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 인천] 1920년 한용단의 탄생 ①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한용단 창단
’민족의식 고취‘라는 사명 아래 활동
인천투데이=박소영 기자│1883년 개항 이후 인천은 개화기 문물의 도입지였다. 국내 철도, 전화, 등대, 우편제도 등 모두 인천이 최초다. 그런데 야구가 인천에서 처음 시작한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구도(球都)라는 명성에 걸맞게 인천은 한국야구의 출발지다. 흔히들 1905년 미국인 선교사 필렙 질레트가 황성기독교청년회원(현 서울YMCA)에 야구를 전하면서 한국 야구가 처음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6년 앞선 1899년 한 일기장에 인천에서 학생들은 이미 야구 경기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음은 인천‧동산‧제물포고등학교 총동창회가 뜻을 합쳐 2005년 집필한 ‘인천야구 한 세기’를 정리한 내용이다.<기자 말>
1899년 인천영어야학 일본인 학생 일기서 첫 기록
‘인고(인천고) 100년사’에 1899년 당시 인천영어야학교(인천고등학교 전신) 1학년생이었던 일본인 학생 후지야마후지사와(藤山藤芳)의 일기 내용이 나와있다.
일기 내용을 보면, ‘1899년 2월 3일 3시 근무가 끝난 4시경부터 나카가미군을 불러내 일연종(옛 신흥초등학교 옆의 절) 앞 광장에 아카마쓰 선생, 후지무라, 사토, 히라이 선생, 나카가미 군, 그리고 우리들과 함께 베이스볼이라는 서양식 공치기를 시작했다‘고 적혀있다.
이것은 비록 14~15세 된 일본인 학생의 일기이나 엄밀히 말하면 야구에 관한 최초 기록이다. 일각에서 부산 지역이나 국내 거주 외국인 사이에서 야구 경기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나, 아직 그에 관한 기록이 나타난 적은 없다.
‘역사는 기록을 남긴 자의 것’이란 말이 있듯, 이 일기장의 기록은 야구가 이미 인천에서 일반화된 운동경기 중 하나임을 말해주는 결정적인 단서인 셈이다.
‘인천 야구’에 관한 가장 오래된 공식 기록은 1914년
조선야구사(1932년, 오시마 가쓰타로 大島 勝太郞)에 따르면 문헌상 ‘인천 야구‘와 관련해 가장 오래된 공식 기록일은 1914년 11월 15일이다.
이 기록을 보면, ‘용산 철도 구락부(동호회를 뜻하는 클럽의 일본식 표현) 주최 추계경인야구대회가 1914년 11월 15일 철도그라운드에서 열렸다. 참가팀은 철도구락부, 인천팀, 동양협회, 조선은행, 오성이었다‘고 적혀있다.
1회전은 동양협회와 인천팀 간 시합이었는데, 7대 5로 동양협회가 승리했다. 2회전은 인천‧동양‧선은 합동팀과 철도구락부의 시합이었는데 무승부로 끝이 났다.
다만 이 시합에 참가한 ‘인천팀‘이 인천고등학교 전신인 인천상업전수학교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당시 인천엔 직장(실업) 야구단이 탄생하기 전이고, 인천상업전수학교가 한 달 앞서 같은 운동장에서 열린 '추계경룡야구대회'에 출전한 기록이 있어 인천상업전수학교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해진다.
인천상업전수학교는 1921년 ‘전조선중등학교야구대회’ 참를 시작해 1940년 이 대회가 폐지될 때까지 1933년만 제외하고 매년 인천 대표로 참가했다.
특히 1936‧1938‧1939년에는 우승을 차지해 일본에서 열리는 이른바 고시엔리그(갑자원리그)로 유명한 ‘전국중등학교야구대회’에 출전했다.
