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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성 님이 들려주는, 인천사람 스스로 등돌린 인천 역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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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한테 문화가 있느냐 생각해 보면 늘 깜깜합니다. 우리한테 삶이 있느냐 돌아보면 언제나 까마득합니다. 오늘날 우리 문화는 문화라 할 수 없고, 우리 삶은 삶이라 할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곰곰이 우리 삶자락을 돌아보면 저로서는 슬프기 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마다 다 다른 넋과 얼을 안고 살아가는 목숨이지만, 우리들은 태어날 때부터 똑같은 병원에서 태어나 똑같은 신생아실을 거치고 똑같은 종이기저귀와 분유로 길러지다가 똑같은 예방주사를 맞고, 똑같은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 영어와 한자 조기교육을 받은 다음, 초중고등학교에서 똑같은 제도권 교육으로 입시지옥에 빠져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일류대학교든 이류 삼류 사류 대학교든 어떻든 대학교 졸업장은 거머쥐어야 하는 가운데 책상머리에서 펜대 잡고 굴리는 일자리를 얻으려고 아득바득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하여 혼인을 하건 맞선을 보고 혼인을 하건, 나이가 너무 들지 않은 때에 혼인을 해서 아파트에 신혼집을 얻고 애 하나나 둘 또는 셋쯤 낳아서 부모님한테 손주를 보여 드려야 합니다. 좀더 나이가 든 다음에는 우리 아이들한테 우리가 거쳐 온 똑같은 길을 걷도록 해야 합니다.
이러는 동안 우리가 책을 읽는다 하면 무슨 책을 읽고, 책을 읽어 무슨 지식인가 얻는다 하면 어떤 지식이 마음밭에 스며들까 궁금합니다. 우리가 배우는 영어는 어디에 어떻게 쓰는 영어인지 궁금하고,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우리 삶에 어떻게 파고드는 역사일는지 궁금합니다.
더욱이, 모두들 먹고살기 바쁘다 하면서 자기가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터전에 눈길을 못 두게 되는 이즈음, 인천 옛 도심지라 할 배다리 헌책방골목 한켠에서는 고즈넉한 이야기마당이 열립니다. 헌책방 〈아벨서점〉 아주머니가 당신 서른일곱 해에 걸친 구슬땀으로 일구어 낸 조그마한 〈시다락방〉(정식 이름 : 배다리 시가 있는 작은 책길)에서 서른 사람 안팎 모인 가운데 “인천 이야기 100장면”이라는 이름을 걸고 이야기판을 마련합니다.
이야기판에 나선 이는 시인이면서 고등학교 교사였고, 〈인천일보〉가 창간할 때부터 힘을 보태고 기자로도 뛰기도 했던 조우성 님. 서울에 사는 분한테는 낯선 이름일 테고, 인천에 사는 사람들한테도 낯익지 않다고 느낄 분이 적지 않으리라 생각하는데, 조우성 님은 《소리를 테마로 한 세 편의 시》와 《아프리카. 기타(其他)》와 《코뿔소》라는 시집을 펴냈고, 시집이 아닌 책으로는 《간추린 인천사》와 《인천은 불타고 있는가》와 《월미도 이야기》와 《20세기 인천 생활 문화연표》와 《인천 이야기 100 장면》과 《영종 용유지》를 쓰고 엮어냈습니다. 학교 교사이면서 시인이었고, 시인이면서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했는데, 교사나 문학가라는 길보다는 ‘인천 역사를 파헤치는 길’로 훨씬 긴 시간 더 많은 땀을 흘리며 살아온 분입니다.
