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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야구 현대사 산증인 이기상(55회)(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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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야구인 이기상 인천항발전협의회 공동대표·영진공사 회장
50년대 인천고 선발투수 활약 전국 잇단 제패
SK와이번스 우승 감격 球都 인천부활 신호탄
"운동이 사회의 역동성 … 시민도 적극 후원해야"
지난달 29일 밤 인천 SK와이번스가 2007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순간 가슴이 떨려 왔어. '야! 이제야말로 구도(球都) 인천의 부흥이 시작되는구나'라는 벅찬 감격과 환희가 내 가슴에 밀려든 거지…."
70대를 훌쩍 넘긴 백발의 노신사. 현대 인천항만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거두. ㈔인천항발전협의회 공동대표란 직함이 더 익숙한 인천의 큰 어른, 이기상(71) ㈜영진공사 회장.
그가 창영초-동산중-인천고 야구부를 거치며 1950년대 전국을 평정한 야구투수 출신이란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지금도 인천시체육회 부회장으로 활약하며 인천체육 발전에 헌신하고 있는 이 회장을 '제2회 인천항만가족 한마음 체육대회'가 열린 지난 3일 인천해사고 운동장에서 만났다. 구도 인천의 야구현대사와 미래 비전을 듣기 위해서였다. "우리 인천 연고 프로야구 SK와이번스가 창단 8년 만에 처음으로, 현대의 1998년 우승 이후 9년 만에 한국시리즈 패권을 거머 쥐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인천야구인의 한 사람으로서 벅찬 감동을 받았습니다. 구도 인천이 오랜 침체를 벗고 비상을 시작했다고 볼 수 있지요."
인천야구인 이기상
이 회장이 인천고 야구부 투수로 뛰며 한창 기량을 발휘하던 1950년대 인천의 고교야구는 6·25전쟁의 상흔과 가난, 그리고 굶주림에 지쳐있던 인천시민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줬다.
인천고는 1952~1955년 전국대회를 잇따라 제패하며 고교야구 최강자로 우뚝 섰다. 1953년 제33회 전국체전을 제패하며 한껏 기세를 올렸다. 그 누구도 당해낼 자가 없는 강력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 해 인천고에 입학한 그는 좌완투수로서 고교 선수 중 최고의 구속을 자랑하며 다양한 볼 콘트롤로 명성을 떨쳤다. 1955년 3학년 땐 부산 화랑대기에 에이스로 선발 출장해 대회 우승과 함께 최우수선수(MVP)상까지 타는 맹활약상을 선보였다.
전국대회를 제패하고 돌아오면 인천은 축제분위기로 들썩였다. 당시 인천고가 있던 동구 배다리를 출발해 싸리재-애관극장-답동사거리-신포동로터리-인천우체국(현 중·동우체국)-시청(현 중구청) 구간에서 대대적인 환영 카퍼레이드가 펼쳐졌고 시민들과 기쁨을 나눴다.
하지만 겨우 끼니를 때우는 시기여서 선수들은 제대로 먹지 못하고 운동해야 했다.
"당시 인천고 영어교사 김두한 선생님이 있었는데 선수들 영양 보충을 위해 채미정골에서 손수 토마토를 한 광주리씩 사 와 먹이곤 했지요."(이 회장은 당시 스승의 깊은 제자사랑이 뇌리에 선연히 떠오르는 듯 한참동안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인 뒤 말을 이었다.)
"왜 그리도 토마토가 맛있었는지, 우리 선수들은 용기백배해 연습에 몰두했고 연습이 끝나면 교내 우물가에서 등목으로 샤워를 대신한 뒤 귀가했어요. 목욕비가 없었기 때문이죠."
연세대 진학 후에도 군 입대를 위해 야구를 그만 둔 2학년 때까지 '에이스 이기상'의 명성은 전국에 널리 퍼졌다.
인천 고교야구가 강했던 까닭
1950년대 인천시내 공공시설과 학교엔 미군이 주둔해 있었다. 자연스럽게 미군이 여가로 즐기는 야구경기를 보고 또 함께 시합을 많이 했다고 한다. 덕분에 인천고 야구부는 의정부, 동두천 등 미군 주둔지역에서 자주 야구시합을 가졌다.
일부러 경기를 져 주는 일도 다반사였다. 인천고가 시합에서 져 주면 선수들은 장교식당에서 맛난 식사 대접을 받을 수 있었지만, 미군을 꺾는 날이면 사관생도식당에서 초라한 식사를 한 뒤 돌아와야 했기 때문이다.
