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칼럼
아버지의 육이오 사변일기
작성자 : 윤용혁
작성일 : 2005.06.01 20:27
조회수 : 3,278
본문
강화 내가면 외포리 앞바다에 황해도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싣고 후퇴한 배들을
보면서 사변이 터진것을 아버지는 아셨다.
며칠이 지나자 강화도 마저 빨갱이 놈들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당시 큰 아버지는 대한 청년단 강화지부
양도면 단장 이셨는데 점령 당하기 하루전에
간신히 피난하는데 성공하셨다 .
아버지는 양도 국민학교 교사로 재직하시던 중 놈들이 말하는 소위 성분이 나쁘다는
핑계로 학교를 그만 두시었다 .
양도 국민학교에는 이미 인공기가 걸리고 인민학교가
열려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내려 가시지를 않으셨다
"동무 협조 안하기요 ?" 놈들이 그럴때면
아버지는 "형님이 반공단 단장인데…
그냥 집에서 자숙하겠소"하면서
산골 집에 머물러 계셨다. 드디어 9.15인천
상륙작전이 시작되면서 포성이 들리고
포탄이 산골마을 진강산에도 떨어졌다 .
그동안 강화에는 바닥 빨갱이들이 준동하여
납치 살인등이 일어나고 있었다 .
마대라는 큰개를 가지고 산에서 노루랑
토끼를 사냥하던 아저씨가 계셨는데
“이봐 ! 자네 어서 내려가보게 학교에 태극기가 걸려 있어” 하시더란다 .
9월17일날 급히 내려가보니 정말 학교에는
인공기는 온데 간데 없고 자랑스런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이 얼마만인가!
교무실에 들러 그 동안 난장판이 된 서류를
정리하는데 갑자기 학교 정문쪽에서 탕탕 하는 총소리가나
내려다보니 붉은 완장을 찬 바닥 빨갱이 김춘규가
구구식 장총을 쏘고있었다 .재형이 아저씨가 갈지자로
운동장을 있는 힘을 다해 달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
일제때 일본군으로 징용되었다 나온사람이라
그런지 곧바로 뛰지 않고 요리 조리
총알을 피해 잘도 도망을 친것이다 .
며칠전 장봉도에서 후퇴하는 어린 인민군 패잔병하나가
총을 질질 끌며 학교 앞을 지나가는 것을 마을 청년들이 잡아
허술한 마을 학습소창고에 감금했는데
그놈이 탈출하여 이미 황해도 연백으로
도주한 인민군들에세 연락을 취하여 미쳐 아군의
수중에 들어 오지 않은 강화도를 다시 덥쳐 애꿎은
면서기등 선량한 동네 유지들을
납치 하러 온것이다 , 아버지는 놀라 학교담을 뛰어넘어
근처 중섭씨네 뒷간 잿더미에 숨으셨다가 주위가 조용해지자
황급히 산골 집으로 뛰어 가시는데
요선이 아저씨가 " 자네 큰일났네 지금 자네네 집에 빨갱이
들이 형님을 잡으러 왔다고 하며 얼른 피하라고 한다.
집에 어머니에게 작별인사도 못하고 덕정산 불우리
고개를 넘어 고모님이 시집가신 불은면
기세미 당신의 누님 집으로 피하셨다 .
그 집에는 마을 사람 몇분이 모여 있었는데
고모부님과 낮에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잠자리에 들려는데 어느새
그쪽 동네 빨갱이들이 아버지를 잡으러 들이 닥쳤다.
거기에도 바닥 빨갱이가 엿듣고 있었던 것이다.
9월 18일 불은면 지서창고에 하루 붙들려
계시며 취조를 당하셨다. 곤봉같이 생긴 몸둥이로
어깨를 내려치면서 "동무는 왜 도망쳐 왔느냐?
우리 동무네 집은 얼마나 습격했느냐?” 따졌다
그때마다 한결같이 “내얼굴을 보시오.
내가 그렇게 악하게 생겼소!