이제, 고등학교에서는 정년퇴임을 했고 〈인천일보〉에 날마다 짧은 글을 싣는 한편, 틈틈이 곳곳에 강연을 다니면서 ‘인천 역사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조우성 님은 거의 숨돌릴 틈 없이 온몸으로 불꽃을 튀기듯 이야기꽃을 피워내 주었습니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두 시간이 넘는 동안 숨을 죽인 채 이야기에 빠져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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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마당은 2009년 1월 30일 금요일 낮 세 시부터 다섯 시 반까지 펼쳐집니다. 조우성 님은 네 시간 동안 들려줄 이야기할 준비해서 이를 추려 두 시간 남짓 펼칩니다. 이러느라 이야기에서는 가볍게 지나친 대목이 많은데, 인천에 있는 ‘송도유원지’와, 인천시가 꾸리는 ‘송도신도시’에 쓰인 ‘송도’라는 땅이름이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는가는, 이날 나누어 준 자료집에 꼼꼼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 이 의문에 대한 열쇠는 일본 해군이 자랑하는 소위 ‘삼경함(三景艦)’이 지니고 있었다. ‘삼경함’이란 무엇이고, 인천과는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조선총독부 발행 《보통학교 국어독본 제7권(1914년 발행)》을 보면, 소위 ‘일본 3경(三景)’이 소개되어 있다. 일본은 미야기현의 ‘송도(松島)’, 교토의 ‘교립(橋立)’, 히로시마의 ‘엄도(嚴島)’를 ‘3경’이라 했는데, 일본 해군이 그 이름을 딴 순양함 3척을 취항시켜 소위 ‘3경함’이라 일컬었던 것이다. 동학농민운동 이후 인천항을 수시로 드나들었던 ‘송도호’는 1892년 프랑스에서 건조돼 청일전쟁 때는 연합함대 기함으로서, 러일전쟁 때는 제3함대 제5전대로 참전한 바 있으며, 1908년 4월 대만 마공(馬公) 지역에서 선내 폭약고 폭발로 침몰해 370명 중 207명이 사망했으며, 현재 나가사키의 사세보 해군묘지에 이들의 ‘순난자의 비’가 세워져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일본이 인천을 교두보로 삼아 청일ㆍ러일 두 전쟁에서 이겨 아시아에서의 패권을 차지했다는 점이다. 러시아와 청나라를 쳤다는 것은 군국주의 일본으로서는 대단한 자랑거리였고, 그 전승을 기리기 위해 두 전쟁과 관련이 깊은 인천에 그를 상징하는 정명(町名)을 여러 군데 붙였는데, 그 가운데의 하나가 ‘송도’였다 .. (자료집 6∼7쪽)
조우성 님은 손수 온갖 사료를 뒤적여서 ‘인천에서 쓰이는 松島’라는 이름은 일본 군함이름이었음을 밝혀낸 다음, 당신이 글을 쓰는 〈인천일보〉에 글을 쓰고, 또 이 이야기는 중앙 일간지와 방송국에서도 취재를 하여 기사로 내보낸 적이 있는데, 인천시 행정은 ‘송도신도시’라는 이름을 바로잡지 않습니다. 그예 밀어붙이기만 합니다. 또한, ‘송도 = 군함이름’을 인천 지역 신문기자며 지식인이며 누구나 알게 되었음에도, 이러한 잘못이 고쳐지도록 마음을 쏟거나 소매를 걷어붙이는 사람은 아직 조우성 님을 빼고는 나오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지식인이나 학자나 기자가 이렇다고 한다면, 인천시민인 우리 스스로 ‘그런 엉터리 이름을 새로 짓는 도시에 함부로 붙이면 안 돼요!’ 하고 외칠 수 있어야 할 텐데, 여느 시민들도 여느 인천 지식인과 다를 바 없이 ‘송도란 이름이 일본 군함이름이었어? 그런데 그게 뭐 어때서?’ 하고는 지나치고 맙니다.
