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칼럼
신현수의 책으로 세상 읽기 17 한국미술사의 선구자 고유섭 평전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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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친천투데이(24. 2.26)
“고유섭, 가장 비범하고 열정적인 개척자였고 가장 고독했던 문화독립운동가”
. 한국미술사의 선구자 고유섭 평전
인천투데이=신현수 시민기자
한국미술사의 선구자 고유섭 평전 | 이원규 지음 | 한길사
1. 다시 역사 속으로 여정을 떠난 이원규 작가
지난 2월 14일, 인천 중구 싸리재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개항도시’에서 이원규 작가 초청강연회, “고유섭 선생의 고귀한 생애” 행사가 열렸다. 고유섭 생애의 고귀함이야 당연하다고 쳐도, 만일 이원규 선생님이 안 계셨다면 고유섭의 위대성이 이렇게 자세하고 꼼꼼하게 기록되지 못했을 것이다.
전작 조봉암, 김원봉, 그리고 고유섭까지, 이 세분들은 이원규 선생을 통해 마치 새로운 생명을 얻은 듯하다. 출중한 작가 한 명과 시, 공간을 함께 한다는 게 얼마나 복되고 고마운 일인지 실감했던 밤이었다.
<고유섭 평전>은 우리나라 최초, 최고의 미술사학자 우현 고유섭 서거 80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출간된 책이다. 고유섭의 일대기를 평전 형식으로 쓴 책이니, 내가 더이상 깁고 보탤 말은 없다. 그러니, 이번 글에서는 때로 요약하기도 하고, 때로 본문을 그대로 발췌하면서 천천히 책을 따라가 보려고 한다.
우현의 어린 시절과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분야는 길게 인용했고, 미술 분야는 대부분 건너뛰었다. 고유섭 선생이 이 세상에 와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공부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았다. 그러니 독후감이라기보다는 책을 자의적으로, 그것도 매우 거칠게 요약, 발췌한 글이다.
우현 고유섭.(사진제공 인천문화재단)
2. 인천에서 시작된 문화 독립운동가 고유섭의 여정
우현은 1905년 2월 2일 인천 용동 우물거리 (현 중구 동인천길병원 자리)에서 태어났다. 우현의 아버지 고주연은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인천지교를 졸업하고 일본어 교관을 하던 중, 황실유학생으로 뽑혀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도쿄부립제1중과 구마모토에 있는 제5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12년 돌아왔다. 이때 우현은 취헌 김병훈의 의성사숙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취헌은 ‘인천의 마지막 선비’로 불리는 분이다.
우현은 1914년 9세에 4년제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인천창영초)에 진학했는데, 성적이 탁월하지는 않았다. 9세 때 모친 강씨가 쫓겨나고 서모 김아지가 들어왔는데,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어머니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젊은 시절 사진에서 느끼게 되는 우수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현 삶의 그늘이 아닐 수 없다.
전해지는 우현의 일기에는 어머니 이야기가 전혀 없다. 청년기 술을 마신 날 일기에도 없고, 자녀들을 통해 전해진 것도 없다. 우현은 작심하고 일기에 어머니 이야기를 안 쓴 듯하다. 설령 어머니에게 잘못이 있다 해도 아들로서 그리움이 있었을 텐데, 이를 악물고 참은 듯하다.
우현은 1918년 인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상급학교에 바로 진학하지 않았다. 우현이 집에서 쉬던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났다. 우현은 태극기를 그려 동네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함께 만세를 불렀다. 이 사건으로 그는 인천경찰서에서 3일간 구류를 살았다.
우현의 태극기 만세 시위와 미술사 연구 소망은 무관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우현은 태극기 사건 때문에 공립학교에 갈 수 없어 후에 사립인 보성고보로 진학한 것이다. 만세 시위와 경찰서 감방 경험은 우현이 민족정기를 높이기 위해 미술사 연구에 앞장서고, 그것을 문화 독립운동으로 여겨 평생을 밀고 가는 정신 내면의 동인이 되었다.
