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11월3일
작성자 : 봉원대
작성일 : 2009.11.03 09:37
조회수 : 851
본문
읽을거리 - ‘학생의 날’ 유래
‘광주학생운동’을 들어보셨나요?
광주서 대규모 학생시위...전국적 확산
□1929년 11월 3일과 12일 광주에서 연이어 일어난 대규모 항일 학생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11월 3일 오전 광주고등보통학교학생들은 광주중학교 일본인 학생들과 시내에서 충돌한 데 이어 오후에는 가두로 진출, 시위투쟁에 들어갔다.
이번 시위는 지난 10월 30일 광주중학교의 일본인 학생들이 통학열차 안에서 우리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을 희롱한 사건이 직접적인 발단이 되었다.
이렇게 단순히 우리나라 여학생을 건드린 일본 광주 중학생에 대한 적개심으로 시작된 오늘의 시위는 이제 ‘조선독립 만세’를 ‘조선인 본위교육을 실시하라’는 구호들로 근본적인 조선독립을 외치면서 학생들의 감정적인 문제를 띄어 넘어 조국의 독립을 외치는 함성으로 울려퍼져 전국 방방곡곡에서 시위가 벌어지게 된다.
이날의 시위를 시작으로 다음해 1930년 2월초순까지 전국적으로 동맹휴학과 시위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참가한 학교는 총149개교(초등 54, 중등91, 전문 4), 참가학생수는 5만 4천여 명에 이른 것으로 집계됐다.
또 이번 학생시위로 퇴학처분을 받은 학생이582명, 무기청학 2천330명, 피검자 1천642명에 이르러 3·1운동이후 최대의 항일운동을 기록했다.
날짜별 사건일지
10월30일 - 일본 학생 후쿠다가 조선인 여학생 박기옥의 댕기머리를 잡아 당기며 희롱하자. 박준채와 일본인 학생이 난투극을 버리게됨.
10월31일 - 아침 광주로 가는 통학 열차안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떼를 지어 박준채를 둘러싸고 시비를 걸어옴.
‚ 11월 3일 - 일본 최대 명절인 명치절이었고, 우리나라에게는 개천절임.
11월12일 - 구속학생들을 석방하기 위해 ‘구속학생 석방을 위한 2차’시위를 벌임.
1953년 - 국회의원 김종신의 제기로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제정하게됨.
1974년 - 유신을 맞이해서 “학생의 날”을 폐지 하게됨.
1984년 - 신군부가 정권을 잡자 “학생의 날”을 다시 살리게됨.
1929년 10월 30일 5시 나주역, 일본 학생 후쿠다가 조선인학생 박기옥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가 “후쿠다 너는 명색이 중학생인 녀석이 여학생을 희롱해” “뭐라고? ‘센징’인 주제에 뭐라고 까불어” ‘센징’이란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박준채의 주먹이 날라갔고, 역광장에 있던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의 패싸움으로 발전하였다.
그 곳을 순찰 중이었던 일본인 순사 모리다는 조선학생들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일방적으로 조선학생만 탄압하였다. 이에 광주고보 학생들이 집단적으로 항의하자.
모리다는 학생들을 해산시켰다. 이날은 일단 이렇게 끝났다. 그 후 한일학생간의 패싸움이 끊임없이 이어지게 되었다.
‚ 11월3일은
일본놈들에게는 아주 뜻 깊은 날이었다. 일본천황의 탄생을 기념하는 명치절이었고 그리고 식민지 경제 수탈이 역대 최고를 기록한 것을 자축하기 위한 축제였다.
그렇다면 이날은 우리에겐 어떤 날이었단 말인가??
▲ 일본학생 VS 조선학생
이날은 일본이 경제 수탈을 역대 최고를 기록한 날이었다는 것은 거꾸로 우리나라 쌀을 가장 많이 일본에 빼앗긴 날이기도 하다.
부모님들이 일본에게 가장 많은 쌀을 빼앗긴 날, 우리의 명절 개천절날 우리나라 학생들은 일본 신사에 고개를 조아리고 신사참배를 해야 했던 것이다.
그것도 일요일날 강제로 등교해서 말이다. 우리학생들에게는 민족적 굴욕감과 울분을 삼켜야하는 날이었다.
그날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울분이 쌓인 학생들은 신사참배에서 기미가요를 부를 때 침묵으로 저항하였고, 신사참배가 끝나고 굴욕스런 심정으로 집에 가는 길에 조선학생이 일본학생의 단도에 얼굴을 찔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광주전지역에 퍼졌고 이것은 마른 장작에 불을 붙인 꼴이 되었다.
이미 오늘 명치절 행사에서 민족적 수모를 받으면서 굴욕감을 참고있던 학생들에게 이 사건은 싸울 개기를 만들어준 것이었다.
학생들은 광주전역에서 개별적으로 난투를 벌이다가 일본순경에게 제지를 당하자. 개별적 난투극을 넘어 이제 본격적이고 조직적인 시위를 하게 되면서 더 근본적인 독립을 외치는 독립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시위행렬이 지날 때 시민들은 환호하며 학생들을 성원했다. 시위대는 시가를 누비며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쳐됐다. 오늘 광주에서 이렇게 시작된 시위는 전국적인 항일 독립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광주학생운동’을 들어보셨나요?
