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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人터뷰 (10)이승윤(49회) 前 부총리(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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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신문(09. 6.29)
“인재 키워서 중앙 진출 큰 소리 내야 인천 발전”
인천人터뷰 (10)이승윤 前 부총리
“인천이 고향이어서 외로웠습니다.”
연세대·서울대·서강대 교수, 4선 국회의원, 재무부장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금호그룹 고문 등 한국에서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자리를 두루 거친 이승윤(78) 전 재경 인천향우회장은 고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한 마디엔 인천 촌놈(?)인 그가 중앙 무대에서 어떤 사람들과 치열하게 경쟁해 오늘의 자리에 이르게 됐는지가 함축돼 있어 보였다.
뛰어난 재능과 함께 정치화·세력화 돼 서로를 밀고 당겨주는 타 지역 최고 엘리트와 어깨를 겨뤄 인천이 낳은 최고위직 관료이자 당대 최고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하며 인천의 명예를 지킨 그가 수시로 느꼈을 ‘소외감’이 묻어있었다.
인천에 대한 폄하라는 오해를 살 수도 있지만 그 보다 인천에서 더 많은 인재들이 나오길 희망하는 고향 인천에 대한 애정이 배어 있는 이 말엔 앞으로 인천을 이끌어 나갈 젊은이들이 새겨야 할 소중한 메시지가 들어 있음이 분명했다.
지난 23일 오후 주한 중국 대사관저와 캐나다 대사관저가 위치한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고급주택가에서 약 두 시간 동안 관료로 성공한 ‘인천인’ 이승윤 전 부총리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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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총리님에 대해 지역에서 많이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요.
▲3년여 전부터 여기 성북동에 집을 짓고 살고 있습니다. 아직 금호아시아나 고문으로 있긴 하지만 이제 정리 할 때가 됐지요. 최근에는 남덕우 전 총리와 함께 경제 교류에 공헌했다는 공으로 일본 정부가 주는 훈장인 ‘욱일(旭日)대수장’을 받기 위해 일본에 다녀왔지요.
-인천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영문학과에 입학했으나 경제학자와 경제 관료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요.
▲원래 경제학에 관심이 많았어요. 단지 6.25 사변이란 시대 상황에서 영어를 잘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서울대 영문학과에 진학했던 것입니다.
-미국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한 뒤 30대 초반에 국내 최고 대학인 서울대를 뒤로 하고 서강대로 이직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1964년 서강대가 새로 생기면서 서울대보다 3~4배에 달하는 임금을 제시했고 무엇보다 이론이 아닌 실증적 학문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 학교를 옮겼습니다. 경제연구소 설립 제안도 매력적이었고요. 제가 서강대로 가면서 당시 국민대에 있던 남덕우 교수와 미주리대 후배인 김만제를 스카우트, 이후 서강학파가 형성됩니다.(이승윤·남덕우·김만제 교수는 모두 부총리나 총리를 지내며 정치에 참여했다.)
-서강학파의 경제관은 무엇이 다른 것인가요.
▲쉽게 말해 빈곤탈피를 위한 근대화를 최우선 목표로 생각했던 경제학자이라고 보면 됩니다. 당시로서는 절대적 빈곤을 없애기 위해 고도성장을 최우선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분배문제에 관심을 가졌더라면 우리나라 경제는 지금처럼 발전할 수 없었을 겁니다.
-교수에서 갑자기 정계에 입문한 계기가 있다면.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에 같이 서강대에 있던 남덕우 교수를 재무장관으로, 저를 금융통화위원으로 임명했습니다. 제가 쓴 ‘화폐금융신론’이 베스트셀러였고 교수 시절 박 대통령의 공부 모임이라 할 수 있는 화요회 멤버로서 솔직하게 정부에 대한 비판을 하곤 했던 시절입니다. 모 방송사의 객원 논설위원 역할을 하며 경제분야 토론 등의 사회를 많이 봤는데 박 대통령이 이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관료로 뽑은 것이지요. 이후 박 대통령은 경제를 아는 사람이 입법부에 들어가 법을 만들고 야당 의원들과 이론적으로 대적해야 한다며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으로 추천했어요.(그는 현 비례대표와 비슷한 9·10대 유정회 의원을 지냈다.) 박 대통령이 서거하고 서울의 봄을 거치며 광주사태 등으로 나라가 혼란스럽게 되자 10대 국회 후반인 1980년 최규하 대통령 서리가 재무부 장관으로 일해 달라고 부탁, 약 3년간 재무장관을 맡았습니다.
-이후 1988년 1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될 때 까지는 무슨 일을 하셨는지요.
▲장관에서 물러난 뒤 EC 및 사우디 대사 물망에 오르내리다 여러 가지 이유로 불발에 그치고 1983년부터 약 6년간 해외건설협회장을 맡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기간이 큰 부담없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가장 행복하게 일한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중동건설 붐이 불던 이 때 우리나라 노동력의 중동 파견을 통해 상당한 외화를 벌어들였지요.
