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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 79회 졸업생 최계훈입니다.(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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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인천고
드디어 79년. 최계훈이 3학년이 됐다. 재치있는 양후승도 있었고, 듬직한 포수 채태석도 있었다. 그리고 훌륭한 백업 투수인 정은배도 있었다. 인천고는 우승 후보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당시 인천고의 감독은 최계훈을 인천 야구로 끌어온 박정석이었다.
첫번째 대회인 대통령배. 인천의 출발은 좋았다. 특히 최계훈은 동대문상고와의 2회전에서 퍼펙트 게임을 할 뻔 했다. 9회 1사인가, 2사인가까지 완벽하게 타선을 틀어막다가 연속 안타를 허용했지만, 초고교급 투수다웠다. 그러나 첫 대회에서는 4강에 만족해야 했다. 4강전에서 윤학길의 부산상고에게 4대1로 패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첫 대회 4강. 그리 나쁜 출발은 아니었다. 최계훈은 이 대회에서 타격과 타점 순위 2위에 오르기도 했다.
청룡기
김진원의 배재를 잡고, 인천고는 무난히 8강 진출. 상대는 경남. 인천고의 무난한 승리가 예상됐지만, 최계훈의 초반 난조, 2회까지 5실점을 하고만다. 이후 페이스를 찾았지만, 타선이 침묵한다. 2대5의 패배. 22년만의 정상 도전은 다시 좌절된다.
대붕기
아무래도 지방대회는 중앙대회 보다 비중이 떨어진다. 약간 양념 정도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나 할까 ? 아무튼 대구에서 열린 대붕기. 인천고는 결승에 진출했다. 상대는 청룡기에서 4대1로 가볍게 눌렀던 배재고. 그렇지만 인천고는 3대2로 패한다. 이때부터 인천고의 지긋지긋한 결승전 징크스가 시작된다.
봉황기
이제 중앙대회는 2개 밖에 남지 않았다. 인천고 마음 먹고 달려든다. 최계훈의 구위도 좋았다. 승승 장구. 4강전의 상대는 대구고. 이때 나는 야구장에 있었다. 대구고는 이 대회 16강전에서 서울고와 기록에 남을 만한 명승부를 펼치고 올라온 팀이다. 장훈, 김영균 듀오가 팀을 이끌고 있던 서울고에 9회초까지 8대13으로 리드당하고 있던 대구고. 9회말 공격에서 대거 6득점하며 14대13으로 역전승한다. 최계훈의 인천과 불꽃 타선 대구고. 그렇지만 승부는 싱겁게 갈린다. 최계훈은 대구고의 강타선을 셧아웃 시켜 버린다. 10대0 쯤 되는 스코어로 인천고의 압승.
이제 한번만 남았다. 상대는 광주상고였다. 2년 전 루키시절, 황금사자기 결승에서 패배를 안겨줬던 광주상고와의 일전. 그렇지만 완패였다. 이군노, 노영석, 최영조, 이순철 등이 포진하고 있던 광주상고의 타선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지금 광주상고의 후신인 모교 동성고 감독으로 있는 언더스로우 윤여국도 공략하기 까다로운 투수였다. 인천고의 완패였다. 0대6. 두 대회 연속 준우승에 그쳤다.
황금사자기
마지막 중앙 대회였다. 인천고는 4강전에서 또다시 대구고와 맞붙는다. 이번에도 최계훈이 나섰고, 군말 없는 7대0의 완봉승. 세번째 결승 진출. 맞수는 경북고. 경북고는 79년에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한 팀이었다. 전체적으로 인천고의 우세 쪽으로 기우는 분위기였다. 최계훈은 잘 던졌다. 9회까지 완투하며 1실점. 충분히 제 몫을 해냈다. 아.. 그런데 인고 타선은 또다시 사이드스로우 투수를 공략하지 못한다. 경북고의 에이스인 진동한에게 말려 들어가며, 한 점도 뽑아내지 못했다. 0대1의 아쉬운 분패. 인천야구의 22년 숙원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인천고 3개 대회 연속 준우승.