어쩌면, 인천이라는 곳이 워낙 이렇게 ‘인천 지역 역사와 문화와 사회에 등을 돌리게 되는 곳’이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인천에서 태어나 자랐어도, 가까운 서울에 가서 ‘성공(돈 많이 벌어들이기)’하고 서울에서 내로라할 만한 노른자 땅에 아파트 얻어서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인천에서 뿌리내려 살게 되어도 정작 ‘내 고향 인천은 어떤 곳일까?’ 하고 찾아보지 않기 일쑤입니다. 제 지난날을 돌아보아도 그렇습니다.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에 걸쳐, ‘내 고향 인천을 자랑스럽게 여기자’고 들려준 선생님은 한 분도 없었다고 떠오릅니다. ‘내 고향 인천에서 돌아볼 만한 발자취는 이렇게 있다’고 가르쳐 준 선생님 또한 한 분조차 없었다고 떠오릅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나 사회를 읽는 눈길을 가르치거나 말한 분은 있지만, ‘내가 내 고향에서 내 고향을 일으키거나 북돋우는 길을 어떻게 찾으면 좋을까’ 하고 이야기해 준 분은 없었습니다.
이날 이야기마당에는, 조우성 님이 광성고등학교를 다닐 때 가르쳤던 제자 몇 사람도 함께하면서 ‘그때는 썩 대수롭지 않게 들었던’ 이야기를, ‘오늘은 눈을 빛내면서 듣’기도 했습니다. 더 많은 제자, 또는 더 많은 인천사람이 이날 이야기마당을 함께할 수 있었다면 한결 나았을 텐데, 인천에서 뛰는 기자들이라도 좀 와서 구경해 보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보다는 오늘 함께한 사람들 마음자리에 좋은 빛줄기 하나가 살며시 스며들었다면, 이 빛줄기가 찬찬히 가지를 치고 뻗으면서 널리널리 이웃사람들한테 퍼져나갈 수 있지 않겠느냐 싶어요. 모든 이가 알면 더 나을 수 있지만, 모든 이가 알아주지 못하더라도 우리들 몇 사람이 제대로 알아주고 읽어내며 곰삭이게 된다면, 우리 가슴에 무럭무럭 자라는 빛줄기가 우리 둘레 사람들한테 좋게 퍼져나갈 테고, 이 살가운 빛줄기는 우리 뒷사람한테 너른 텃밭으로 물려줄 수 있으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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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성 님이 들려준 이야기를 공책에 옮겨적어 보았습니다. 이야기마당을 함께하지 못하신 분들도 이 말을 새겨읽으면서 좋은 빛줄기를 얻을 수 있으면 반갑겠습니다. 인천 분은 인천에 사는 분들대로, 인천 아닌 곳에 사는 분들은 인천 아닌 곳에서 당신 님들 고향땅을 살가이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줄기를 얻어가실 수 있으면 더없이 고맙겠습니다.]
1. “제가 원래 사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쓰라는 시도 안 쓰고, 어쩌다 보니 ‘인천 인천’ 하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고등학교 선생을 하다가 〈인천일보〉 창간할 때 도움 주고, 또 같이 일을 하자고 해요. 그래서 문화부장 경제부장 부국장 하다가 학교로 다시 돌아오는데, 그곳에서 지역문화를 맡고 보니까, 지역문화를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더라고요. 어디 가서 물어 보면 잘 모르고, 어르신들이 당대를 살아온 경험담은 구수하고 감화를 많이 주셨는데, 그 전 (시대) 것을 물어 보면 오리무중이 되고 …… 제가 선생이니까, 하루는 기자 시절인데, 후배 기자들은 갈 수 없고 제가 가야만 한 자리인데, 인천시 모 교육감을 취재하는 데에 갔어요. 그 자리에서 그분이 뭐라 하느냐면, ‘인천에 사는 것이 창피하다’고, ‘(일제강점기 때) 전국에 독립운동 많이 했는데, 인천엔 하나도 없다’ 그래요. 그래서 그런가 보다 하며 찾아보고 쫓아다녀 본 겁니다. 