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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역사산책/장태한(74회)교수(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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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과 전쟁 영웅 김영옥
장태한(University of California, Riverside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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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과 6·25 전쟁 그리고 인천
최근 6월 13일 인천 월미도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한국이민사박물관이 개관했다. 알려져 있다시피 한국 최초의 정식이민은 1902년 12월 22일 121명이 하와이를 향해 인천 제물포를 출발한 데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 첫 이민선 갤릭(S.S.Gaelic)호에 승선한 이민자 중 절반 가량이 바로 인천내리교회 신도들이었으며, 84%가 제물포, 부평, 강화 등 지금의 인천광역시 출신자들이었다. 이후 1905년 이민이 금지될 때까지 64회에 걸쳐 7천400여 명의 이민이 계속됐다.
여기에 6·25전쟁을 앞두고 인천상륙작전을 모르는 한국인, 아니 인천인은 거의 없을 것 같다. 이렇게 해외 이민과 또 전쟁과 관련되면서 인천과도 깊은 인연을 가진 한 사람, 김영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에서 영웅이라는 칭호를 인정 받을 자격이 있는 한국인 또는 해외동포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미주 한인사회의 경우 대표적인 인물로 안창호, 박용만, 서재필, 그리고 이승만 등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선구자들이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재미 한인사회의 발전과 한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들을 희생한 분들로서 한국을 대표하는 애국자들임에 틀림 없지만 세계는 그분들의 공적을 모르며 관심도 없는 것 같다.
김영옥은 누구인가. 누가 감히 영웅이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는가. 왜 프랑스와 이탈리아 정부는 김영옥에게 최고 무공훈장을 수여했는가. “프랑스는 영원히 김영옥을 잊지 않을 것”이라는 주 로스앤젤레스 프랑스 총영사의 발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한민국 정부도 늦게나마 김영옥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한 이유는 무엇일까. 특히 왜 일본계 미국인들은 그를 영웅으로 떠받들고 있는가. 김영옥에 대해 잘 모르는 한국인들이 묻는 질문들이다.
김영옥은 최근 전쟁영웅으로 한국 언론에 많이 부각됐다. 그러나 전쟁영웅은 너무나 부족한 호칭이다. 그의 위대한 삶을 절반밖에 설명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홍덕률. ‘영웅 김영옥’ 영남일보 칼럼. 2006년 10월 9일). 1972년 미 육군 대령 예편 후 그는 평생을 소수자, 여성, 고아, 장애인, 가정폭력 피해여성 등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에 여생을 바쳤다. 인종과 민족을 초월해 사랑과 봉사 그리고 헌신을 말없이 실천한 인본
▲ 김영옥의 6.25참전지도
주의자이며 휴머니스트였다.
김영옥은 스스로를 “100% 한국인이며 100% 미국인”이라고 강조하면서 모국인 한국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한국계 미국 군인으로서 2차 세계 대전 중 용맹을 세계에 떨친 자랑스러운 재미 한국인이다.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최고 무공훈장을 받은 지구 유일한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영옥은 자신의 나라 미국에서는 최고 무공훈장을 받지 못하고 두 번째로 높은 무공훈장을 받았다. 미국의 최고 무공훈장은 Medal of Honor이며 두 번째로 높은 훈장은 Distinguished Service Cross이다. 분명 김영옥은 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운 전쟁영웅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 김영옥은 우리에게 매우 생소하다.
그에 관한 자서전 『영웅 김영옥』을 읽은 누리꾼들은 “우리에게도 영웅이 있었다”[다음 독자 김영환 소감. (교보) 2006년 1월 31일. book.daum.net/bookdetail/bookreview]. “내가 자랄 때 역사 교과서에서 볼 수 없었던 영웅 김영옥!”[네이버 독자 (Rabbitsun3) 소감]. “우리나라의 영웅이므로 존경스럽고 자랑스럽다”[네이버 독자 (ksg1143612) 소감].
마지막으로 왜 이제야 이 영웅이 우리에게 소개됐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이 글의 주 목적은 김영옥의 일생을 재조명해 세상에 그의 업적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전쟁영웅으로서 뿐만 아니라 묵묵히 사회적 약자를 위해 평생을 바친 그의 업적은 실로 놀라운 것이다. 김영옥에 대해 알게 된 한국인들도 김영옥을 자랑스런 한국인 상으로 삼으면서 스스로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특히 김영옥의 삶은 재미 한인들이 걸어야 할 본보기로서 후세들에게 전해져야 한다. 김영옥의 삶을 한인 2세 및 미국을 포함한 영어권 국가들을 필두로 세계에 널리 알려 자라나는 한인 청소년들에게 뿌리교육과 함께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줄 수 있으며 자신들의 정체성 확립에도 큰 기여를 할 것이다. 또한 미국 주류사회에서 한인사회, 한국인, 그리고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데도 큰 기여를 할 것이다.