어머니께서 생위손 (손 주위 염증)을 앓아 거기에 꿀이
좋다기에 누님댁에 얻으로 온것 뿐이오… "
그러나 그들은 믿지않고 아버지를 포승줄로 결박하고
잡혀온 다른 사람들과 줄줄이 엮어서
끌고가 9월 19일 강화 경찰서 무도장에 가두었다
밤새 취조 고문하고 새벽에 한 두명씩 불러, 죽이러 가는지
풀어주는지 알 수 없는 숨막히는 날이 계속되었다.
특히 아는놈이 무섭다고 건평 바닥 빨갱이 김춘규가 더 심했다.
그 곳에는 벌써 아는 동네 아저씨 몇분이 끌려 와 있었는데
한분은 귀가 멀어 잘듣지 못하는 분이다.
밤에 놈들이 그의 이름을 불렀는데도 듣지 못하자
면서기를 하던 동네 다른분이 잽싸게
그 줄에 서 그는 살고 귀가 먼 아저씨는
볍가마를 등에 메고 끌려가 양사면 인하리 바닷가에서
무참히 살해되었고 시체는 썰물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때 마대를 가지고 산 짐승들을 포획하던 동네분도
끌려가 죽창에 찔려 비명에 돌아 가셨다 .
감금 열흘째 되는날 강화도 상공에서
연합군 무스탕기가 폭격을 시작하였다.
놈들은 혼비 백산하여 납치한 사람들을
일부 풀어주기 시작하는데 아수라장이다
어머니도 할머니랑 그곳에서 아버지가 살아 나오기를
기다리셨는데 한쪽문 으로는 풀려나는 사람
한쪽 문으로는 놈들에게 끌려가는 사람으로 아우성이다.
아버지가 안보여 그안을 들여다 보니
아버지가 저쪽에서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내 혁띠 내 혁띠” 하며 찾고 계시더란다 .
어머니가 용기를 내어 뛰어들어가
”여보! 지금 혁띠가 문제야!”하시며
손으로 잡아 끌어 나오는데 놈들이
동무 저 옥상에 올라가서 인민군 만세를
부르라고 총으로 위협하더란다 .
들은 척도 안하고 죽기살기로 빠져 나오셨다.
그쯤 큰아버님은 부산으로 피난 하셨다가
인천을 통해 귀향하시다 인민군들에게 붙들려
자유 공원아래 인천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셨다.
놈들이 후퇴하면서 끌고갈 수 없어 처형을 하는데
실탄이 모자라니까 7명씩 묶어 총을 쐈다.
제일 첫줄에 등지고 계셨던 큰아버님은
탕소리와 함께 쓰러지셨는데 혼자 기적적으로
살아 나셨다.정말 천우 신조다..
놈들이 함포 사격에 놀라 급한 나머지 확인 사살을 못하고
도망칠 때 피투성이의 시체 더미에 숨어 계시다 살아 나오신 것이다 .
모든것이 인과응보라고 마대라는 큰개를 가지고
산짐승들을 무수히 사냥하던 분은 죽어 아들들이
멍석에 둘둘말아 지게로 지고와 집 뒷뜰에 묻었다 .
할머니는 인정이 많아 밥굶는 이웃에게
쌀을 퍼주고 찾아다니며 챙기셨고 대동아 전쟁기간과
6.25전쟁기간에도 성당문을 꼭 열고 지키셨다한다.
그 난리통에도 두아들을 기적적으로 살리신 것이다.
나는 어려서 부터 반공에 대해 교육을 받으며 자란세대다 그래서
난 보수주의자가 되었고 시장 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숭배한다 .
누구나 구속받기를 싫어한다 .
나 또한 그래서 자유직업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다시는 이땅에서 이런 비극은 없어야 한다.
민족주의도 좋지만 굶주리고 억압받는 북한 동포와
북한 정권과는 엄연히 구분해서 생각하여야 한다 .
요즘 돌아가는 국내 현실을 보면 안타가운 점이 한 둘이 아니다 ..
부상당한 군인들을 싣고 후퇴한 배들을
보면서 사변이 터진것을 아버지는 아셨다.
며칠이 지나자 강화도 마저 빨갱이 놈들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당시 큰 아버지는 대한 청년단 강화지부
양도면 단장 이셨는데 점령 당하기 하루전에
간신히 피난하는데 성공하셨다 .
