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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과 심선택 소위
작성자 : 장재학
작성일 : 2007.09.13 08:01
조회수 : 865
본문
9·15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해 서울을 수복한 후 함경북도까지 북진했다가 후퇴하는 도중 인천에서
입대한 제자를 구하려다 함경남도 마한령에서 전사한 심선택 소위는 고향이 인천이며
해병 장교가 되기 전에는 공립 인천상업중학교(현 인천고등학교 전신)에서 영어교사와
야구지도를 담당했던 선생님이었다.
조실부모한 심 선생님은 화수동에서 태어났으며 큰 누님의 보호아래 학교를 다녔다.
이후 인천상업중학교를 졸업한 심 선생은 서울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던 중 해방의 기쁨도 뒤로한 채 38선상에서는 남북이 국지전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심 선생은 뜻이 있어 교직을 그만두고 국군 장교가 되기 위해 육군보병학교에 입교했다.
그러나 6·25 전쟁이 일어난 지 한달 만인 7월25일 조기 임관하게 됐다.
이후 심 소위는 인천상륙부대인 해병대 제3대대에 배치돼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다.
한국군 해병대는 선봉 공격부대로 정해진 제1대대와 제3대대가 상륙에 성공했고,
미처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 패잔병을 수색하면서, 한편에서는 적화(赤化)된 주민
밀집지역인 화평동·화수동·만석동 등에 살고있는 주민들을 송현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이게 해 민심을 수습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때 그 자리에 있었던 인천지역 중학교 상급생 30여명을 따로 집합시켜 놓고
전시에 학생들이 해야 할 다음 4개항을 알려주었다.
첫째, 학생들은 앞으로 통일조국의 장래를 책임져야 할 역군으로 성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절대로 보호돼야 한다. 둘째, 지금 전쟁은 우리 기성세대에 맡기고 학생들은
전후에 학교로 돌아가 공부할 준비를 해야 한다. 셋째, 정부가 수복되고 학교가 정상화될
때까지 학생들 스스로 자치단체를 구성해 스스로 보호하는 구심체가 되어야 한다.
넷째, 학생자치단체의 구성원들은 경찰이 복귀해 치안이 안정될 때까지 군의 지시를
받아 치안 질서 유지에 협조하여야 한다.
이러한 심 소위의 지침을 경청한 학생들은 그 즉시 중학교 5학년생 유문길을 중심으로
학도치안대를 조직하고 인천상업중학교에 주둔중인 해병대 사령부에 명단을 제출하고
야간통행 금지 때 사용하는 암호를 매일 수령하면서 치안공백 상태인
인천 북부 지역(경인선 철로를 경계로 동구 지역)의 치안질서유지에 밤낮없이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심 선택 소위가 소속된 해병대 제3대대 본부가 지금의 도원동 공설운동장에
주둔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인천상업중학교 제자들이 찾아갔다.
이때 심 소위는 군에 입대하게 된 동기를 설명하고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에 처해 있을 때
조국을 지키는데는 상하가 따로 없다"라는 말 한마디를 남겨 놓고 떠나려는 순간,
몇몇 제자들이 "선생님 저희들도 따라가겠습니다"라고 청해 이때 제자들 몇명을 입대시키게 됐다.
이후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하면서 승승장구하던 해병부대는 함경북도까지 올라갔을 때
겨울이 닥치면서, 중공군이 참전하게돼 부대가 후퇴했다. 심 소위는 그때 인천에서
데리고 온 제자 한 명이 미처 빠져 나오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제자를 구하려고
전선으로 급히 되돌아갔다가 계곡에 매복해 있던 적의 총탄을 맞고 함경남도 마한령에서
24세 나이로 그만 전사하였다.
인천시 중구 신포동 소재 '인천학생 6.25 참전관' 기억의 벽에는 심선택 소위에
대한 자세한 기록과 묘비 사진 등 다음과 같은 자료가 있다.
- 심선택 소위 -
출생지 인천 화수동 219번지
학력 1944년 12월 23일 인천상업중학교 졸업.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전신)졸업, 1948년 2월 19일 인천상업중학교 교사 취임, 1950년 4월 28일 인천상업중학교 교사 의원면직, 1950년 7월 25일 해병소위로 임관
소속 해병대 제3대대로 9.15 인천상륙작전에 참전,
전사일자 1950년 11월 12일,
묘지위치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장교묘역.