광주서 대규모 학생시위...전국적 확산
□1929년 11월 3일과 12일 광주에서 연이어 일어난 대규모 항일 학생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11월 3일 오전 광주고등보통학교학생들은 광주중학교 일본인 학생들과 시내에서 충돌한 데 이어 오후에는 가두로 진출, 시위투쟁에 들어갔다.
이번 시위는 지난 10월 30일 광주중학교의 일본인 학생들이 통학열차 안에서 우리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을 희롱한 사건이 직접적인 발단이 되었다.
이렇게 단순히 우리나라 여학생을 건드린 일본 광주 중학생에 대한 적개심으로 시작된 오늘의 시위는 이제 ‘조선독립 만세’를 ‘조선인 본위교육을 실시하라’는 구호들로 근본적인 조선독립을 외치면서 학생들의 감정적인 문제를 띄어 넘어 조국의 독립을 외치는 함성으로 울려퍼져 전국 방방곡곡에서 시위가 벌어지게 된다.
이날의 시위를 시작으로 다음해 1930년 2월초순까지 전국적으로 동맹휴학과 시위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참가한 학교는 총149개교(초등 54, 중등91, 전문 4), 참가학생수는 5만 4천여 명에 이른 것으로 집계됐다.
또 이번 학생시위로 퇴학처분을 받은 학생이582명, 무기청학 2천330명, 피검자 1천642명에 이르러 3·1운동이후 최대의 항일운동을 기록했다.
날짜별 사건일지
10월30일 - 일본 학생 후쿠다가 조선인 여학생 박기옥의 댕기머리를 잡아 당기며 희롱하자. 박준채와 일본인 학생이 난투극을 버리게됨.
10월31일 - 아침 광주로 가는 통학 열차안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떼를 지어 박준채를 둘러싸고 시비를 걸어옴.
‚ 11월 3일 - 일본 최대 명절인 명치절이었고, 우리나라에게는 개천절임.
11월12일 - 구속학생들을 석방하기 위해 ‘구속학생 석방을 위한 2차’시위를 벌임.
1953년 - 국회의원 김종신의 제기로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제정하게됨.
1974년 - 유신을 맞이해서 “학생의 날”을 폐지 하게됨.
1984년 - 신군부가 정권을 잡자 “학생의 날”을 다시 살리게됨.
1929년 10월 30일 5시 나주역, 일본 학생 후쿠다가 조선인학생 박기옥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가 “후쿠다 너는 명색이 중학생인 녀석이 여학생을 희롱해” “뭐라고? ‘센징’인 주제에 뭐라고 까불어” ‘센징’이란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박준채의 주먹이 날라갔고, 역광장에 있던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의 패싸움으로 발전하였다.
그 곳을 순찰 중이었던 일본인 순사 모리다는 조선학생들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일방적으로 조선학생만 탄압하였다. 이에 광주고보 학생들이 집단적으로 항의하자.
모리다는 학생들을 해산시켰다. 이날은 일단 이렇게 끝났다. 그 후 한일학생간의 패싸움이 끊임없이 이어지게 되었다.
‚ 11월3일은
일본놈들에게는 아주 뜻 깊은 날이었다. 일본천황의 탄생을 기념하는 명치절이었고 그리고 식민지 경제 수탈이 역대 최고를 기록한 것을 자축하기 위한 축제였다.
그렇다면 이날은 우리에겐 어떤 날이었단 말인가??
▲ 일본학생 VS 조선학생
이날은 일본이 경제 수탈을 역대 최고를 기록한 날이었다는 것은 거꾸로 우리나라 쌀을 가장 많이 일본에 빼앗긴 날이기도 하다.
부모님들이 일본에게 가장 많은 쌀을 빼앗긴 날, 우리의 명절 개천절날 우리나라 학생들은 일본 신사에 고개를 조아리고 신사참배를 해야 했던 것이다.
그것도 일요일날 강제로 등교해서 말이다. 우리학생들에게는 민족적 굴욕감과 울분을 삼켜야하는 날이었다.
그날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울분이 쌓인 학생들은 신사참배에서 기미가요를 부를 때 침묵으로 저항하였고, 신사참배가 끝나고 굴욕스런 심정으로 집에 가는 길에 조선학생이 일본학생의 단도에 얼굴을 찔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광주전지역에 퍼졌고 이것은 마른 장작에 불을 붙인 꼴이 되었다.
이미 오늘 명치절 행사에서 민족적 수모를 받으면서 굴욕감을 참고있던 학생들에게 이 사건은 싸울 개기를 만들어준 것이었다.
학생들은 광주전역에서 개별적으로 난투를 벌이다가 일본순경에게 제지를 당하자. 개별적 난투극을 넘어 이제 본격적이고 조직적인 시위를 하게 되면서 더 근본적인 독립을 외치는 독립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시위행렬이 지날 때 시민들은 환호하며 학생들을 성원했다. 시위대는 시가를 누비며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쳐됐다. 오늘 광주에서 이렇게 시작된 시위는 전국적인 항일 독립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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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載峻님의 댓글
11월 3일 - 일본 최대 명절인 명치절이었고, 우리나라에게는 개천절임==> 우리 나라 <font size=3 color=red><strong>개천절 10월3일이 위와 같이 11월3일</stronf></color></size>로 오타가 나 있군요 바로 잡아야죠? 자료 감사 합니다</b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