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기생충과 질병의 왕국
1950년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은 온통 병 투성이었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듯싶다. 특히 봄이면 눈에 제일 많이 띄는 게 피부병이었다. 둥글게 뺨에 나는 도장부스럼, 머릿속에 부스럼 딱지가 생기고 진물이 흘러 몹시 괴로운, 이른바 ‘땜통’이라고 부르던 기계총(두부백선), 그리고 허연 버짐 따위를 얼굴에 가진 아이들만 해도 보통 한 반에 스물은 되는 것 같았다. 거기에 횟배를 앓는 아이들도 참 많았다.
도장부스럼에 걸리면 미군 부대에서 구했다는 꼭 잉크 비슷한 푸른 액체를 환부에 발랐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나도 그와 비슷한 것에 걸렸었는데 어머니의 손에 끌려 간 곳이 신포동에 있는 자선소아과였다. 그 시절 인천 시내에 피부과 의원이 없었는지 아니면 어머니께서 그만 모르셨는지…. 아무튼 무슨 흰색 고약을 바르고 ‘까제’를 붙이며 며칠 수선을 떤 적이 있다.
손으로 눌러 짜는 미제 다이아찐 고약이 부스럼 따위에는 최고였다. 구하기 힘들었지만 페니실린이라는 만병통치약도 있었다. 그 주사약병 하나만 구하면 부스럼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새것을 통째로 구할 수는 없고 미군 병원에서 이미 다 쓴 빈 병을 구하는 것이었다. 흰 알루미늄 테두리가 빨간 고무마개를 싸고 있는 이 병 속에, 아직 남아있는 노르스름한 찌꺼기가 바로 신비의 영약이었다. 인천은 미군이 주둔해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구하기가 다른 곳보다는 수월했던 듯싶다.
더운 날 학교 조회 시간이면 으레 한두 명은 졸도를 해서 자빠졌다. 아마 영양이 나빠서였을 것이다. 또 영양이 나쁜 까닭에 볼 수 있었던 풍경으로는 아이들의 콧물을 들 수 있다. 누렁 코를 콧속 가득히 채우고 숨 가빠 하던 아이들도 많았지만 말갛고 긴 콧물을 거짓말 보태 한 자(尺)쯤 밑으로 뽑다가도 한번 훌쩍 들이마시면 감쪽같이 콧속으로 사라지는 진풍경을 연출하는 아이들을 참으로 많이 볼 수 있었다.
이렇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용의검사(容儀檢査)를 자주 했다. 손톱 발톱은 깎았는지, 목에 때는 없는지, 머리는 감았는지, 또 속옷이 깨끗한지…. 반장이나 부반장 정도를 제외하고는 이런 게 온전한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선생님 앞에 불려 나가 30센티짜리 대나무 자로 몇 대씩 손등을 맞고는 아파서 강종강종 뛰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살림이란 것이 목욕을 할 수 있는 시설도 물도 다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 참으로 피할 수 없이 곤혹스러운 것이 또 산토닝 먹는 날이었다. 보통 봄날쯤이었을 것이다. 전날 저녁을 일찍 먹고는 다음날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채 빈 속으로 학교에 가서 선생님이 나눠주는, 꼭 미군들이 휴대하던 클로르칼크(물 소독약) 알 만한 흰 약을 몇 알씩 먹는 것이다.
약을 먹은 다음날 아침에는 변소로 가지 않고 뒤꼍에다 신문지를 펴고 엉거주춤 일을 보아야 했다. 물론 길게 싸리 가지를 꺾어 만든 젓가락도 준비를 해야 한다. 일이 끝나면 징그럽고 구역질나는 결과물을 뒤적거려서 ‘산토닝 효과’를 세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다섯 마리, 열두 마리, 혹은 사십 몇 마리의 놀라운 숫자를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용케 그것이 거짓인줄을 아셨고, 좀 적게 이야기하면 이내 ‘빈속’이 아니었다는 걸 알아 차리셨다. 아이들은 혼이 나고 나서야 이실직고를 했는데, 당시에는 왜 선생님이 그 따위 기생충의 숫자를 그렇게 꼼꼼히 수첩에 적으셨는지 이상할 뿐이었다.
생물이 생존해 가는 조건 가운데 으뜸이 먹이 조건일 터인데 사람 먹을 것도 부족했던 그 시절에 쥐의 숫자가 그토록 많았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우당탕퉁탕, 천장 반자 위이고 수채고 마루 밑이고 어디든 쥐들이 돌아다녔다. 쥐가 옮기는 페스트는 몸이 까맣게 타서 죽는 병으로 한 번 생기면 모든 사람에게 옮겨져서 나라 전체가 몰살한다는 선생님의 무시무시한 포고 때문에 몹시 절망스러운 기분으로 옛 ‘싸리재’학교의 교문을 나선 적이 있다.