나는 딴 건 후배 기자한테 맡겨 놓고, 저는 독립운동 자료 찾는 거예요. 부산으로 대전으로 서울로 가고 하니까, 그 (교육감이 했던) 말이 사실이 아니에요. 우리가 서로 관심없는 거예요. 석 달 동안 찾아보니까, (일제강점기 때 1919년 그해에) 한 달 내내 독립운동을 했어요. …… 그 당시 인천 인구가 19만이었고 이 가운데 일본인이 반이에요. 그리고 무기를 만드는 공장을, 일본이 두 군데에다만 만들었습니다. 하나는 만주에 있어요. 그리고 하나는 인천입니다. 인천조병창이 그래서 생긴 겁니다. 얘네들(일본)이 무기의 공급처를 인천으로 삼았어요. 대륙침략 병참기지를 인천에 둔 겁니다. 장갑차만 아니라 잠수함도 인천에서 만들었습니다. 저기 인천조선소 가면 어르신들은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저는 일본 잠수함에 들어가 봤어요. 그러니 감시가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제분소가 있지요, 철공소가 있지요, 모든 행정 경제 기관이 인천에 다 있습니다. 그러니까 1919년에 만세운동을 한 것은, 타지와 인천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고 여러분이 선 창영동 이 자리가 1919년 3월 6일에 인천 창영국교 아이들이 처음으로 독립운동을 인천에서 했던 발상지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영화정보산업고가 된 그때 상업학교까지 불이 붙어서 1919년 4월 6일까지 어마어마한 만세운동이 계속되었고, 일본 경찰들은 전전긍긍했어요. 이것이 우리 선배들의 자랑스러운 기억입니다. 그런데 인천의 신문쟁이나 내로라하는 지식인은 아는 체를 안 했고,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지자체가 탄생하기 전까지는 지역에 관심을 두지 않았어요. 인하대는 인천에서 내로라하는 대학교입니다. 그런데 이 인하대에는 한국학연구소는 세웠는데 지역학연구소, 그러니까 인천학연구소가 아니었습니다. 인하대는 지금도 인천학연구소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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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실, 인천은 지역색이 없다는데, 사실, 지역색이 없기 때문에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겁니다. ‘야, 저기(인천)는 지역색(차별)이 없지! 저기 가면 밥술 뜰 수 있겠다!’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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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하대는 하와이 이민이 돈을 모아 세운 학교입니다. 얼마 전에 이민 100주년이었는데, 그 이민 100주년 대 뭐 했느냐? …… 그게 인하대 수준인데, 지역 수준이 대학 수준이고, 대학 수준이 지역 수준이에요. 자기를 태어나게 한 역사를 잊은 거예요. 자기 역사를 잊은 거예요. 부산대에서는 외국인 교수가 ‘하와이 이민 100년사’ 책을 냈어요. 그러면 인천에서는 뭐를 했느냐? 세미나도 안 했어요. …… 야후 같은 데 들어가서 ‘조선왕조실록’ 들어가서 ‘인천’을 쳐 보세요. 수천 개가 나옵니다. 사실 인천이 조선 때나 고려 때 어떠했느냐는 하나도 연구가 안 되는데, 실제로 조선에도 살았고 고려에도 인천에서 사람이 살았습니다. 인천이 역사에 나타나는 것은 삼국사기 때부터이지만, 실제로 등장하는 것은 18세기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서세동점이면서 …… 그네들(서양사람)이 그때 증기선 타고 기나긴 나날을 거쳐 여기까지 온 까닭이 따로 없지요. 제국주의 야욕 때문이지. …… 우리 모습을 제 눈으로 똑바로 봐야겠다, 파리에 가서 에펠탑 올라가 보니 대단히 높더라고요. 