3. 고유섭, 이강국과 보성고보에서 경성제국대학까지 동행
1920년 사립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보성학교는 1906년 이용익이 설립했는데, 을사늑약 직후 인재 양성을 통한 구국 교육을 표방하며 세운 학교였다. ‘보성’이라는 학교 이름은 고종황제가 하사했다. '널리 사람다움을 열어 이루게 한다'는 뜻이 담겼다.
이용익이 사망한 뒤 학교를 물려받은 손자 이종호가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하자 학교는 경영난에 빠져 힘겨워하다 천도교로 넘어갔다. 천도교가 3·1운동을 주도한데다가, 학교 구내에 있던 보성사 인쇄소에서 독립선언서를 찍었고, 학교장 최린이 최고 주동자로서 감옥에 감으로써, 학교는 다시 위기에 빠졌다. 보성학교의 학풍이나 분위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우현은 여기서 뒷날 조선공산당 지도자로 투쟁하고 광복 후 월북해 북한 정부 고위직에 있다가 처형당한 평생 친구 이강국을 만나 우정을 쌓아갔다.
두 사람은 성격이 사뭇 달랐다. 우현은 내향적 감각형으로, 외적 대상과 거리를 두고 자신의 내면과 정신적 감각에 몰두하는 편이었다면, 이강국은 외형적 사고형으로 생각이 외면으로 향하고 사람들을 제 뜻대로 통솔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는 편이었다.
그러나 둘은 뜨거운 민족애를 가슴속에 품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둘은 목숨을 줘도 아깝지 않을 만큼 진정한 친구가 되었고, 죽는 날까지 우정이 이어졌다.
우현은 문학 분야에서도 뛰어난 소질을 발휘했는데, 고보에서 대학까지 이어졌던 기차 통학이 우현의 문학적 소양을 한껏 높여주었다. 우현이 문학 습작을 쓴 계기는 기차에서의 독서와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문예부 멤버들과 합평이었다.
고일은 <인천석금>에서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문예부는 인천 문화운동사의 제1페이지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또한 우현은 보성고보에서 교장, 교감 등을 비롯해 훌륭한 스승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중 한 명이 바로 도화(미술)교사였던 춘곡 고희동이었다. 고희동은 조선인 최초로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했는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유화인 ‘부채를 든 자화상’으로 유명한 화가이기도 했다. 고희동은 위창 오세창 선생의 제자이기도 하다.
고미술과 고건축을 바라보는 우현의 안목에 영향을 준 것으로 여러 번의 수학여행을 꼽을 수 있다. 보성고보는 매년 봄, 가을 두 차례 수학여행을 갔는데, 우현은 1학년 봄에 개성, 가을에 부여, 2학년 봄은 강화도, 가을은 평양, 3학년 가을에 경주, 4학년 가을에 금강산에 간 것으로 확인된다. 우현과 이강국은 공동수석으로 보성고보를 졸업했다.
우현은 보성 졸업 후 경성제국대학 2회 입학생으로 합격했다. 조선인 입학은 44명밖에 안 됐던 시절이었다. 우현이 속한 문과 학생 중에는 국어사전으로 유명한 국어학자 이희승이 있었다. 이희승이 우현보다 무려 9년이나 연상이라 ‘양존(서로 말씨를 높임)’했다고 한다.
우현은 경인기차통학생회 문에부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문인이기도 했다고 앞에서 말했는데, 그가 1926년 3월 <조선일보>에 발표한 연시조 ‘경인팔경’은 인천에는 기념비 같은 작품이다.
우현은 예과 2년을 마치고 본과에 올라가 문학, 역사, 철학 등 문과 세 분야 중 철학을 선택했다. 그는 철학 중에서 조선인으론 유일하게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했다. 조선에는 미학은 물론 미술이란 말도 없던 시대였다.