이 야구단은 한국 야구 보급에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일본인 학생들이 주류를 이루는 팀으로 간혹 조선학생 한두 명만 선수로 활약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순수 한인야구단인 ‘한용단’이 오늘날 인천 야구의 맥을 정통으로 계승한 팀으로 꼽힌다.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1920년 순수한인야구단 창단
한용단은 1920년 창단했다. 한용단 창립의 주축은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소속 학생들이었다. 이 학생들은 인천에서 서울로 통학하는 배재, 휘문,중앙, YMCA 등 서울 소재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항일운동을 하려면 육체적, 정신적 건강이 먼저‘라는 전제 아래 스포츠 진흥을 중요 사업으로 전개했다.
1920년 6월 13일자 <동아일보>에 ‘인천 한용단’을 소개하는 단신이 실려있다. 기사를 보면,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가 인천 청년으로 시대에 요구하는 정신적 체육과 실질적 체육을 유감없이 수양 발휘하기 위해 단체를 설립하였으니 명칭은 한용단이다‘고 썼다.
한용단은 야구단을 조직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회관 건리, 도서관 설치, 문예지 발간 등 사회 운동도 함께 전개했다.
한용단의 단장이었던 곽상훈(郭尙勳, 1896년 10월 21일 ~ 1980년 1월 19일) 단장은 3‧1운동 당시 만세시위로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로 인천 야구를 ‘항일 스포츠’로 승화시켰다.
곽상훈은 대한민국 초대~5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신간회·상해한인청년동맹 등 여러 단체에 가담해 활동했다. 1949년 반민특위 위원으로 특위 검찰차장을 지냈고, 1955년 민주당 창당에 참여해 민주당 신파 지도자로 활동했다.
제5대 국회의원에 당선 돼 국회 의장이 됐으나 5·16 군사쿠데타로 그만두고 민주당을 탈당했다. 야인 생활을 하다가 1972년 유신체제에 참여해 통일주체국민회의 운영위원장 등을 맡아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용단, ’민족의식 고취‘라는 시대적 사명 아래 활동
한용단은 1920년 4월 18일 오전 웃터골 인천공설운동장(현재 제물포고등학교)에서 배재팀과 첫 시합을 벌여 10대 3으로 이겼다.
같은해 6월 27일 한용단은 웃터골 공설운동장에서 인천으로 원정 온 개성 ‘고려 구락부’와 시합을 벌였다. 경기 경험이 거의 없는 한용단은 14대 3으로 패배했다.
이들은 ’더욱더 정신적 체육에 정진할 것’을 되새기며 같은 해 8월 23일 개성 고려청년회와 시합을 하기 위해 원정길에 나선다.
개성으로 원정을 떠난 한용단 선수들은 고려청년회를 상대로 13대 0으로 대패했다. 하지만 한용단 선수들은 타 지역 청년회와 교류를 증진한다는 진취적 목적 아래 한 경기, 한 경기 실전을 익혀나갔다.
한용단은 일본인 강호팀 틈바구니에서 역전 분투 했으나 언제나 최후 결승에 가서 고배를 마셨다. 그 때 관중들은 ’일본인을 상대로 어떻게 해서든지 우승기를 한 번 빼앗아오기만 하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했다고 한다. 양편 응원열이 얼마나 달아올랐을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한용단 팀은 단장 곽상훈, 주무 박창한, 투수(주장) 최영업, 포수 함룡화, 1루 장건식, 2루 박태성, 3루 이기만, 유격수 박안득, 우익수 이수봉, 중견수 박용남, 우익수 문백수 등이다.
이수봉(李壽奉) 선수는 항일 독립운동가이다. 1930년 3월 1일을 전후해 ‘3ㆍ1운동 11주년 기념을 맞아 전조선 민중에게 격함’이란 격문을 인천 시내에 뿌리고, 경성에서 우편으로 전국 노동ㆍ청년단체에 발송하려던 사건이 있었다. 이수봉 지사는 26세에 이사건에 가담해 체포됐는데, 일제가 작성한 '감시대상 인물카드'에 세번이나 등장한다.
- 기자명 박소영 기자
- 입력 2021.12.03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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