아버지는 양도 국민학교 교사로 재직하시던 중 놈들이 말하는 소위 성분이 나쁘다는
핑계로 학교를 그만 두시었다 .
양도 국민학교에는 이미 인공기가 걸리고 인민학교가
열려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내려 가시지를 않으셨다
"동무 협조 안하기요 ?" 놈들이 그럴때면
아버지는 "형님이 반공단 단장인데…
그냥 집에서 자숙하겠소"하면서
산골 집에 머물러 계셨다. 드디어 9.15인천
상륙작전이 시작되면서 포성이 들리고
포탄이 산골마을 진강산에도 떨어졌다 .
그동안 강화에는 바닥 빨갱이들이 준동하여
납치 살인등이 일어나고 있었다 .
마대라는 큰개를 가지고 산에서 노루랑
토끼를 사냥하던 아저씨가 계셨는데
“이봐 ! 자네 어서 내려가보게 학교에 태극기가 걸려 있어” 하시더란다 .
9월17일날 급히 내려가보니 정말 학교에는
인공기는 온데 간데 없고 자랑스런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이 얼마만인가!
교무실에 들러 그 동안 난장판이 된 서류를
정리하는데 갑자기 학교 정문쪽에서 탕탕 하는 총소리가나
내려다보니 붉은 완장을 찬 바닥 빨갱이 김춘규가
구구식 장총을 쏘고있었다 .재형이 아저씨가 갈지자로
운동장을 있는 힘을 다해 달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
일제때 일본군으로 징용되었다 나온사람이라
그런지 곧바로 뛰지 않고 요리 조리
총알을 피해 잘도 도망을 친것이다 .
며칠전 장봉도에서 후퇴하는 어린 인민군 패잔병하나가
총을 질질 끌며 학교 앞을 지나가는 것을 마을 청년들이 잡아
허술한 마을 학습소창고에 감금했는데
그놈이 탈출하여 이미 황해도 연백으로
도주한 인민군들에세 연락을 취하여 미쳐 아군의
수중에 들어 오지 않은 강화도를 다시 덥쳐 애꿎은
면서기등 선량한 동네 유지들을
납치 하러 온것이다 , 아버지는 놀라 학교담을 뛰어넘어
근처 중섭씨네 뒷간 잿더미에 숨으셨다가 주위가 조용해지자
황급히 산골 집으로 뛰어 가시는데
요선이 아저씨가 " 자네 큰일났네 지금 자네네 집에 빨갱이
들이 형님을 잡으러 왔다고 하며 얼른 피하라고 한다.
집에 어머니에게 작별인사도 못하고 덕정산 불우리
고개를 넘어 고모님이 시집가신 불은면
기세미 당신의 누님 집으로 피하셨다 .
그 집에는 마을 사람 몇분이 모여 있었는데
고모부님과 낮에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잠자리에 들려는데 어느새
그쪽 동네 빨갱이들이 아버지를 잡으러 들이 닥쳤다.
거기에도 바닥 빨갱이가 엿듣고 있었던 것이다.
9월 18일 불은면 지서창고에 하루 붙들려
계시며 취조를 당하셨다. 곤봉같이 생긴 몸둥이로
어깨를 내려치면서 "동무는 왜 도망쳐 왔느냐?
우리 동무네 집은 얼마나 습격했느냐?” 따졌다
그때마다 한결같이 “내얼굴을 보시오.
내가 그렇게 악하게 생겼소!
어머니께서 생위손 (손 주위 염증)을 앓아 거기에 꿀이
좋다기에 누님댁에 얻으로 온것 뿐이오… "
그러나 그들은 믿지않고 아버지를 포승줄로 결박하고
잡혀온 다른 사람들과 줄줄이 엮어서
끌고가 9월 19일 강화 경찰서 무도장에 가두었다
밤새 취조 고문하고 새벽에 한 두명씩 불러, 죽이러 가는지
풀어주는지 알 수 없는 숨막히는 날이 계속되었다.
특히 아는놈이 무섭다고 건평 바닥 빨갱이 김춘규가 더 심했다.
그 곳에는 벌써 아는 동네 아저씨 몇분이 끌려 와 있었는데
한분은 귀가 멀어 잘듣지 못하는 분이다.