에펠탑 지은 게 1889년이에요. 그리고 그 3년 뒤에 우리는 문호를 개방했어요. 프랑스는 병인양요 때 외규장각을 다 훔쳐갔습니다. 약탈입니다. 우리는 프랑스를 문화국가라고 하는데 약탈국가입니다. 루브르가 박물관입니까? 거대한 장물방입니다. 미이라가 프랑스에 더 많아요. 이집트보다. 중남미에서 약탈하고 세계 곳곳에서 약탈하고. 그런데 인하대에는 프랑스문화원을 세웁니다. 사실 인하대 교수는 선언해야 해요. 프랑스가 외규장각 도서 반환하기 전까지 프랑스문화원을 안 세우겠다고 해야 합니다. …… 왜냐하면 인하대에 인천사람이 없거나 인천을 아는 사람이 없는 겁니다. 그러면서 ‘외국사람과 교류한다’고 하는데, 참 엇박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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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 다음에 일본이 작약도와 영종도를 약탈하고 학살하는데, 그때 영종진 대포 10문을 가져갔어요. 그게 지금 일본 야스쿠니신사에 가 있어요. 거기는 전범(전쟁범죄자)이 모여 있고 전쟁박물관이 있다는데, 일본놈이 쓴 책에 이 얘기(영종도를 약탈한 뒤 대포를 기념으로 일본으로 가져가서 야스쿠니신사에 모셔 두었다는 얘기)가 적혀 있어요. 그런데 어느 누구도, 신문기자도, 영종진 우리 대포를 반환하자고 안 해요.”
5. “철도, 전화, 우표, 등대, 해관(세관), 기상관측, 동전 찍은 일, …… 근대에 이루어진 일이, 대부분 ‘그게 어디서 시작했지?’ 하면 다 인천이에요. 근대문화의 도입지가 인천이에요. 농업국가에서 근대자본주의로 바꾸는 시범지역이 인천이에요.”
6. “인천은 전국에서 모여들었어요. …… 잡종이 강세예요. 남의 것을 포용하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에요. 적대적 관계가 아닌 포용의 관계, 이것이 인천의 큰 자산입니다. 전국 각지에서 다 와서. …… 미국이 저런 힘을 내는 것은 오바마를 뽑는 힘입니다. 빌게이츠는 350만 달러를 소아마비 아이들 치료하라고 내는데, 우리는 이건희를 봐, 어떻게 하는지. 양키 백날 욕하면 뭐해. 우리는 그런 사람을 뽑았느냐 말이야. …… 바다는 크지요? 인천을 짠물이라 하는데, 부끄러워 하지 마세요. 짠물만 썩지 않아요. 성경에 너희가 소금이 되라 하지요. 세상의 온갖 물이 다 모여야 짠물이 돼요. 전국의 인적 자원은 다 짠물에서 나왔을 거예요. 군대에 가면요, 인천에서 왔다고 하면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경우가 있는 사람이라는 거죠. …… 1902년에 하와이 이민을 떠납니다. 인천에서. 그때 주류가 누구냐. 80%가 인천사람이에요. 지금도 이민 가기 힘든데, 그때 프론티어 개척자 정신 가진 게 인천사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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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itv 처음 개국할 때, 광성고등학교에서 선생할 때인데, 그때 교무실에 있는 티브이 앞에 서 있는데, 제 옆에는 제물고등학교 나온 선생님 한 분, 또 한 옆에는 인성여고 나온 선생님 한 분이 서서 같이 봤어요. 그때 교무실에 서른 명도 넘는 다른 선생님들은 다 사무 보고 있어요. 관심도 안 쓰고. 딱 세 명만 개국하는 모습을 감격하면서 지켜봤어요(인천은 itv가 처음 생길 때까지만 해도 방송국은커녕 한국방송이나 문화방송 인천지사 따위조차도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인천시민 힘으로 민간방송을 만든 일에 감격할 수밖에). 그게 바로 인천의 모습이에요. 선거를 하는데 투표를 전국에서 제일 안 해요. 제가 지 지역의 선량을 뽑는데 포기한다? 그런데 무슨 발전을 바라요? 시민단체나 기자가 늘 ‘인천은 정치력이 부재한다’고 하는데, 정치력은 정치인에서 나오지 않아요. 시민한테서 나와요. 투표율에서 나와요.”