100㎏의 거구인 미군들이 사용하는 야구방망이와 글러브가 60㎏ 체구인 당시 고교선수들에게 맞을리 없었지만 그것도 감지덕지였다. 물려받은 야구기구로 열심히 연습에 몰입했다. 결국 미군과의 잦은 순회경기가 인천 고교야구의 실력을 높여 준 원동력이 됐다.
또 한가지. 이른바 '찐뽀'라고 불리던 놀이의 덕도 컸다고 한다.
1950~1970년대 인천지역 학생들 사이에서 성행했던 이 경기는 정구공을 접시비행기처럼 공중에 뜨게 하는 타격기술을 겨루는 경기였는데 이 놀이를 즐기면서 자연스럽게 타격감을 터득하게 된 것이 인천의 야구실력을 강하게 만든 밑거름이 된 것이다.
여기에 초등생 시절부터 함께 호흡을 맞추며 운동해 온 선수들로 팀이 구성된 것도 주효했다고 한다. "저 역시 창영초 5학년 때부터 야구선수 활동을 했는데 이 동료들이 고교야구까지 함께 하다 보니 서로 눈빛만 봐도 금새 마음을 읽을 만큼 호흡이 척척 맞았어요."
사업가로서의 길
이 회장은 동산중 1학년 때 6·25 전쟁이 발발해 부득이 부모님 고향인 충남 당진으로 피난 가 외삼촌 집에서 1년반동안 얹혀 살게 됐다. 1952년 인천으로 돌아 올 때까지 당진중에 청강생 자격으로 다니기도 했다.
외삼촌과 조카딸이 닭을 사육해 생산한 달걀을 5일장에 내다 파는 것을 눈여겨 본 이 회장은 닭 사육을 시작했다. 달걀보단 닭을 길러 파는 게 훨씬 낫겠다고 계산하고 수개월동안 닭 사육을 하는 고생을 했지만 본전을 건지는데 만족해야 했다. 예상치 못한 여러가지 리스크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사업을 해 보니 그 때의 장사경험이 제겐 소중한 밑천이 된 것 같더군요. 이 때 사업의 기본기를 터득했다고 봐야지요. 장사는 1+1=2가 안될 수도 있다. 3도 되고 0도 될 수 있음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그는 대학 졸업 뒤 1961년 곧바로 사업에 뛰어들어 11살 터울 친형 이기성(작고)과 함께 영진공사를 창업했고 여러 계열사를 거느린 지금의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구도 인천 부활 어떻게?
1982년 국내 프로야구 출범 이래 인천 연고팀은 삼미-청보-태평양-현대-SK로 이어져 왔으나 잦은 연고 이적과 팀 해체 등의 수난을 겪어 왔다. 이에 대한 이 회장의 안타까움은 누구보다도 컸다.
스포츠는 누구나 99점을 받을 수 있도록 활짝 열려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하지만 100점을 받는 이는 100명 중 1~2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깊이 직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천시민프로축구단 인천 UTD가 장외룡 감독을 영국으로 장기유학 보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참 훌륭한 결단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인천 야구 역시 장기적 안목을 갖고 미래의 선수와 지도자를 길러내는 큰 틀의 전략이 필요합니다. 국제구제금융(IMF) 사태로 온 국민이 힘들어 할 때 세계무대를 평정하며 한국의 명예를 드높인 박찬호와 박세리의 활약상에 우리는 얼마나 큰 힘과 용기를 얻었습니까? 스포츠는 이 처럼 우리 사회의 역동성을 길러주는 중요한 매개이기에 육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2007년은 인천체육의 부흥을 상징하는 해다. 인천고가 최초로 안마당에서 열린 미추홀기대회 우승을 차지했고 인천 SK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전국체전에서도 인천은 종합 8위로 중위권에 재도약했다.
이 회장은 "인천체육은 지금 절호의 기회를 맞았습니다. 2014 아시안게임에 대비해 인천체육 역량을 획기적으로 끌어 올릴 수 있도록 우수선수와 우수지도자 양성에 소매를 걷어붙여야 합니다. 무엇보다 시민 스스로가 인천체육을 아끼고 후원해야 합니다."
올부터 2010년까지 4년동안 모두 100억원의 인천체육발전기금 조성에 앞장 서고 있는 이 회장이 환하게 웃으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글=윤관옥기자 blog.itimes.co.kr/okyun
사진=박영권기자 (블로그)pyk
종이신문정보 : 20071107일자 1판 14면 게재
인터넷출고시간 : 2007-11-06 오후 10: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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