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칼럼
김태훈(15회)/화수동 287번지, 정미소→성냥공장→화수시장 '찬란했던' 그 뒤(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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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in(21.12.15)
화수동 287번지, 정미소→성냥공장→화수시장 '찬란했던' 그 뒤
(9) 화수동 다시 보기④ - 배성수 / 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
화수동 287번지. 만석로와 석수로, 운교로가 각각의 변을 이루는 삼각형 모양의 땅으로 그 안쪽에 화수자유시장이 있다. 근처 화수부두와 만석부두에서 들어오는 싱싱한 해산물로 유명해서 화수동 사람들은 물론 가까운 화평동, 만석동 주민들로 붐볐던 시장이었다. 2000년대 들어 대형 마트에 손님을 빼앗긴데다 코로나 펜데믹의 여파로 지금은 좀처럼 사람 구경하기 어려운 재래시장이 되었다.
김태훈 정미소
1912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이 작성한 신화수리 토지조사부에 따르면 287번지는 면적 4,004평에 지목은 임야였고, 만석동매축주식회사 소유의 땅이었다. 만석동매축주식회사는 지금 동일방직 일대를 매립했던 이나타 카츠히코[稲田勝彦]가 매립지 매각을 위해 1911년 8월 설립한 회사였다. 만석동 매립과 함께 화수동의 국유지를 불하받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287번지 역시 그렇게 이나타 소유가 되었다. 그리고 만석동매축주식회사로부터 이 땅을 사들인 사람은 영종도 출신의 조선인 김태훈(金泰勳)이었다.
김태훈은 1898년 영종면 구읍리에서 태어나 인명학교를 거쳐 인천상업학교(지금 인천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29년 11월 만석동매축회사로부터 매입한 화수동 287번지에 자본금 12,000원으로 김태훈 정미소를 설립했다. 김태훈 정미소는 1932년 당시 72.5마력 전동기를 사용하여 연간 7만 섬 가량의 백미를 도정하고 있었다. 주변으로 일본인이 운영하던 아리마[有馬] 정미소와 사이토[齋藤] 정미소가 이미 자리 잡고 있었지만, 그에 버금가는 시설을 구비한데다 탁월한 영업수완 덕에 인천의 촉망받는 젊은 실업가로 부상하고 있었다. 1939년에는 일본인 사업가 위주로 구성되었던 인천상공회의소의 부회장이 되었고, 그 해에만 영업세 615원을 납부하여 인천 거주 조선인 가운데 3위에 해당하는 실적을 내기도 했다.
1940년대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인천부 경방단 부단장, 징용후원회장 등을 지내며 친일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는데 창씨개명에도 앞장 서 이름을 카네나가 야스이사오[金永泰勲]로 바꾸었다. 이러한 친일행적 때문에 광복 후 반민특위의 조사 대상이 되어 1949년 3월 서울 용산구 자택에서 체포되었지만, 그해 8월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그가 풀려난 지 석 달이 채 지나지 않은 11월 11일 정미소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공장 건물 두 동이 전소되면서 6~7천만 원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김태훈은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고, 결국 정미소 부지도 매각해야 했다. 그 후의 행적은 정확히 알려진 바 없는데 1950년 5월에 치러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때 부평에서 출마했다거나 1955년 화수동에 시민극장을 개관했다는 등의 이야기만 전할 뿐이다.
대한성냥공업사
화재로 잿더미가 된 화수동 287번지 김태훈 정미소 자리에는 성냥 공장이 들어섰다. 석모도 출신으로 수산업에 종사하며 자본을 모은 이승목(李承穆)은 광복 후 적산기업이 되었던 금곡동 조선인촌회사의 기계 여섯 대를 구입해 1950년경 대한성냥공업사를 설립했다. 그는 서울 봉래동에서 대한전기화학공업이라는 회사도 운영하고 있었는데 성냥의 원료가 되는 염소산가리를 제조, 유통하는 회사였다. 염소산가리는 염소산칼륨을 말하는 것으로 광복 후 남한에는 제조공장이 없어 일본과 북한에서 밀수하여 성냥을 제조했기 때문에 공급량에 따라 성냥 가격의 변동도 심했다고 한다. 이승목은 인천 화수동에 대한성냥을 설립한 후 안정적인 원료 확보를 위해 서울의 염소산가리 공장도 함께 운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한성냥에서 근무했던 직원들에 따르면 6.25전쟁 직전 마카오로부터 수입한 염소산가리 1t 가량을 공장 바닥에 묻어놓았는데 전쟁이 끝나고 한동안 대한성냥이 염소산가리를 독점 공급하면서 큰돈을 벌었다고 한다.