그러면서도 선생님의 분부대로 철사로 된 쥐덫을 놓거나 쥐 다니는 길목에 약을 놓아 필사적으로 놈들을 잡았다. 며칠 동안 죽은 쥐의 꼬리를 잘라 모아 신문지에 싸서 학교에 가져다 내는 엽기적인 일이 뒤따르는 것은 물론이었다.
여자아이들의 단발머리에는 서캐도 많았고 밤이면 참으로 온몸을 가렵게 하는 이도 그렇게 많았다. 먹을 것이 변변치 않고 영양도 좋지 않은 우리 몸에 벼룩도 빈대도 어쩌면 그렇게 지독하게 극성을 떨었는지…. 꾀죄죄한 이부자리, 의복, 일 년에 팔 개월 정도는 전혀 목욕을 하지 않는 몸뚱이, 형편이 이랬으니 안 그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에 물리면 발진티푸스에 걸릴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석유로 가려운 몸을 문지르고, 옷 솔기를 뒤집어 잡아내거나 입에 물고 부는 양철 분무기로 약을 쳐보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놈들에게는 미군의 디디티 세례 이상 가는 것이 없었다.
미군들은 얼마 만에 한 번씩 트럭에 컴프레서를 싣고 학교 운동 마당에 도착했다. 컴프레서를 돌려 그 공기 압력으로 쉽게 전교생에게 투약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미군들은 우리들이 학년별로 마당에 늘어서면 컴프레서를 돌리고 원통 끝에 구부러진 파이프가 달려 있는 투약기로 우리들의 등이나 겨드랑이, 사타구니에 차고 보드라운 흰 가루를 넣어주는 것이다.
머리가 좀 휑한 느낌이 있기는 했었어도 이 가루가 며칠 동안은 가려움을 면하게 해 주곤 했다. 아무튼 이날은 온통 흰 가루가 교정의 하늘을 덮고 우리들이 철없이 웃고 떠드는 소리, 컴프레서 돌아가는 소리가 뒤섞여서 마치 무슨 잔칫날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다.
앞서 산토닝 이야기를 했지만 일 년에 한 번 우리들 뱃속에 사는 벌레를 조사하고 그런 약이나마 먹이기 위하여 나라에서 취한 조치가 성냥갑 속에 변을 담게 한 일이었다. 막대기로 적당량을 덜어 빈 성냥갑에 담고 포장을 한 후 이름을 써 붙여 선생님께 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면 촌충이니 편충이니 하는 따위의 우리 뱃속을 제 집으로 삼아 무단히 들어앉아 살고 있는 흉측한 녀석들의 종류와 이름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를 불안 속으로 몰아넣은 것은 비단 그것들뿐만이 아니었다. 여름이면 또 그 모기들이 공포의 대상이었다. 남쪽 어디에 첫 뇌염환자 발생! 이렇게 시작된 뇌염 기사는 조금씩 북상하면서 가을이 깊어질 때까지 매일 몇 명 발생, 몇 명 사망, 하는 속수무책의 통계를 전하는 것이 연례 행사였다. 염병이라고 부르던 장티푸스를 비롯해 무슨 티프스, 무슨 티프스하는 법정 전염병과 툭하면 발병하는 이질, 호열자 같은 병들은 또 어떠했던가. 오오, 징그럽고 무섭던 질병 왕국 시절이여!
세상이 바뀌어 이제는 그런 병, 그런 궁상이 많이 사라졌다. 곱사등이, 혹부리, 마마 같은 것에 걸린 사람들은 오늘날 거의 볼 수가 없다. 모두 건강하고 미끈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 고통과 고생 속에 살아남아 오늘을 이룬 사람들. 이 기성세대들일 터!
(* 이 글은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반까지 반세기 전 인천에 대한 기억을 담은 내용이다. 이는 폐쇄된 특정인의 기억이 아니라 인천인들 모두가 공유해야 할 내용들이다. 따라서 격동기를 몸으로 체험하며 그것을 기억으로 재구성한 인천에 대한 공공의 기억이기도 하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에서 발행한 인천역사문화총서 25호 ‘인천개항장 풍경’ 가운데 인천문인협회 김윤식 회장이 집필한 부분을 양해를 얻어 발췌, 정리해 옮겨 놓았다.)
/ 편집팀(enews@incheon.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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