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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고 극작가 함세덕(32회) 생가 대포집으로 변해(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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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고 극작가 함세덕 생가 대포집으로 변해
국밥에 세월 말아먹는 비애
/김학균 시인
한 시대의 시대상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시를 찾아 읽어 봄은 또 다른 의미에서 역사를 접하는 희열이 있다. 소외의 무거움도 가볍게 하고, 상처의 잔혹함은 경쾌하게 치유될 수 있는 살가운 시(詩)맛이 있기 때문이다.
눈만 뜨면 보이는 것. 삶은 그렇게 눈을 뜨는 여정 속에서 무아(無我)를 얻고 진여(眞如)를 알아 각(覺)이 생긴다고 늘 말하는 <청관(淸館)>의 작가 창전(蒼田)의 도(道) 타령, 싫으면서 싫지않은 풍부한 현실적 알레고리가 엮어 있는 말 들으며 걷는 길도 여정이구나.
그 여정길에서 '먹는 것도 수행'이라는 인생 삼락(三樂)을 즐길 줄 아는 촌로들이여 오늘은 무엇을 즐기시렵니까?
에도시대의 소꿉장난같은 패스트푸드가 아닌 진국에 우리적인 것 말입니다. 시장통의 '선지국밥' 뚝배기 언저리가 금간 채로 국물이 질질 흐르는 좌판의 풍광이 삶이라고 한사코 찾은 화평동 455번지 뜬금스런 골목의 연속 길, 석가래가 머리춤에 달까말까 지붕 얕은 옛 기와집 동네, 그리 맛깔스런 선지국도 아니것만…….
깊은 뜻은 딴 주머니속에 감추고 고전을 쉽고 흥미롭게 다가가게 하는 접근 촉진회로를 펴는 능청스런 은유인가. 자못 화려함이 감춰진 채 이 땅의 문학전통은 분단과 함께 단절되고만 만시지탄은 있지만 해금된 지금 유치진 이후 한국 최대의 극작가였던 함세덕(1915-1950)의 생가가 바로 이 국밥집(대포집 겸업) 이라니 참 허무한 씨그널이었던 그 때 그 초로들의 역사(?)의 가르침 잊을 수가 없다.
귀 막고 길을 건너던 화평 철로문을 돌아 만석부두와 화수포구로 가는 길 화도고개 초입의 그 집, 조부 함선지 부친 함근욱 2대가 누린 68평의 한옥 기와집 어떻게 누한 국밥집으로 변했단 말인가.
흐른세월이 일백년, 강산이 변해도 열 손가락 만큼 변했다만 왠지 가슴에 먹울음 울고 싶은 심정 참으로 답답했다.
4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해연> 그리고 <동승> 등등의 수많은 작품을 남겼고 가장 인천적 희곡을 남긴 시적(詩的) 리얼리즘의 표본으로 제시될 만큼 희곡사의 큰 인물이었다.
아! 그러나 월북 그리고 해금(88년)의 작가로 우리에게 와 있는 작가, 그의 생가에서 국밥을 먹고 있다니, 비극적인 정열의 작가혼을 반쪽하늘 그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문학에 입문하던 때 시로 시작, 35년 동아일보에 발표된 3편의 시(내 고향 황혼, 저 남국의 이야기, 저녁)에 숨겨진 시 한편이 더 있으니 바로 <고개>다.
성장기 19세까지 인천에 머물렀던 때에 쓰여진 <고개>는 꼭 '화도고개'를 두고 이루어진 작품이 아닐까 유추함은 여정의 객들 희망사항일까.
홍예문을 넘어 온 동터는 옛 골목들과 수문통에서 묻어나온 바다 특유의 내음이 폐부를 흔든다.
화평동 철교 위를 지나는 전철은 왈강달강하는 소리 발걸음 재개 배다리로 향하라고 합니다. 그 소리는 귀를 찢는 아픔이 아니라 해질 무렵 둥지로 돌아온 외로운 새처럼 도리어 푸근해졌던 소리였습니다.
배다리! 가장 인천다운 인천의 배다리, 그곳은 아직도 알전구(백열등)가 바람에 흔들리며 헌책방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우각리 길, 길은 저마다 운명이 있고 스스로 그 안에 채워둔 역사와 얼굴이 있었습니다. 그 밤에 찾아와도 우각리는 싫증없이 촌로들을 반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지요 교육 100년의 터라고 해도 넘침이 없나 봅니다. 서울로 가는 유일한 길, 아니, 서울서 내려와도 하나뿐이었던 길, 우각리는 영원한가 봅니다.
1900년대초 문을 열고 이 땅의 교육 100년을 자랑하는 두 개의 주어 '영화' 그리고 '창영' 아직도 마르지 않고 흐르는 두 줄기 강입니다. 숱한 인재를 길러 세상에 주신 어머니 같은 학교중 창영에는 58년 2월경부터 문예강좌가 있었습니다.
문단사에 빼놓을 수 없는 거목 박목월 선생과 강소천 선생이 한동안 머물며 강의했던 흔적이 있었습니다.
아! 역시 우리를 감동케 하는 옛날.
예언가와 다름없는 문인(文人)들은 몇 날 몇 년의 세월을 바라보는 위력이 있다. 박인환의 시(詩) <인천항>을 음미 해보면 그 정답을 쉽게 찾을 수가 있는 것이다.
조선의 해항 인천의 부두가/ 중일전쟁 때 일본이 지배했던/ 상해의 밤을 소리없이 닮아간다.고 했던 것은 분단체제의 슬픈 불행을 예견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시로 쓴 인천 시속에 인천을 묘사한 그런 작품들 수 없이 많다.
종이신문 : 20080811일자 1판 6면 게재
인터넷출고 : 2008-08-10 오후 8:5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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