-1988년 13대 국회 때 갑자기 북구(현 부평구)에서 출마했는데 남동구가 고향이면서 부평에서 출마한 이유는.
▲어느 날 친구인 김윤환이 만나자고 하더니 ‘당신 부총리하고 싶지’ 그러는 거예요. 그렇다고 하니까 국회의원이 돼야 그 자리에 앉을 수 있다며 북구 을에 선거구가 생겼으니 출마하라고 합디다. 여론조사를 해 보니 유권자 인지도가 20%에 불과했지만 중앙당에서는 재무부 장관까지 했으니 아무데나 나가도 당선된다고 판단하고 있었지요.(그는 13대에 무난히 당선, 1990년 노태우 대통령 정부에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입각했다. 그는 부총리시절 물가안정과 부동산투기 억제에 큰 족적을 남겼다.)
-지역에서 재선을 한 뒤 15대 국회에는 출마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그는 불출마 성명을 발표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함.)
▲정치에 환멸을 느꼈습니다. 솔직히 3당 합당 이후 정치에 의욕이 없어졌어요.(정치권에서는 금융실명제를 전면 시행한 김영삼 대통령과의 경제 이념 차이가 불출마 요인으로 알려지고 있음.)
-일각에서 4선 의원과 부총리까지 지냈으면서도 인천을 위해 한 일이 별로 없다는 평가도 있는데요.
▲제가 13대에는 민정당 정책위원회 의장, 14대에는 민자당 정책위원회 의장을 맡아 주로 중앙에서 많은 일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당시 힘이 있었기 때문에 지역발전에도 상당한 역할을 했어요. 김포공항에서 인천(계양)을 거쳐 소사로 연결된 4차선 도로를 만들어 ‘이승윤 도로’로 불려지기도 했고 안산(시화)과 인천이 경쟁을 벌인 국제공항을 인천 영종도로 유치하는 데에도 일조 했습니다. 인천에 여자대학을 설립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워 수도권 규제정책에도 불구, 현 경인여대를 건립하는 데도 한 몫 했고요.(이에 대해 정온모 여사는 남편이 정계 은퇴 선언후 다시 출마하려 한다는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수 년 동안 인천을 찾지 않은게 이 같은 오해를 낳은 이유라고 해명했다.)
-인천을 포함한 몇 곳을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아는데.
▲남덕우 전 국무총리와 ‘동북아포럼’을 창립, 함께 활동하면서 1992년 이후 고도성장에 성공한 중국을 이기기 위해서는 그들이 쉽게 따라올 수 없는 분야에 투자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외국자본을 최대한 유치해야 한다는 판단으로 2001년 김대중 대통령을 직접 만나 인천·부산·여수 등에 외국 교육기관과 병원이 들어오고 외국자본이 집중 투자되는 경제자유구역을 설치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특히 인천은 인천국제공항과 인천항이 있어 물류 중심의 경제자유구역으로 가장 적합하다고 강조, 이 안이 받아들여 졌습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인천경제자유구역이 성공했다고 볼 수 없지 않나요.
▲성공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요. 현재 실질적인 외자 유치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니까요. 인천경제자유구역의 경우 인천시와 중앙정부 간 손발이 제대로 맞지 않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인천시는 송도 등이 인천 땅이라며 중앙정부에 예산만 내 놓으라고 요구하고 중앙정부는 시를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인천경제자유구역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특수법인제(특별지자체)를 도입해야 한다고 봐요. 경제자유구역은 지역 사업이 아닌 국가적 프로젝트기 때문입니다. 지역 차원에서는 외자유치에 한계가 있는 만큼 중앙정부가 지원하도록 대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아파트만 지어서는 경제자유구역이 성공할 수 없어요.
-교수·국회의원·관료 중 가장 보람에 남는 분야는.
▲저는 정책을 세우고 이를 이행해 국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정부 일을 할 때가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는 자부하고 있습니다.
-시민들이 인천엔 정체성이 없다는 비판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인천출신 원로로서 이에 대해 한 말씀 해 주신다면.
▲인천시민들이 응집력이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는 태생적으로 인천엔 토박이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정치세력화가 되지 않고 따라서 중앙에서 중용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인천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발언권을 강화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이 잘되면 배 아파하는 시기심을 버리고 무엇보다 인재를 키워야 합니다.
글=김기준기자 gjkimk@i-today.co.kr
사진=김성중기자 jung@i-today.co.kr
1931년 11월7일 인천 남동구 논현동 출생
논현초, 인천고,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미국 위스콘신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
서울대 상과대 부교수·서강대 경제학과 부교수·교수 역임
9~10(유정회)·13·14대 국회의원, 민정당 정책위의장, 민자당 정책위의장
해외건설협회회장
재무부장관·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금호그룹 고문
인천고등학교 총동문회장
재경 인천향우회 회장
인천신문
i-today@i-today.co.kr
입력: 2009-06-28 19: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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