한국미술사의 선구자 고유섭 평전 | 이원규 지음 | 한길사
4. 한국 미술사의 개척자, 개성에서 빛나다
우현은 1929년 24세 때 인천의 3대 거부 이흥선의 큰딸 이점옥과 결혼했다. 그런데 이듬해 태어난 첫아들 병조가 태어난 지 몇 달 만에 세상을 떠나는 참척의 고통을 겪기도 했다. 인천 북망산에 아기를 묻었는데, 북망산은 현재 인천 남구 도화동, 옛 인천대 캠퍼스 북쪽 구릉이다. 그곳을 당시에는 북망산이라고 불렀다.
‘그의 시 ‘경인팔경’ 중 제7연 ‘북망 춘경'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너무도 유명한 이태준의 단편소설 <밤길>에도 등장하는 묘지 산이다. 이태준의 <밤길>을 보면 가난한 주인공이 우중에 죽은 아기를 안고 주안 쪽으로 걸어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같은 길이다.
같은 해 고유섭은 경성제대를 졸업한 뒤 일본인 지도교수의 권유로 모교 미학연구실 조교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는 문헌 탐구와 현장 답사를 병행하며 한국 미술사를 연구했다. 그때까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었다.
그는 근대적 미술사 연구 방법론으로 반가상의 양식과 흐름을 분석한 논문 <금동미륵반가상의 고찰>을 발표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고, <조선탑파개설>에서 탑파의 기원을 고찰하고 분류, 분석했다. 그는 삼국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미술을 미학적 방법론으로 분류한 조선인 최초 미술사학자였다.
그는 이런 탁월한 연구성과를 인정받아 1933년 4월 고려의 왕도 개성의 개성부립박물관장으로 초청받았다. 경성제대 미학연구실 조교를 사직한 그는 이례적으로 20대 후반 개성박물관장으로 부임한 후, 한국미술사의 선구자로서 빛나는 연구성과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문헌과 현장 답사를 바탕으로 개성의 고적들을 소개했고, 조선의 전탑과 그림, 고려 도자, 골동품, 고서화에 대한 글을 이어서 발표해 학계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1935년 그는 천 년 지난 고려 초의 철불 석가여래상을 총독부박물관에서 돌려받아 봉안식을 여는 큰 성과도 이뤄냈다.
개성부립박물관장으로 부임하면서 위창 오세창 선생으로부터 우현 등의 호가 새겨진 전각을 선물 받았다. 70 노인이 직접 새긴 전각이라 더욱 감사했다. 위창은 우현보다 무려 41세 위였다. 조혼을 하던 당시 관례로서는 거의 할아버지뻘이었다.
훗날 유홍준은 "한국미술사의 할아버지는 위창이고 아버지는 우현이다”라고 했는데, 둘 사이에는 오세창의 제자이자 우현의 스승인 고희동이 있었던 것이다. 일찍이 <근역화휘>, <근역서휘>, <근역서화징>을 쓴 오세창으로서는 자신의 미술사 연구를 넘어서고 있는 우현을 고맙고 대견하게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박물관장 부임 축하선물로 인장 세 개를 선물했을 것이다. 이 인장들은 현재 인천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5. 조선 미술의 진수를 탐구한 우현의 예술관과 철학
그의 아호 ‘우현’은 노자의 <도덕경> 제1장에 나오는 말로 의미가 매우 심오하다.
“此兩者同出而異名(차양자동출이이명) (무와 유) 양자는 나온 데는 같은데 이름만 다르다
同謂之玄 玄之又玄(동위지현 현지우현) 둘을 함께 이르는 것은 오묘하고 또 오묘하다
衆妙之門(중묘지문) 온갖 오묘한 것들의 근본이 되는 문이다”
그러니 우현이 자주 썼던 “무기교의 기교”나 “무계획의 계획”같은 말도 노자의 어법에서 영향받았다고 할 수 있다.
우현은 <아포리스멘> 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지금 조선의 고미술을 관조하고 있다. 그것은 여유 있던 이 땅의 생활력의 잉여잔재가 아니요, 누천년 간 가난과 싸우고 온 끈기 있는 생활의 가장 충실한 표현이요, 창조요, 생산임을 깨닫고 있다....나는 가장 진지로운 태도와 엄숙한 경애와 심절한 동정을 가지고 대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에 그것이 한쪽의 '고상한 유희'에 지나지 않았다면, ‘장부의 일생'을 어찌 헛되이 그곳에 바치고 말 것이냐.”