전국체전
사실 전국제천은 그리 중요한 대회는 아니다. 시도간의 경쟁으로 대충할 수는 없지만, 구기 종목의 경우 마이너 중의 마이너 대회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인천고는 경기 대표로 79년 전국체전에 참가한다. 또 결승에 올랐다. 상대는 전주고. 전주고는 그해 봉황대기에서 거함 선린상고를 2대1로 격침시킨 강상진이라는 좋은 투수가 있었지만, 인천고의 전력이 확실히 나았다. 그러나 결과는 2대2 무승부.
공동우승이었을까 ? 그럴리가 있는가 ? 요즘도 전국 체전은 무승부일 경우 연장전을 치르지 않고 추첨으로 승부를 가린다.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인천고의 추첨패. 4개 대회 연속 준우승. 인천고의 79년은 이렇게 끝나 버린다.
그 이후의 최계훈..
대학 갈 때도 최계훈은 홍역을 치뤘다. 먼저 기선을 제압한 것은 중앙대였다. 당시 중앙대 감독은 인천 야구의 전설, 김진영이었다. 삼미슈퍼스타즈에서 최계훈과 재회하게 되는 바로 그 김진영이었다. 최계훈은 중앙대 진학을 위한 가등록까지 마친 상황이었지만, 막판에 뒤집어져 버렸다. 인하대가 최계훈의 동기 6명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최계훈을 진학시킨 것이다. 거의 납치에 가깝게 최계훈을 승용차에 태우고, 안전가옥으로 모셔갔다던가. 인천의 지역 사회가 매달렸던 것 같다. 인하대의 재단이었던 대한항공에서 최계훈이 졸업할 때 실업야구단을 창단할 것이라는 풍문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의 최계훈에 대해서는 이상하게도 별 기억이 없다. 선명한 것은 85년 4월말 삼미의 18연패를 끊었던 역투 밖에는... 인천야구 비운의 황태자에 걸맞는 기억이 아닌가 ? 이후 인천야구가 힘을 냈던 태평양 돌핀스 돌풍 시절에는 최계훈의 자리가 없었다. 박정현, 최창호, 정명원 3인방이 있었던가. 이후 현대의 전성기는 다들 아실테고.. 최계훈은 프로야구 심판이 됐던 것 같은데.. 지금도 심판을 하고 있나 ?
최계훈은 내가 야구를 좋아했던 초창기의 슈퍼스타였다. 참으로 운이 없었던 선수였다. 어린 나이에도 인천고를 보며, 최계훈을 보면서 안타까웠던 기억이 난다. 참으로 아련한 기억이다.
그나저나
동대문 야구장 없어져 버리면, 인고의 응원가 다시 들을 수 있을까 ?
‘1번 타자 안타치고, 2번은 번트대고, 3번 타자 홈런치고~
고교야구 얘기하면 인천고등학교, 사위감을 찾는데도 인천고등학교’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이런 가사가 아니었나 싶다. 야구장에서 자주 듣다보니 남의 학교 응원가를 흥얼거릴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또다른 버전의 응원가.
‘인고인의 정력, 신기하고 놀라워~, 인고인의 정력 신기하고 놀라워~’ 라고 하는 ‘게브랄티’ 버전의 응원가도 있었구나.
소주에 얼굴이 달궈져 응원가를 불렀던 그 사람들은 지금 뭐하고 있을까 ?
동대문이 아닌 다른 공간에서 이런 응원가를 들으면 예전의 기분이 날까 ?
소주 한잔 권하던 B 탑 밑의 야구 폐인 아저씨들은 어디로 가실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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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수님의 댓글
정흥수 후배님은 한국 야구사에 길이 남을
최계훈에 대하여 너무나도 잘 알고 있네요..
이상호님의 댓글
한에 서린 글 같습니다.^^
정흥수님의 댓글
溫故知新 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