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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규(65회) 문화칼럼/성덕당과 문화재 지정(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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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당과 문화재 지정
이원규 문화칼럼
이원규 소설가
제물포고 강당 성덕당(成德堂)이 헐릴지 모른다는 소식에 가슴이 쿵 하도록 놀랐다. 그곳이 인천교육사의 현장, 근대사의 귀중한 유산이기 때문이었다. 사정을 알아보니 전문가들이 안전하다고 진단했는데 학교당국자가 헐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인천 토박이들은 사라져 버린 근대건축물들이 생각날 때마다 탄식한다. 그것들이 살아 있다면 인천은 역사와 품격을 갖춘 문화도시로 손색이 없을 것이라는 아쉬움 때문이다.
고풍스런 자태로 서 있던 세창양행 사택, 오례당, 존스턴별장, 중화루, 인천각, 대한천일은행 사옥, 홈링거 상회, 이당기념관 등은 다 어디 갔는가. 영욕에 찬 근대사를 증언하던 그 유서 깊은 건축물들은 다 어찌 되었는가.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무너졌고, 실화로 태워먹었고, 조금만 보수하면 될텐데 부숴버렸다. 남이 알면 반대할까 몰래 부순 것들도 있다. 그렇게 부순 존스턴별장은 지금 수십억원을 들여 복원하려 하고 있다.
학교건물도 유서 깊은 것들 태반이 사라졌다. 송림초등학교의 우아한 건물은 불탔고 인천고등학교의 그 장려했던 율목동 본관 건물은 헐어버렸다.
제물포고는 본관은 헐렸고 성덕당만 남아 있었는데 십여년 전 창영초등학교 본관과 함께 헐릴 뻔하다가 동문들의 노력과 교육감의 결정으로 살아남았다. 그런데 다시 학교당국자가 그걸 부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깝고 걱정스럽다.
제물포고는 교지가 좁다. 학교당국자 입장에서는 성덕당 자리에 5층쯤 새 건물을 지으면 딱 좋을 것이다. 그러나 새 것이나 큰 것보다는 옛것이 주는 전통과 정신이 더 중요하다. 학교는 무엇을 생산하는 공장이 아니라 문화와 인간 정신을 키우는 요람이기 때문이다.
성덕당은 인천중학 시절이던 1933년 세워졌다. 외부는 단조롭지만 르네상스식 구조를 가진 내부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일제시대 학생들은 여기서 군국주의와 식민지 통치를 정당화하는 훈시를 들었다. 그러나 광복후, 학생 대표로서 3·1만세운동에 앞장섰던 길영희 선생이 교장으로 오고 제물포고를 병설한 뒤 경이로운 성과를 거두는 민족교육의 현장으로 바뀌었다. 학생들은 성덕관에서 대나무처럼 꼿꼿한 길교장의 훈시를 들었고, 현상윤·설의식·장이욱·변영태·유진오·백낙준·함석헌 등 당대 석학들의 강연을 들었다. 학교는 최고의 명문이 되었고 거쳐간 인재들은 무수히 많다. 졸업생들은 말한다. 성덕당에서의 교육은 평생 가슴속에 기둥처럼 서 있다고.
가스통 바슐라르가 말했듯이 오래된 기억을 생생하게 하는 것은 공간과 건물이다. 필자는 모교인 인천고등학교의 율목동 교사가 헐린 것이 슬프도록 허전하다. 다른 동창들도 그렇다고 한다. 고향집과 모교 건물은 그리움의 근원이다. 유서 깊은 학교 건물을 부수는 건 졸업생들에게서 그것을 빼앗는 일이며 재학생에게서 전통과 긍지의 구체성을 박탈하는 일이다.
학창시절 제물포고를 부러워했던 필자는 졸업생들에게 어서들 달려가 성덕당을 지키라고 우정에 찬 권유를 하고 싶다. 감독기관인 교육감과 교육위원회에도 말하고 싶다. 안전한데도 그걸 부순다면 인천문화의 기둥 하나를 뽑는 것이라고.
건축문화는 도시 얼굴이다. 유럽을 여행할 때 많은 건물들의 이마에 '1560 1996' 식으로 건축한 해와 최근 보수한 해가 새겨져 있어 몹시 부러웠다. 인천처럼 수도와 가까운 개항장이었던 일본 요코하마의 잘 보존된 아카렌카(붉은 벽돌) 창고를 비롯한 근대 건축물들을 볼 때도 그랬고 중국의 상하이,다롄,창춘 등을 돌아볼 때도 그랬다. 인천에는 아직 근대건축물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함부로 헐지 못하게 어서 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
성덕당을 보수해서 문화재로 지정 받고 박물관이나 연혁관으로 만들면 인중 제고의 역사는 광채를 발하며 우리에게 진정한 교육이 무엇인가 교훈을 줄 것이다. E. H 카의 말처럼 역사는 그렇게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다.
종이신문 : 20080722일자 1판 10면 게재
인터넷출고 : 2008-07-21 오후 8:2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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