이 글은 우현의 인생관과 예술관을 집약한 글이다. 철학과 출신 미학 전공자의 글답다. 그는 일 분 일 초도 아끼며 짧은 생애를 불사르듯이 미술사 연구에 쏟아 붓고 세상을 떠났으니, 마치 이 글은 자기 생의 예언 같기도 하다.
우현의 문예이론은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거나 서양 이론을 베낀 것이 아니다. 우현은 “조선은 독자적 문화예술이 없다”고 왜곡한 식민사관을 깨는 데 생애를 다 걸었던 것이다.
그는 1939년 8월 <조광>지에 ’선죽교변‘이라는 글도 썼는데, 포은 정몽주가 순절한 곳이 선죽교가 아니라 그의 집이 있는 대묘동 동구의 다리 주춧돌 위라는 것을 남효온의 <추강집>등 문헌자료를 바탕으로 발표했다. 개성사람들 모두가 순절 장소로 여기고 있고, 일본인 고관대작들도 개성에 오면 꼭 가서 포은의 핏자국 흔적을 찾는데 개성박물관장으로서 잘못 전해진 기록을 바로잡으려 한 것이다.
<춘추> 1941년 7월호에 실린 우현의 특별기고 <조선 고대미술의 특색과 그 전승 문제>는 <조선일보>에 발표한 <조선 미술 문화의 몇 낱 성격>과 함께 우현이 한국미의 특색을 정리한 글로 유명하다.
우현은 "조선 미술의 특색을 말하는 것은 심심한 연찬과 장구한 고구의 총결집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요, 간단명료히 일조일석의 호기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라고 하면서, 수천백 년의 변천을 통해 형성된 특색은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이라고 했다. 그것은 기교와 계획이 생활과 분리되고 분화되기 이전 것으로서, 구상적 생활 그 자체의 생활본능의 양식화로서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우현은 또 “무관심성과 구수한 맛”도 조선 미술의 특징으로 지적했다. 특히 “구수한 맛”을 설명하면서 "(중국과 비교해보면) 조선의 미술은 체량적으로 비록 작다 하더라도 구수하게 큰 맛이 있는 것이다. 조선 미술에서 나는 항상 한 개의 모순을 본다. 그것은 작은 맛과 큰 맛이다”라고 했다.
이 글의 주제 문장은 조선 미술에 대해 그가 남긴 가장 대표적인 어록이 되었다. “조선의 미술은 민예적인 것이매 신앙과 생활과 미술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문장은 뒷날 1974년 우현 30주기를 맞아 인천시립박물관에 건립된 기념비에 새겨지기도 했다.
인천시립박물관 우현 고유섭 동상 (사진제공 인천문화재단)
6. 우현에 대한 후학들의 비판 그리고 분청사기의 첫 등장
문헌 탐구와 현장 연구를 병행한 끝에 우현이 내린 조선 미술의 특징은 '질박, 담소, 무기교의 기교'로 집약된다. 조선 미술이 신앙, 생활과 구분되지 않고, 민예적 성격을 지닌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이 정의에 대한 몇몇 후학의 비판이 있었다. 특히 기념비에 새겨진 주제문은 후학들의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조선 미술을 '무관심성, 무계획의 계획, 민예적인 것'으로 설명한 것은 공시적이며 일원적인 시각이고, 야나기 무네요시를 따라갔다는 지적이다.
특히 강우방 교수는 ’민예적‘이라는 표현을 꼬집었는데, “어느 나라건 민예품을 가지고 한 나라 미술의 특색을 삼는 경우는 없는데, 그 민예적이라는 것이야말로 인류 공통의 보편적인 것이며, 민속품이나 공예품만 가지고 한국 미술의 성격 전체를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즉 근대 유럽의 학문 체계와 가치로 한국 미술을 재단했다거나 일본, 중국 미술과 비교로 한국 미술의 특질을 조성했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고유섭의 이론은 수많은 문헌 조사와 답사, 실측으로 얻은 논리이지 유럽과 일본 책만 읽고 나온 내용이 아니다. 고유섭 선생의 정의는 이제 모두가 동의하는 것이다. 인터넷에 ‘한국의 미’를 검색하면 나오는 것이 바로 고유섭이 내린 정의다.
