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147호 천전리(川前里) 서석암각화(書石岩刻畵) 는 화랑세기와 함께 한번 소개
하였지만 ,그때는 사진이 흐릿하여 판독이 애매 하여, 선명한 사진으로 다시 소개 한다 .
흔히들 암각화는 彩色이 없고,
線, 면 새김 등의 방법으로 바위에 직접 양각 또는 음각한 점 등이 동굴이나 고분 벽화와 차이가 있다. 대부분 屋外에 오랜 세월동안 노출이 되어 있어서 풍화가 심하고 향후 보존에 어려움이 많다.
제작 시기는 靑銅器 이후로 추정되며 (왜냐면 바위에 선으로 조각 할 수 할 수 있는 것은 청동이나 쇠가 아니면 불가하기 때문이다)
글자가 아닌 추상적 기호와 그림으로 되어 있어 완벽한 해석은 못하지만 그러나 고대인들의 생각을 가감 없이 오늘에 전해 준다는 의미에서 考古 歷史學 뿐만 아니라 사회 과학 측면에서도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암각화의 一種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지만 ,바위에 계란 반개 정도의 구멍을 뚫은 성혈(性穴)또는 알 바위라 부르는 것도 많이 있다.
이것들은 古代 人들의 생존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동물의 형상이거나 多産을 의미하며 여성의 性器를 나타낸다 한다.
이 암각화는 다양한 동물과 기호 그리고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여러 세대에 걸쳐
제작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명문 :신라 시대에 2번에 걸쳐 좌우로 나뉘어 조각 되었다>
사실 이곳의 최초의 발견자는 1970년 문명대교수가 아닌, 법흥왕의 친동생이자 진흥왕의 아버지 사부지갈문왕(徙夫知葛文王)이었다.(그는 형 법흥왕의 딸이자 자신의 조카 어사추녀랑과 결혼하여 진흥왕을 낳았다)
때는 525년,
그는 사랑하는 애인 어사추녀랑(於史鄒女郞)과 함께 이곳으로 놀러왔다가 서석곡(書石谷)이라 이름 지었다는 내용도 나온다.
<무엇으로 느껴지는지...>
계곡으로부터 2㎞ 정도의 하류지점에 유명한 반구대(盤龜臺) 암각화가 있고, 이 지역은 진입로 및 부대시설의 확장이냐 보존이냐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雨期時 저수지 물에 잠기는 문제와 그에 따른 부식 방지 대책에 대해서 아직은 뚜렷한 방안이 없는 실정이다.(2009.10.16)
<다산을 의미하는 여성의 성기?>
(경주 석장동 암각화 탁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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