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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 Re : [김남훈 칼럼]박치기 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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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훈 칼럼] 프로레슬링, 박치기, 김일 | |||||
[헤럴드 생생뉴스 2006-10-26 10:02] | |||||
“형. 김일 선생님이 위독하시대요.” 격투기 관련 업계에서 일하는 친한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제 밤샘근무의 여파가 있어 노트북의 모니터를 열자 뿌옇게 포털사이트의 뉴스화면이 들어오고, 점차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박치기왕 김일 위독.” 굵게 살아왔던 그의 인생처럼, 굵은 글씨체로 메인화면을 장식하고 있는 관련 기사. 내가 그를 처음 접한 것은 1980년대 초반. 내가 아직 프로레슬링에 관심을 갖기 이전이었다. 송탄 미군부대앞 철길에서 뛰어놀던 나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복면을 쓴 레슬러들이 포니픽업에 탄 채 ‘지옥의 혈전’을 홍보하며 다니고 있었던 것. 프로야구의 인기와 레슬링은 쇼라는 인식때문에 막다른 길에 다다른 마지못한, 궁여지책의 프로모션이었다. 그 때 동네 여기저기에 붙은 포스터의 정중앙에 ‘박치기 왕 김일’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동네에서 옷장사를 하던 우리집에도 공짜표가 들어왔으나, 시큰둥하게 넘어갔다. 경기가 있었던 것도 모르고 동네어귀 전봇대 근처에서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승용차가 한 대가 서더니, 창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버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어제 우리집에 흘러왔던 프로레슬링의 티켓이었다. 흥행이 실패하자 남은 표를 길에 버리고 가는 것이었다. 그 승용차 뒷편의 좌석에 묘한 살기가 도는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벗겨진 머리, 상기된 얼굴, 앉아 있어도 차 안에 있어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거대한 풍채. 바로 김일이었다. 그 때의 경험은 매우 특이했다. 아니 김일에 대한 나의 느낌은 항상 특이했고 변화했다라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어린 시절 동네어귀에서의 만남 후 미국의 WWF 프로레슬링을 AFKN으로 보면서 레슬러의 꿈을 갖게 되고, 직접 링에 오르면서 그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대단한 존재인지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몸뚱아리 하나만으로 거대한 부의 제국을 만들었다(정동 MBC건물도 그의 소유였다). 스승 역도산이 그러했듯 사람을 휘어잡고 인기를 만들어내고, 카메라의 앵글을 자신에게 맞추는 방법을 알았으며, 링에서는 사생결단의 경기, 상대방의 공격과 방어를 허용하지 않는 이른바 ‘시멘트’ 경기로 상대선수를 ‘때려잡았다’. 감히 그와 같이 프로레슬러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전쟁이 막 끝나고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잘 곳도 그 어느 것도 풍족하지 않은 상태에서 밀항자의 신분으로 일본에 건너간 그는 역도산과는 다르게 조선인이라는 타이틀을 절대로 떼어낼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그에게는 오직 근성과 실력만이 자신의 생존을 책임질 수 있는 도구였을 것이다.
자신을 철저하게 일본인으로 위장했던 스승 역도산도 어찌된 일인지 명명백백한 조선인이 분명한 그를 옆에 두고 자신의 보디가드처럼 대동했다. 역도산은 제자를 포용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술에 취해 발로 밟고 재떨이로 이마를 내려치는 폭한이었다. 다른 일본인 제자들 중 안토니오 이노키 외에 스승에 대한 그리움을 피력하는 이는 한 명도 없다는 점이 그 점을 증명한다. 김일과 역도산은 평소에 단 한번도 한국말로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그러나 딱 한번 화장실에서 단 둘이 있을 때 한 말이 있다. “그거 있잖아. 그거 봄에 나는 거.” “뭐 말입니까? 관장님. “(일본어로) “아, 도라지! 응, 그래. 도라지! 그거 지금 비벼 먹으면 맛있지 않나?” (한국어로) “네, 그렇습니다. 지금 비벼먹으면 맛있지요.”(한국어로) 가끔 이처럼 아득한 전설속 사나이들의 이야기를 잠깐씩 들어보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경험이었다. ‘박치기왕’이라는 타이틀은 그에게 엄청난 부와 명예를 주었고, 그는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더욱 거세게 상대를 찍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회복불가능한 신체적 위험을 가져왔다. 박치기는 그의 생존의 수단이었고, 그의 생명을 지워내는 야속한 지우개였던 것이다.