8. “2014년 아시아경기대회를 앞두고 여러 가지 말이 많은데, 그런 건 둘째치고, 주경기장 짓는 일을 놓고 볼 때, 똑같은 세계행사를 대구나 부산에서 한다면, 나라에서 국비로 40%를 지원해 줘요. 그런데 인천은 나라에서 안 도와줘요. 인천은 포스코한테서 돈을 빌려서 짓는데, 이 돈은 인천사람들이 빚으로 포스코한테 갚아 줘야 할 돈이에요. …… 예전에 인천대 시립화한다고 할 때 저는 반대했어요. 야, 거기 왜 인천 돈 넣느냐, 전국에 다 국립대 있는데 우리는 인천에 왜 국립대 안 만들어? 인천시민이 나라돈을 275만 명이 내는데, 왜 인천은 국비 지원을 못 받아? …… 전국에서 향우회가 가장 잘 되는 도시가 인천이야. 향우회에서 기부하라고 하면 몇 천만 원씩 척척 내. 내가 잘 알지요. 광성고 꼭대기에서(광성고등학교가 도원동 꼭대기에 있어서, 공설운동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임) 내려다보면, 체육대회 맨날 해. 이 양반들이 인천에 와서 사업해 돈 벌면 다 고향으로 가져가지, 인천에서 안 써. 그러니, 이 지역의 정치행위에 관심을 안 둬. 공백 상태야. 역사의 공유, 체험의 공유잖아. 이 문화와 역사와 체험의 공유가 우리를 살게 하는 거야. …… 난 자전거 많이 타라고 해. 자전거 타면 멀리 못 가. 부산 못 가고 대구 못 가. 고작 송현동 조금 돌지. 그런데 지역 사회 교류가 자전거야. 우리 이웃을 알자는 거지.”
9. “지식인들은 밤낮 민중을 말하지만 밤낮 맥주만 마셔. 그러니까 ‘송도신도시’가 생기는 거야. 여러분, 송도섬 가 보셨어요? 송도섬 가 보신 분 있어요? 그런 섬 인천에 없어. 외암도 내암도밖에 없어. 그런데 땅을 매립해서 ‘송도신도시’라고 붙인 거야. 아니, 이름을 막 붙여도 되나? 자기 새끼 이름을 막 붙이나? 거기는 섬도 아닌데 섬이라고 붙였어. 그 ‘송도’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 인천을 제 집처럼 드나들던 일본 군함의 이름이에요. 그건 분명합니다. 일제 시대 동이름이 몇 개가 천황이름이고, 그리고 해군과 육군 제독 이름이고, 그리고 군함이름이에요.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곱 척 이름이 그것이고, 그 가운데 하나가 ‘송도정’이었어요. 그런데, 만약에 그게 하나만이었다면 문제가 안 돼요. 일곱 정(‘정’은 일본사람이 우리로서는 ‘동’을 가리키는 말)이나 그러니 문제지요. 원래 거기가 옥련동이에요. …… 여러분이 ‘송도’라 부른 건 뭐냐. 유원지 이름이에요. 송도유원지. 여러분, 고기집을 ‘텍사스불고기집’으로 한다 해서 문제 돼요? 괜찮지요? 그런 겁니다. 그런데 이건 ‘송도신도시’는 지명이에요. …… 우리가 일제가 역사를 왜곡했다고, 독도 가지고 방방 뛰잖아요. 송도는 우리가 스스로 이렇게 하는 거예요. …… 저 송도신도시는 인천시장이 뭐하고 떠나든 21세기에 인천을 대표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일본 군함이름이라니. 이건 공무원이 인천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연수동 사람이 인천을 몰라요. 어르신도 ‘옛날에 송도정이라 했으니 그랬지’ 하니까 그런 줄 아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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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여러분, 러일전쟁추모비 가 보신 분 있나요? 없으시면 한번 꼭 가 보세요. 