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민경호 선배님 기사입니다
본문
민경호는 유도와 태권도 그리고 대학 스포츠를 대표하여 미국 올림픽 위원회의 교육과 선수 강화 분과 위원회 그리고 세계 태권도 연맹 대학분과 위원장, 세계 대학 스포츠 연맹에 테크니컬 커미셔너로 국제대학 스포츠 특히 태권도 발전을 위해 노력한 사람이다. 전미 올림픽 위원회 공인 태권도 협회 초대 회장을 지냈고 미국 아마추어 체육인 협회(AAU : Amateur Athletic Union) 태권도 분과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현재 세계 연맹 대학 분과 위원장을 맡고 있고 무도에 관련된 많은 논문을 발표하는 한편, 태권도를 통해 국제 친선을 도모한 공적을 인정 받아 충남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다.
민경호가 근무하고 있는 Univ. of CA, Berkeley는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대학으로 알려져 있다. 캘리포니아 대학 9개의 캠퍼스 중에서 본교이며 1868년에 개교하였으며, 현재 약 3만 명 이상의 학생과 1,500여 명의 교수와 78개국에서 온 2,500여 명의 방문 교수와 400여 분야의 학위 과정과 7,000개 이상의 코스를 가르치는 대학이다. 이 대학은 미국에서 제일 가는 연구 대학, 그리고 세계에서 제일 많은 연구 논문을 내는 대학으로 미국 대학 평가회와 미국 연구 평가회에서 인정받고 있으며 지금까지 16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대학이다. 그리고 스포츠 체육 활동에서도 명성을 떨치고 있는데 체조, 수영, 농구, 태권도 등에서 많은 훌륭한 선수들을 배출하고 있다. 특히 태권도 팀은 전 미국 태권도 선수권 대회에서 8년 동안 계속 단체 우승을 할 정도로 전 미국을 석권하고 있다.
버클리 대학 무도 프로그램은 69년도에 시작하여 현재는 1,200여 학생 및 교수, 교직원이 일과 후에 참가하는 미국 대학에서 개설된 가장 성공적인 프로그램으로 현재 태권도, 유도, 합기도, 가라데, 우슈, 태극권, 도수 방어 등을 교육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UC 버클리 대학에서는 태권도 클래스만 9개이고 태권도 클럽에 가입한 학생수까지 합하면 4백 명이 넘는다. 학기 초에는 태권도 클래스에 들어가기 위해 학생들이 장사진을 칠 정도이다. 태권도는 아시아 지역에 45개국, 중동 지역에 10여 개국, 아프리카 지역에 23개국, 유럽 지역에 45개국, 미주 지역에 34개국 등 총 147국의 회원국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서울과 바로셀로나 올림픽에 시범 경기 종목을 거쳐 올해 열리는 시드니 올림픽에 정식 종목으로 편입되었다. 그 결과 한국어는 불어, 영어, 일본어에 이어 4번째로 올림픽 공식 언어로 인정받게 되었다. 세계 각국에서 정확한 수련자 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해마다 늘어가고 있는 추세로, 세계 태권도의 본산인 국기원의 집계에 따르면 대략 4천만 이상의 알려진 수련생이 있고, 유단자 수는 400만으로 약 80%가 한국인이다.