출처:인천일보
※인천고등학교 선배님 맞으시죠
입대한 제자를 구하려다 함경남도 마한령에서 전사한 심선택 소위는 고향이 인천이며
해병 장교가 되기 전에는 공립 인천상업중학교(현 인천고등학교 전신)에서 영어교사와
야구지도를 담당했던 선생님이었다.
조실부모한 심 선생님은 화수동에서 태어났으며 큰 누님의 보호아래 학교를 다녔다.
이후 인천상업중학교를 졸업한 심 선생은 서울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던 중 해방의 기쁨도 뒤로한 채 38선상에서는 남북이 국지전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심 선생은 뜻이 있어 교직을 그만두고 국군 장교가 되기 위해 육군보병학교에 입교했다.
그러나 6·25 전쟁이 일어난 지 한달 만인 7월25일 조기 임관하게 됐다.
이후 심 소위는 인천상륙부대인 해병대 제3대대에 배치돼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다.
한국군 해병대는 선봉 공격부대로 정해진 제1대대와 제3대대가 상륙에 성공했고,
미처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 패잔병을 수색하면서, 한편에서는 적화(赤化)된 주민
밀집지역인 화평동·화수동·만석동 등에 살고있는 주민들을 송현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이게 해 민심을 수습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때 그 자리에 있었던 인천지역 중학교 상급생 30여명을 따로 집합시켜 놓고
전시에 학생들이 해야 할 다음 4개항을 알려주었다.
첫째, 학생들은 앞으로 통일조국의 장래를 책임져야 할 역군으로 성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절대로 보호돼야 한다. 둘째, 지금 전쟁은 우리 기성세대에 맡기고 학생들은
전후에 학교로 돌아가 공부할 준비를 해야 한다. 셋째, 정부가 수복되고 학교가 정상화될
때까지 학생들 스스로 자치단체를 구성해 스스로 보호하는 구심체가 되어야 한다.
넷째, 학생자치단체의 구성원들은 경찰이 복귀해 치안이 안정될 때까지 군의 지시를
받아 치안 질서 유지에 협조하여야 한다.
이러한 심 소위의 지침을 경청한 학생들은 그 즉시 중학교 5학년생 유문길을 중심으로
학도치안대를 조직하고 인천상업중학교에 주둔중인 해병대 사령부에 명단을 제출하고
야간통행 금지 때 사용하는 암호를 매일 수령하면서 치안공백 상태인
인천 북부 지역(경인선 철로를 경계로 동구 지역)의 치안질서유지에 밤낮없이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심 선택 소위가 소속된 해병대 제3대대 본부가 지금의 도원동 공설운동장에
주둔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인천상업중학교 제자들이 찾아갔다.
이때 심 소위는 군에 입대하게 된 동기를 설명하고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에 처해 있을 때
조국을 지키는데는 상하가 따로 없다"라는 말 한마디를 남겨 놓고 떠나려는 순간,
몇몇 제자들이 "선생님 저희들도 따라가겠습니다"라고 청해 이때 제자들 몇명을 입대시키게 됐다.
이후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하면서 승승장구하던 해병부대는 함경북도까지 올라갔을 때
겨울이 닥치면서, 중공군이 참전하게돼 부대가 후퇴했다. 심 소위는 그때 인천에서
데리고 온 제자 한 명이 미처 빠져 나오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제자를 구하려고
전선으로 급히 되돌아갔다가 계곡에 매복해 있던 적의 총탄을 맞고 함경남도 마한령에서
24세 나이로 그만 전사하였다.
인천시 중구 신포동 소재 '인천학생 6.25 참전관' 기억의 벽에는 심선택 소위에
대한 자세한 기록과 묘비 사진 등 다음과 같은 자료가 있다.
- 심선택 소위 -
출생지 인천 화수동 219번지
학력 1944년 12월 23일 인천상업중학교 졸업.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전신)졸업, 1948년 2월 19일 인천상업중학교 교사 취임, 1950년 4월 28일 인천상업중학교 교사 의원면직, 1950년 7월 25일 해병소위로 임관
소속 해병대 제3대대로 9.15 인천상륙작전에 참전,
전사일자 1950년 11월 12일,
묘지위치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장교묘역.
출처:인천일보
※인천고등학교 선배님 맞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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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님의 댓글
43회 선배님 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