하기로 결의했고, 학교 측은 이들에게 졸업장을 주지 않았다.
1941년 졸업한 이들은 각자 직업을 갖거나 대학에 진학해 뿔뿔이 흩어졌지만 태평양 전쟁으로 총동원령이 내려지자 다시 모였다. 하지만 1942년 7월 일본 메이지대학에 재학 중인 비밀조직 멤버 송재필이 학병거부 운동을 전개하자는 편지를 다른 학생들에게 보냈다가 일제에 발각했다.
이 일로 일제의 대대적인 조사가 이뤄졌고, 편지의 출처가 알려지면서 정구택이 제일 먼저 구속됐다. 이후 안학순, 홍사성 등 24명이 차례로 구속됐다.
이들은 옥에서 심한 고문을 당해 숨지거나 해방된 후에도 후유증으로 얼마 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1987년 1월 30일 생존한 인상 27회 동기생들은 앞서 간 동기생의 넋을 기리고 후배들에게 독립운동 정신을 알리기 위해 교정에 추모비를 세웠다.
비문 뒤에는 정구택 등 24명의 투옥자 명단이 새겨져 있다. 정부는 인상 27회 비밀결사 사건 주역 10명을 독립유공자로 지정하고 훈장·포장을 수여했다.
이밖에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1877~1955)의 상해 임시정부 망명작전을 주도했던 이을규(1984~1972·인상1회)·이정규(1987~1984·인상2회) 형제도 인고가 낳은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의 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지운 주역 동아일보 사진부장 신낙균(1899~1955·인상6회)도 있다.
# 인천을 사랑한 문화·예술인과 체육인
인천고 출신 중에는 문화·체육계에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 많다. 함세덕(1915~1950·인상 20회)은 '해연'을 비롯해 '무의도기행', '황해' 등 작품으로 유명한 극작가다.
1936년 처녀작 '산허구리'를 발표한 이후 걸출한 작품을 다수 내놓았지만 1941년 대표적인 친일극단 '현대극장' 창립회원으로 참여하는 등 친일행적을 남겼다. 해방 후에는 좌익 진영 '조선연극동맹'에 가입해 문화투쟁을 전개하고 월북했다.
'그리운 금강산'으로 유명한 한상억(1915~1992·인상21회)은 인천의 문화·예술계에 헌신한 강화 출신 시인이다.
그는 해방 이후 시인 김차영과 동인회 '시와 산문'을 만들어 작품활동에 매진했고, 1951년 한국문인협회 인천지부 위원장, 문총 인천지부 위원장(1961년), 한국예총 경기지부장(1963년) 등을 역임하며 문화계를 이끌었다.
생전에 발표한 시집 '평행선의 대결'(1961년)과 '창변사유'(1976년), 유고집 '그리운금강산'(1993)년에는 '인천찬가' 시리즈 등 그의 인천사랑이 듬뿍 담긴 시가 수록됐다.
분단시대 인천을 속 깊이 전달한 소설가 한남규(1937~1993·인고 55회)도 인천고 출신이다. 주요 작품으로 '바닷가 소년'이 있다.
인천 야구의 대부 김선웅(1919~1978·인상 24회)은 당시 인천상업학교의 야구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1936년 전조선중등야구대회 우승의 주역이었고, 여기서 따낸 일본 고시엔(甲子圓) 대회 출전권을 얻어 한국 대표로 참가했다.
일제 말기 중단된 야구부를 1946년 재창단해 무보수 감독을 맡았고, 1950년대 제2의 전성기를 가져왔다.
이밖에 선동열과 류중일 등 한국 야구의 기둥을 키워낸 고려대 야구 감독 최남수(1947~1993·인천고 65회), 1960~70년대 한국의 연식정구를 이끈 함관수(1935~2014·인천고 56회), 일제강점기 1937년 조선 복싱 챔피언에 오른 뒤 5년 뒤 중국으로 진출해 그곳까지 평정한 박순철(1917~1978·인상22회) 등이 있다.
# 각계에 뻗어 나간 인천고의 인맥
인천 지역 사회 곳곳에 포진해 있는 인천고 출신은 위인들은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서울대 총장을 지낸 한국 경제학계의 큰 별 신태환(1912~1993·인상19회) 박사, 노동법의 권위자였던 금동신(1934~2009·인천고52회) 단국대 전 부총장, 서울대 교수로서 한국 질병 예방을 위한 미생물 연구에 일생을 바친 최성배(1935~2003·인천고53회) 박사가 학계에서 인천의 이름을 알린 인물이다.
한국인로는 처음으로 미국 FDA 승인 신약을 개발해 한국 생명과학의 새 장을 연 홍창용(1958~2003·인천고 76회) 박사도 있다.
인천의 대표 기업 영진공사의 창업주이자 인천시의회 의장을 지낸 이기상(1936~2016·인천고55회), 신민당 부총재를 지낸 법조인이자 정치인 이택돈(1935~2012·인천고52회), 인천 정치계의 거목 5선 국회의원 한영수(1934~2009·인천고54회)도 인천고 출신이다.
한편 북한 사법상을 지낸 이승엽(1905~1954·인상10회), 제주 4·3항쟁을 지휘하고 처형된 이두옥(1911~1950·인상17회) 등 좌익 공산주의자도 '인천고 인물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6·10 만세운동을 주도했지만 결국 친일파로 변절한 차재정(1902~1963·인상6회), 인천에서 큰 정미소를 운영해 조선 3대 재력가 반열에 올랐던 친일파 김태훈(1898~?·인상3회) 등도 인천고 출신이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아이클릭아트
발행일 2018-04-13 제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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