1950년대 대한성냥 공장은 2천평의 부지, 550평 규모의 단층 건물에서 250명의 직원이 근무하며 매일 80만 갑의 성냥을 생산하고 있었다. 나무를 재단하고 그 끝부분에 발화제인 두약을 찍어내는 공정은 공장에서 이루어졌지만, 종이 성냥갑을 만드는 일은 인근 주민들의 몫이었다. 당시 화수동 일대로는 전쟁을 피해 남하한 피난민이 모여살고 있어서 그들에게 성냥갑을 접고 상표를 붙이는 일은 생계를 유지하는 데 유용한 것이었다. 성냥은 대개 한 갑에 20개비 내외가 들어가는 병형(竝形)과 대용량 들이인 덕용(德用)으로 구분되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팔각성냥은 덕용, 휴대용 사각성냥은 병형에 해당한다.
한때 온 국민들의 생활필수품으로 인기를 끌었던 성냥은 6.25전쟁 이후 보급되기 시작한 라이터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이에 더하여 인천에만 열군데 넘는 성냥공장이 난립하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대한성냥의 영업이익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대한성냥의 상황은 염소산가리를 생산하던 대한전기화학공업에도 영향을 미쳐 1965년 국세청이 발표한 고액 체납자 명단에 이승목의 이름이 올라있다. 결국 대한성냥 공장은 1968년 문을 닫게 되고 공장 부지가 매각되면서 화수동 287번지의 운명은 다시 한 번 바뀌게 된다.
화수자유시장
1968년 대한성냥 공장이 문을 닫은 뒤 화수동 287번지는 일반에게 매각되었다. 우선 도로에 접해 있는 땅부터 매각되었는데 만석로를 사이에 두고 지금 주공아파트와 마주보고 있는 부지에 주택이 지어졌고, 옛 인천극장 쪽 운교로와 석수로 길가로 상가가 들어섰다. 삼각형 모양의 외곽이 주택과 상가로 채워지자 그 안쪽에도 삼각형의 공터가 만들어졌다. 1970년 7월 화수산업은 200만원을 투자하여 이곳 1,148평의 부지에 시장 건설 허가를 획득하고 ‘V’자 형태의 상가주택을 지었다. 한쪽 변으로는 지상 3층의 주상복합 건물을, 반대쪽으로는 단층의 상가를 배치했고 여기에 점포 34개와 아파트 34가구가 들어섰다. 건물이 준공된 것은 1971년 5월로 화수산업은 이곳에 화수자유시장이라는 간판을 붙이고 시장의 문을 열었다.
그동안 철길 건너 송월시장이나 동인천역전 송현시장, 중앙시장에서 장을 봐야 했던 화수동과 화평동 주민들은 화수시장을 이용하기 시작했고, 시장은 항상 사람들로 붐볐다. 건물 사이 공터마저 좌판을 깔고 영업하는 상인들로 채워질 만큼 장사가 잘되던 시절이었다. 문을 연지 2년 만에 점포는 좌판을 포함하여 70개로 늘어났고, 화수부두와 만석부두에서 갓 잡아온 싱싱한 해물로 유명세를 더해갔다. 시장이 활성화되자 화수산업은 1979년 시장 서쪽 석수로 도로변에 지상 4층의 화수아파트를 짓고 1층은 상가, 2층 위로는 아파트로 분양했다. 화수자유시장의 전성기였다.
끝을 모를 것 같던 화수시장의 전성기도 1980년대를 기점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계산동, 만수동, 연수동 등 인천 외곽지역에 신도시가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화수동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형마트가 곳곳에 생겨나면서 화수시장을 비롯한 재래시장이 직격탄을 맞았다. 사람들은 낡고 허름한 재래시장 보다 깨끗하고 번듯한 마트를 찾기 시작했고, 아예 문을 닫는 시장이 늘어만 갔다. 화수시장도 마찬가지였다. 공터를 빼곡히 채웠던 좌판은 어느샌가 비어갔고, 그나마 사정이 좀 나았던 상가 점포도 하나둘 불이 꺼지기 시작했다. 아직 시장을 지키고 있는 점포는 불과 두 곳 뿐. 그나마도 코로나로 인해 손님이 끊겨 언제까지 장사를 계속해야할 지 고민이 깊다.
화수동 287번지. 처음 나랏님의 땅이었다가 일본인 소유가 되었고, 정미소와 성냥공장을 거쳐 이제 시장으로서의 수명도 끝나가고 있는 곳. 비어있는 공터 좌판과 불 꺼진 점포, 한창 잘나가던 시절 설치했을 것 같은 구멍 뚫린 슬레이트 지붕과 녹슨 입간판이 한때 시장이었음을 말해준다. 손님도, 상인도 발길을 끊어버린 시장 모습이 을씨년스러우면서도 서글프다. 그렇게 화수동 287번지는 또 다른 변화의 길목에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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