이중섭이 조선미술사와 관련한 우현의 글을 읽고 감화를 받아 찾아온 일화도 눈에 띈다. 비범한 청년 화가 이중섭은 우현에게 와서 회화 기법을 배웠는데, 이중섭의 특기인 은지화 기법이 고려청자의 상감기법이나 금속공예의 은입사 기법에서 터득한 것이고, 고려청자에 그려진 동자의 모습을 연구해 작품에 반영한 것도 우현의 영향이라고 하니 우현의 가르침은 이중섭에게도 이어진다.
우현은 <조광> 10월호에 실린 ’고려도자와 이조도자‘라는 글에서 청자기는 고려조 전반에 성행했고, 청화백자는 조선조 후반기에 성행했다고 시대를 구분 지었다.
그는 일본에서 유행한 미시마테의 제조법과 발전 유래를 분석 제시하고 청자의 타락물이자 변화물이라고 규정했다.
일본의 다인들이 유래도 모르고 마음대로 붙인 미시마테 명칭보다는 '분장회청사기'라고 부르겠다고 선언했는데, 알려진 바와 같이 그것을 줄인 말이 오늘날 보통명사가 된 '분청사기'다. 우현이 우리가 쓰고 있는 '분청사기'라는 용어의 최초 명명자인 것이다.
개성박물관장을 하면서 가슴 아픈 순간도 있었다. 개성박물관을 시찰 온 우에다 조선군사령관을 맞아 정중히 안내하고 난 후 울분을 달래는 장면이다. 우에다는 윤봉길 의사의 폭탄에 한쪽 다리를 절단한 자다. 윤 의사는 처형당했고 그자는 살아남아서 우현 선생 앞에 왔던 것이다.
7. 우현의 마지막과 그가 남긴 영원한 유산과 후대의 오류
우현은 간경변 등으로 몸이 아팠지만, 원고를 계속 썼고, 결국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1944년 6월 26일, 우현은 아내에게 과일이 먹고 싶다고 했고, 아내 이점옥은 관사 앞집에 버찌 한 상자가 들어온 걸 알고 한 접시 얻어왔다. 우현은 건더기를 삼키다 토혈하고 의식을 잃었다.
이날도 어김없이 문병차 왔던 제자 황수영이 울먹이며 우현의 몸을 흔들었으나 깨어나지 못했다. 우현은 그렇게 여섯 시간을 혼수상태에 있다가 오후 5시 30분에 숨을 거두었다. 뱃속의 아들까지 일곱 자녀를 두고 만 39년 생애를 닫으며 세상을 떠났다.
눈을 감는 순간 우현의 곁에는 이점옥 여사와 황수영이 있었다. 우현의 제자로는 한국미술사 연구 체계를 정립한 황수영 전 동국대 총장, 진홍섭 전 이화여대 교수,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등이 있다. 만일 그가 오래 살았다면 더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을 것이다.
우현은 경주 문무왕릉 답사 당시 제자 황수영에게 “용당포 앞바다의 바위섬이 문무왕의 수중릉임이 분명하니 고증해야 한다, 이견대 동산 바위에 앉아서 보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고 한다.
황수영 박사는 우현의 고향 인천에 추모기념비가 섰으니 용당포에도 세우기로 결심하고 우현이 앉아서 대왕암을 바라보았던 바위가 포함된 토지 80평을 사비로 매입했다. 자연석 석재를 구한 뒤, 광개토대왕비 서체로 능한 서예가 김응현에게 시비 글씨를 부탁했다.
비석 앞면은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 10자와 우현 고유섭 5자가 푸른색으로 음각되어 있다. 매우 감동적이지만, 이 비명은 잘못된 것이다. 우현이 1939년 8월 1일 <고려시보>에 기고한 원문 제목은 ‘나의 잊을 수 없는 바다’였다. 1958년 수필집 <전별의 병>에 ‘잊히지 못하는’으로 잘못 수록된 뒤 그렇게 굳어졌고 비석도 그렇게 되었다.