가 볼 만합니다. 인천에 러시아 장병 함몰 추모비가 있어요. 사실 이건 말이 안 돼요. 도대체 왜 내 나라 차지하겠다고 방자하게 들어온 저 제물포해전인데, 이거를 추모하는 비를 우리가 세워 주겠다? 말도 안 돼요. 태국에서 아셈회의 할 때 푸틴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한테, ‘그때(제물포해전) 조선사람이 러시아를 도와줘서 고맙다. 그래서 추모비 하나 세우려고 한다’고 말하니, 반기문 총장이 ‘네’ 한 거지요. 인천 역사를 모르니까요. …… 자유공원 복원도 그렇습니다. 존스톤별장은 상해에서 사업하는 서양인이 여름에 와서 쉬려고 만든 겁니다. 세창양행 숙소는 그곳 직원이 쉬려고 한 곳입니다. 그곳은 사진도 없습니다. 그런데 인천에서 내로라하는 사람이 모여서, 그걸 살려야 인천의 정체성을 살린다고 한 거예요. 곡학아세가 따로 없는데, 그것 때문에 저는 인간관계도 버렸습니다. 그건 복원도 정체성도 아니라 하니까, ‘창조적 복원’이라고 답변을 해요. 전 이런 말을 60년 만에 처음 들었습니다. 이건 세상을 우롱하는 말이지. 창조는 뭐고 복원은 뭡니까. 그리고 인천의 정체성이라니, 인천 정체성이 뭡니까. 어떻게 근대제국주의 자본가가 세운 빌딩을 되살려 세우는 게 정체성입니까? 더 이상한 건, 신문쟁이가 이런 얘기를 안 해요. 웃기는 것은, 영국 대사관은 설계도가 나왔어요. 그걸 복원하겠다는데, 그게 파라다이스호텔 자리인데, 복원을 자유공원에 한대요. 알렌별장도 자유공원에 한대요. 러시아대사관도 자유공원에 한대요. 그리고 이렇게 복원하는 데에 275억을 쓰겠대요. 이것이 인천의 모습입니다. 야, 내가 인천을 떠나야 하나? 창피한 노릇이에요. 현역 교수, 역사학자가 나서서 다 이런 얘기를 하네. 참 아주 답답했어요. 그런데 경실련에서 세미나를 하는데, 40대 소장학자가 모여서, 그 ‘창조적 복원’이라는 논문을 낸 사람한테 그게 말이 되드냐고 반박을 하는 거예요. 아, 참 놀랐어요. 아직 이런 사람들도 있구나. 그런데, 기자들도 모르니까 못 쓰고, 인간관계 때문에 안 써요. 불쌍한 건 시민이에요.”
11. “(배다리) 산업도로도 그래요(배다리 산업도로는, 인천시 종합건설본부에서, 동네 골목집 사이를 파헤치고 너비 50∼70미터짜리로 해서 고가도로로 놓으려고 하는 화물차 전용도로 계획안에 따른 공사). 행정가가 인천사람이라면 못 뚫어요. 어린 시절에 배다리에서 놀아 봤으면 못 뚫어요. 지역사, 문화, 공동체의식을 공유하지 못하고, 어줍잖은 의식만 내세우려고 들어. 우리가 다 공부를 해서, 해외여행을 많이 해야겠다 싶어. 도대체, 지구촌에서 동시간대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가 봐야겠어. 시민운동이든 공무원이든 모두 그 테두리에 갇혀 사니까 다 몰라.”
12. “긴 안목으로 지역을 바라봐야 하지 않느냐 싶어요. 우리가 당대를 사니까 역사를 우리 것으로 아는데, 신도시가 그래요. 우리가 지금 후세가 살 땅을 다 매립해 버렸어요. 내가 살고 있다고 다 메꾸고 있어요. 후세한테 여지를 안 주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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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작은자전거 : 인천+부천+수원 자전거 사랑이] http://cafe.naver.com/inbu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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