김일은 한국에서는 절대선의 베이비페이스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호랑이와 곰방대가 그려진 가운을 입고 링에 올라가 ‘악당 조선인’의 역할을 했다. 기자들 앞에서 일본선수의 얼굴이 그려진 베개에 깔을 꽂아댔다. 자신에게 돌이 날아올수록, 일본관중들이 침을 뱉을수록 자신의 파이트머니가 올라가고, 그 돈으로 일본선수를 한국에 불러 더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던 매우 영리한 야수였다. 184cm 의 키에 120kg을 육박했던 탈아시아급의 슈퍼코리안 김일. 역도산의 냉혹하고 잔인한 살기를 갖게하는 지옥훈련과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언트 바바 같은 걸출한 라이벌들과의 경쟁, 그리고 조선인의 신분으로서 쏟아지는 차별을 당연히 감수하면서 그것을 오히려 자신으로의 관심으로 만들어 링을 피바다로 만들곤 했던 김일. 오키 킨타로. 프로레슬링이란 허명의 격투기를 진실의 반석위에 올려놓은 사람. 몰려드는 관중으로 장충체육관의 쇠철문이 여러번 휘어지게 만든 사람. 자신의 육체를 생업의 도구로,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사용했던 사람. 제자들의 경기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결코 링사이드에서 경기를 관전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경기가 끝나고 패배의 황망함에 라커룸으로 힘들게 걸어가던 나에게 살살 조심해서 안다치게 하라고 손을 어루만져주던 사람. 내가 알고 있는, 내가 살아온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카리스마와 투지, 육체, 그리고 야수성으로 링위의 제왕으로 군림했던 사람. 그와 같이 세상의 공기를 흡입할 수 있는 시간이 짧아져 간다는 것이 너무나 아쉽다. 진심으로 아쉽다.
프로레슬러, IT저술가, 격투기 칼럼니스트 김일(오키 킨타로) 1958년 가난을 등지고 역도산의 이름 단 석자만 외운 채 일본으로 밀항. 이후 체포. 역도산이 보증인이 되어 일본프로레슬링과 입문. 자이언트 바바 , 안토니오 이노키와 함께 ‘세날개 까마귀’라는 별칭을 얻는다.
1963년 미국원정에서 WWA 챔피언벨트를 따냄으로서 챔피언의 자리에. 그러나 스승 역도산이 세상을 뜨자 귀국해 대한프로레슬링을 설립, 에이스로 군림한다. 이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수많은 인기를 누리나, 안토니오 이노키 및 자이언트 바바같은 일본 토종에이스들의 인기와 국내에서 자생된 프로레슬링 단체와의 불협화음으로 우여곡절을 겪는다. 982년 아수라 하라 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목부상이 심해져 은퇴를 하게 된다. 국내 올드팬에게는 박치기만이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그는 스파링(아마추어레슬링, 캐치레슬링)에서 당할 자가 없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대단한 테크니션이었다. 키락, 암바, 힐락 등 다채로운 관절기를 구사하는 레슬러였다. 한 때 유도 올림픽 메달리스트인 윌리엄 루스카의 이종격투기설도 프로모터들 사이에서 나왔을 정도였다. 만약 이 경기가 30년전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다면, 한국의 격투기는 지금 매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획득타이틀 WWA 세계 헤비급 챔피언 WWA 세계 태그팀 챔피언 인터내셔널 헤비급 챔피언 인터내셔널 태그팀 챔피언 극동헤비급 챔피언 아시아 헤비급 챔피언 아시아 태크팀 챔피언 외 다수 제공 - <@싸이뉴스 psygra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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