밤에 놈들이 그의 이름을 불렀는데도 듣지 못하자
면서기를 하던 동네 다른분이 잽싸게
그 줄에 서 그는 살고 귀가 먼 아저씨는
볍가마를 등에 메고 끌려가 양사면 인하리 바닷가에서
무참히 살해되었고 시체는 썰물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때 마대를 가지고 산 짐승들을 포획하던 동네분도
끌려가 죽창에 찔려 비명에 돌아 가셨다 .
감금 열흘째 되는날 강화도 상공에서
연합군 무스탕기가 폭격을 시작하였다.
놈들은 혼비 백산하여 납치한 사람들을
일부 풀어주기 시작하는데 아수라장이다
어머니도 할머니랑 그곳에서 아버지가 살아 나오기를
기다리셨는데 한쪽문 으로는 풀려나는 사람
한쪽 문으로는 놈들에게 끌려가는 사람으로 아우성이다.
아버지가 안보여 그안을 들여다 보니
아버지가 저쪽에서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내 혁띠 내 혁띠” 하며 찾고 계시더란다 .
어머니가 용기를 내어 뛰어들어가
”여보! 지금 혁띠가 문제야!”하시며
손으로 잡아 끌어 나오는데 놈들이
동무 저 옥상에 올라가서 인민군 만세를
부르라고 총으로 위협하더란다 .
들은 척도 안하고 죽기살기로 빠져 나오셨다.
그쯤 큰아버님은 부산으로 피난 하셨다가
인천을 통해 귀향하시다 인민군들에게 붙들려
자유 공원아래 인천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셨다.
놈들이 후퇴하면서 끌고갈 수 없어 처형을 하는데
실탄이 모자라니까 7명씩 묶어 총을 쐈다.
제일 첫줄에 등지고 계셨던 큰아버님은
탕소리와 함께 쓰러지셨는데 혼자 기적적으로
살아 나셨다.정말 천우 신조다..
놈들이 함포 사격에 놀라 급한 나머지 확인 사살을 못하고
도망칠 때 피투성이의 시체 더미에 숨어 계시다 살아 나오신 것이다 .
모든것이 인과응보라고 마대라는 큰개를 가지고
산짐승들을 무수히 사냥하던 분은 죽어 아들들이
멍석에 둘둘말아 지게로 지고와 집 뒷뜰에 묻었다 .
할머니는 인정이 많아 밥굶는 이웃에게
쌀을 퍼주고 찾아다니며 챙기셨고 대동아 전쟁기간과
6.25전쟁기간에도 성당문을 꼭 열고 지키셨다한다.
그 난리통에도 두아들을 기적적으로 살리신 것이다.
나는 어려서 부터 반공에 대해 교육을 받으며 자란세대다 그래서
난 보수주의자가 되었고 시장 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숭배한다 .
누구나 구속받기를 싫어한다 .
나 또한 그래서 자유직업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다시는 이땅에서 이런 비극은 없어야 한다.
민족주의도 좋지만 굶주리고 억압받는 북한 동포와
북한 정권과는 엄연히 구분해서 생각하여야 한다 .
요즘 돌아가는 국내 현실을 보면 안타가운 점이 한 둘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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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님의 댓글
선배님이 들어 오시니 홈피에 불이 붇기 시작하는 군요 아직 글들을 음미하지는 못하였구요 .. 시간내서 음미해 보려고 합니다. 관심 가져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태동철님의 댓글
윤 용혁 동지 ! 어쩌면 6.26 9.15!9.18 모두가 나와같을 까?내 당숙님은 놈들에게잡혀 죽기직전 탈출하여 시골의 대문 짝하나 가슴에 달고 팔미도 앞바다에 뛰여들어 밀물 설물에 3일간이나오르락 내린락 하다 아군 함정에발견 살아서 지금도생존하심은 ..
하여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 지켜야할 과제인데!1 자유만세
윤용혁님의 댓글
태선배님 당숙께서도 그런 고통을 당하셨군요.전쟁의 쓰라림과 이념의 분쟁속에서 정말 큰일 날뻘 하셨군요. 자유민주주의 만세!
행복한 하루 되세요 존경하는 선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