민경호는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1.4후퇴 때 배편으로 월남하여 인천 고등학교에 들어가 고등학교 유도 선수로 각종 대회에 자주 출전했다. 태권도와의 인연도 이때 맺게 되었다.. 유도대학(현 용인 대학 전신)을 졸업한 뒤, 오클라호마 대학에 유학을 하고 그 후 조지아 대학에서 체육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조지아 대학에 처음 입학할 당시에 유도4단과 태권도 3단 이었던 그는 체육 행정학을 전공하는 한편 대학에서 유도와 태권도를 가르치는 조교로서 일했다. 그는 낮에는 강의실에서 공부하고 저녁이면 체육관에서 무술을 지도하는 고된 생활을 한 끝에 석사 학위를 받고 몬태나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받았다. 몬타나 대학에서도 유도와 레스링을 지도하면서 공부하는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그 뒤 몬태나 대학에 조교수로 부임하였고 몬태나 대학에 태권도 클럽을 창단하여 육성하였다. 1969년 버클리 대학에서 유도 과목을 가르치면서 다른 운동을 가르칠 강사를 구하자 유도를 전공하고 태권도 공인 3단인 그는 100: 1의 경쟁을 통과하여 버클리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태권도는 1960년대부터 미국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던 유학생들에 의해 조금씩 보급되던 태권도는 한국에서 젊은 사범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각지에 도장을 열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태권도에 대한 미국인의 인식은 부정적이었다. 태권도를 무술로 인정하지 않고 주먹꾼들이 서로 치고 받는 일종의 싸움 기술로 인식되어 있었던 것이다. 외국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일부 태권도 사범들의 거친 행동과 영화에서 태권도를 하는 사람이 악한으로 나오는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부정적인 인식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태권도는 일본의 가라테에 밀려 태권도 도장은 '태권도- 코리안 가라테'란 간판을 달고 있을 정도로 자부심을 잃고 있는 상태였다. 태권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없애기 1971년 민경호는 무술 프로그램을 신설하였고 학생들을 모집하기 위해 농구 경기 하프타임에서 태권도 시험을 보이기를 여러 번 했다. 격렬한 시범과 운동으로 인해 무릎수술도 여러 번 받을 정도로 몸을 아끼지 않고 미국인들에게 태권도에 대한 바른 인식을 심어 주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40대 후반까지 시범경기를 직접하면서 태권도 보급에 앞장섰다. 그의 노력으로 태권도가 학생들 사이에 인기를 끌면서 1972년에는 학기당 0.5학점이 인정되는 정식 체육 과목이 되었다.
민경호는 미국에 태권도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태권도가 미국 아마추어 체육인 협회(AAU : Amateur Athletic Union)에 정식 종목으로 등록되어야 한다고 판단 한 뒤 AAU를 상대로 활발한 로비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몬타나 대학에서 유도를 가르치는 동안 사귀었던 데이빗 리븐즈 몬태나 주 체육회장이 AAU의 회장이 된 1972년부터 AAU와 미국 올림픽 위원회와 접촉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유도를 AAU의 정식 경기 종목으로 가입시킨 헨리 스톤 교수가 수집한 자료를 대학에서 발견하여 이를 바탕으로 그들에게 태권도가 독자적인 경기 종목으로 AAU에 가입되어야 하는 이유를 설득하였다. 태권도와 가라테는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용어가 다르며 기술과 경기의 규칙이 다름을 강조하고 스포츠는 안전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데 서로 다른 무술이 대결할 경우 선수들의 부상이 자주 생긴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민경호의 이러한 노력으로 1973년 AAU 실행 위원회는 태권도를 독립된 정식 경기 종목으로 잠정 인정했다. 그는 곧바로 한국 정부와 협력해서 AAU 회장단을 한국에 초청하게 했다. 한국에서 태권도 경기를 직접 참관한 AAU 회장단은 적극적으로 태권도를 후원하였고, 1974년에 총회에서 태권도를 정식 경기 종목으로 채택했다.
1974년 5월 UC 버클리 하몬 체육관에서 역사적인 제 1회 AAU 공인 태권도 선수권 대회가 1백여 명의 선수가 참전한 가운데 열렸다. UC 버클리 오픈 태권도 대회는 그 동안 미국 내에서 한국의 태권도가 정착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으며 각 지역마다 다르게 적용되던 규칙을 일원화시키는 데도 일익을 담당했다.
민경호는 유도가 올림픽을 통해 세계화한 것처럼 태권도도 올림픽을 통해 세계화 되어야함을 강조한다. 또한 그는 자신이 은퇴할 경우 태권도 강사자리가 없어질 가능성에 대비하여 석좌 교수제 도입을 온힘을 다해 추진하였다. 그 결과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석좌 교수제가 도입되었다. 태권도 프로그램에 대한 석좌 교수제는 타 대학은 물론 한국에도 없는 것으로서 UC 버클리 대학에는 이로 인하여 영원히 태권도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민경호는 말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태권도가 우리의 민족 유산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태권도의 정신과 진수를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댓글목록 0
장재학님의 댓글
선배님 저는 아직 아는것이 별로 없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