우현 고유섭의 청년시절 자화상_동국대 중앙도서관 제공
8. 고유섭 선생과 이원규 작가가 인천분이라 자랑스럽다. 좋은 사람이 살아야 좋은 도시다.
이원규 선생은 이 책에서 “우현은 민족자존을 위해 예술사라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열어나간 선구자, 자기 능력의 한계를 손으로 짚어보며 때로는 넘어보기도 한 치열한 개척자, 죽기 며칠 전까지 비장하게 집필하며 자신을 불태운 학자였다. 우현은 가장 비범했고, 가장 열정적인 개척자였으며, 가장 고독했던 문화독립운동가였다. 그는 민족혼을 지킨 불멸의 혼이었다. 역사의 질풍노도가 몰아치던 개항도시 인천에서 태어나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조국의 미술사를 개척하려고 외로운 길을 걸었다.”며 우현을 한껏 추어올렸다.
그는 지난 2년 동안 오직 고유섭에만 매달렸다. 우현에 관해 읽고 관련 자료를 모으고 답사하는 데만 1년을 보냈고, 다시 1년을 집필에 매달렸다. 그리고 200자 원고지 무려 1700매 분량의 평전을 완성했다. 그의 컴퓨터 속 ‘고유섭 파일’엔 1만4000건이 넘는 자료가 쌓여 있다. 절반은 우현의 글 발표 원문이다.
이원규 선생은 계속해서 말한다. “우현은 인문학적, 예술적으로 최고의 지성이자 문화독립운동가였다. 우현 주변의 인천 근대사는 모두 썼다. 호적과 등본을 다 확인해 인천에서 우현의 흔적을 지도로 그렸다. 미술사 측면에서만 주목받은 우현의 생애사 전체를 다 썼다.”
인천시립박물관 앞마당에는 우현을 기리는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새얼문화재단이 그를 '새얼문화상' 1호 수상자로 선정하고, 그의 동상을 세웠다.
우현은 1905년에 태어나 1944년에 돌아가셨으니 올해가 서거 80주기고, 내년이 탄생 120주년이다. 영화 제작 등 우현에 대한 더 다양한 선양사업이 펼쳐져야 한다.
“썼던 자가 작가가 아니라 쓰는 자가 작가다"라는 말이 있다. 이원규 선생은 무려 여든을 바라보는 연세에 이번에 또다시 역작을 출간하셨다. 그러니 선생님은 명실상부 작가 맞다.
오세창 선생이 우현이 개성박물관장으로 취임했을 때 인장을 선물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오세창 선생은 보성고보 시절 우현의 미술 선생님이었던 춘곡 고희동의 스승이다. 말하자면 제자의 제자에게 인장과 낙관을 선물한 셈이다.
이 일화를 거꾸로 흉내 내서, 비록 형편없는 솜씨지만 강연 행사 날 이원규 선생께 낙관을 선물로 드렸다.
‘한국 미술사의 선구자’ 고유섭 선생이 인천분이라 자랑스럽고, 고유섭의 삶을 낱낱이, 세세히 기록한 이원규 선생님이 인천분이라 또한 자랑스럽다. 좋은 사람이 살아야 좋은 도시다.
신현수 시인은 현재 사단법인 인천사람과문화 이사장, 서울문화재단 이사, 비영리민간단체 라오스방갈로초등학교를 돕는모임(방갈모) 상임대표로 일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과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원장(직무대행), 6.15민족문학인남측협회 집행위원 등으로 일했다.
신현수 시인은 현재 사단법인 인천사람과문화 이사장, 서울문화재단 이사, 비영리민간단체 라오스방갈로초등학교를 돕는모임(방갈모) 상임대표로 일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과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원장(직무대행), 6.15민족문학인남측협회 집행위원 등으로 일했다.
기자명 신현수 (사)인천사람과문화 이사장
입력 2024.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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