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고 출신으로 대구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인 홍덕률 교수의 칼럼을 퍼 왔습니다. 참조하십시오. 김영옥 대령의 아버님은 인천에서 하와이로 이민갔던 초기 이민자입니다. 미국에서는 장군 추서와 최고무공훈장을 위한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인천 월미도에 세워질 이민사 박물관에 김영옥 관이 세워질 예정 입니다.
김영옥 대령을 한국 사회에 알리는 캠페인을 우리 인고 동문회가 주도하면 어떨까 제안 합니다.
[영남시론] '영웅' 김영옥<?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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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연휴를 틈타 벼르던 책 한 권을 집어들었다. '영웅 김영옥'이었다. 몇 달 전부터 책으로라도 만나보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금년 초, 우연히 한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그의 장례식 장면을 보고 난 뒤부터였다.
단숨에 읽어내려 간 뒤의 첫 느낌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 때까지 '영웅 김영옥'을 모르고 있었던 필자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서였다. 그렇게 자랑스러운 한국인이 정작 한국사회에는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는 사실도 필자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우선 '전쟁영웅'이었다. 2차 대전 때 미군 중위로 유럽 전선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과를 거뒀다. 1943년,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이탈리아 피사를 해방시킨 주역이었으며, 또 로마 해방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는 지금도 그를 불패 신화의 전설적 영웅으로 칭송하고 있으며, 양국 모두 그에게 최고 무공훈장을 수여했다. 미국에서 받은 특별 무공훈장까지 합하면 3개국에서 받은 무공훈장이 무려 10여개에 달했다. 어느 누구보다도 그의 지휘를 따랐던 일본계 미국인 병사들이 지금까지도 그를 영웅으로 떠받들고 있다. 그 뒤의 한국전쟁 때도 그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자원해 참전했다. 금년 2월, 그의 장례식 때 한국 정부가 최고 무공훈장을 수여한 것도 한국전쟁에서의 숱한 공로를 인정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필자를 더욱 감동케 한 대목은 전쟁터 밖에서의 그의 따뜻한 삶이었다. 알고 보면 전쟁영웅이란 칭호는 그에게 너무 부족한 호칭이다. 그의 위대한 삶을 절반밖에 설명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72년, 미 육군 대령으로 예편한 뒤 그는 한국계 이민자를 포함해 미국 내 소수민족의 권익과 복지를 위해 헌신하였다. 빈민구제기관, 소수민족 청소년 지원단체, 한인 정신건강 정보센터 등 수많은 비영리 봉사단체가 그의 손으로 설립되었다. 빈민, 고아, 장애인, 청소년, 노인, 가정폭력 피해여성 등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에 그는 군복을 벗은 뒤의 여생을 다 바쳤다. 한국전쟁 때는 수백명의 전쟁고아를 돌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선행을 드러내지 않았다. 수많은 무공훈장을 자랑삼지 않은 채 창고 구석에 처박아 두고 산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한마디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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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열님의 댓글
역사는 이런분들께 영웅이란 호칭을 붙여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