# 김영옥의 출생, 가족관계
▲ 6.25참전 당시 31연대 1대대장이었던 김영옥소령
김영옥은 20세기 초반 미국으로 망명한 아버지 김순권과 1916년 미국으로 유학간 어머니 노라 고 사이에서 1919년 미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인천 출신으로 경신학교(경신중고교의 전신)를 졸업한 후 한일합방이 있던 무렵 한국이 일본의 천하로 바뀌자 세 번의 밀항시도 끝에 미국행에 성공했다. 캘리포니아가 목적지였던 일행은 결국 로스앤젤레스까지 가서 안착했다. 어머니는 수원 출신으로 이화여자전문학교(이화여대의 전신)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잠시 강단에 섰다가 공부를 더 하고 조선에서 교수가 되려는 꿈을 지니고 1916년 미국으로 갔다. 시애틀에 도착하자 미국 출입국관리국 공무원은 그녀가 기혼자이므로 남편에게 도착사실을 알려야 한다며 본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김순권에게 전보를 쳤고 남편이 즉시 로스앤젤레스로 오라고 답신을 보내 유학의 꿈을 접게 됐다. 둘은 법적으로 혼인한 상태였다.
▲ 2003년 국민훈장모란장을 받은 김영옥
김순권 부부는 4남2녀를 뒀는데 김영옥은 위로 누나 한 명에 이은 장남으로 1919년 1월 26일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다. 김순권은 첫 아들이 태어나자 아들 이름은 한국식이어야 한다며 김영옥이라 지었다.
아버지와 함께 매주 토요일 밤을 조선에 대한 얘기로 지샜던 수십 명의 한국인들도 모두 동지회원이었다. 동지회란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 1921년 하와이에서 출범시킨 대한인동지회를 말한다.
김영옥은 부모에게서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자랑스럽게 생각하라고 배웠고 이로 인해 한국인이라는 강력한 정체감을 키웠다. 부모에 이어 어린 시절 김영옥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 누나인 윌라였다. 아버지는 첫 딸을 얻자 이름을 윌라라고 지었다. 나성의 달이란 의미인 월나(月羅)의 발음과 가장 가까운 서양식 이름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아주 총명했던 누나는 나중에 세계 최고의 뮤지컬 의상디자이너가 됐고 토니상을 2개나 받았다.
# 연표로 보는 영웅 김영옥의 생애
1910~1916 : 아버지 인천 출신 김순권 미국 망명, 어머니 노라 고 미국 유학
1919 : 김영옥 출생(아버지는 동지회 회원으로 독립운동)
1924~1938 : 교육 (초·중·고등학교, L.A. 시립대 중퇴)
Cal. State Univ., Dominguez Hills 졸업 (사학, 1974)
1941 : 미 육군 사병으로 징집
1942 : 육군 간부후보생으로 선발, 장교가 됨
1943 : 소위 임관
1943.9~45.2 : 2차대전 참전
이탈리아·프랑스 전선에서 전설적 전쟁영웅
1946~1950 : 제대, 자영업(성공적인 비즈니스맨으로 변신)
1950 : 한국전쟁 발발, 자원 재입대
1951.3~52.9 : 한국전쟁 참전
· 유엔군 3차 반격의 견인차(중부전선 60km 북상의 주역)
· 중상
· 대대장(실전에서 대대장을 지낸 미군 최초의 유색인 장교)
· 고아원 경천애인사 지원
1963~1965 : 한국군 군사고문으로 한국 근무
(한국군 전시동원계획 개편, 국군 최초 미사일 부대 창설)
1972 : 대령 예편. 이후 평생을 사회봉사에 바침
1973~1979 : Special Services for Groups 이사(소수계 청소년을 돕는 비영리단체)
1978~1988 : United Way LA지부 이사
(이 자리에서 한인청소년회관(KYCC) 출범을 가능하게 함)
1986~1988 : Family & Friends of the Keiro Homes 창립 이사장
(빈민을 돕는 비영리기관)
1980~90년대 : Center for the Pacific Asian Family 이사장
(가정폭력 피해여성과 그 자녀들을 위한 보호소/
김영옥의 리더십 아래 남가주 최대의 보호소로 발전)
· 일미박물관 창립 부이사장
· 한미연합회(KAC) 창립이사(재미동포사회의 정치적 목소리)
· 한인정신건강정보센터(KHEIR) 창립 공동이사장
(미국 최대의 소수계 비영리 보건기관)
1999~2001 : 미국 국방부 노근리 사건 진상조사 위원
1990~2003 : 한미박물관(KAM) 창립이사, 이사장
1989~2004 : 일본계 미군 장병 2차대전 참전용사회 회장
2005.12.29 : 미국 L.A.에서 별세
<※ 자료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 『영웅 김영옥』(한우성 저, 2005)>
※ 다음 주는 <인천역사산책> 기획시리즈(55) “인천 개항장 풍경(2)”이 게재될 예정입니다.
# 글쓴이 : 장태한(미국 UC Riverside 대학 교수)
학력 : UC Berkeley(학사/박사), UCLA(석사)
수상 : 대한민국 대통령 상(1995), UCLA 교육상(1995),
자랑스런 한국인 상(Michigan State University)
저서 : Ethnic Peace in the American City(1999), 아시안 아메리칸(2004)
2008년 06월 23일 (월) 14:32:42 기호일보 webmaster@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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