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고등학교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과거 명문고로 이름을 떨친 제물포고등학교나 가장 오래된 학교로 유명한 인천고등학교의 시작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1935년에 개교한 인천부립중학교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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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7월 인천중학교 2학년 3반 학생들의 모습. 현재의 제물포고등학교가 있는 웃터골이다. (사진제공: 심재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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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부립중학교는 개교 당시에는 오늘날 동인천 학생문화회관이 자리하고 있는 과거 축현초등학교(당시 인천공립심상소학교)에서 1년간 교실을 임대해 수업을 하다가 다음해인 1936년, 오늘날 제물포고등학교가 있는 웃터골에 새로 학교를 짓고 자리를 잡았다. 1940년대 일제 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고등학교 과정이 없었다. 초등학교 6년 졸업 이후 중학교에 진학하면 5년제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대학을 가는 시절이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중학교 5년제가 6년제로 바뀌면서, 인천에서 당시 공부 좀 한다는 수재들은 모두 인천부립중학교, 즉 인천중학교로 진학했다. 거기서 6년을 마치고 대학을 진학했던 셈이다. 인천중학교는 그때부터 년1972년 2월, 중학교 평준화 정책에 의해 강제 폐교가 될 때까지 인천의 명문중학교로 이름이 높았던 학교이다. 오늘날 제물포고등학교를 졸업한 주변의 어른들을 보면 한결같이 ‘인중-제고○회’ 하는 식으로 모임을 갖는데, 왜 하필이면 ‘인중-인고’가 아니라, 또는 ‘제중-제고’가 아니라 ‘인중-제고’의 결합이 되었을까. 인천중학교와 제물포고등학교는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같은 인천 사람으로서 평소 참 궁금하던 대목이다.
이와 관련해 1946년, 인천중학교가 6년제로 바뀌던 해에 1학년으로 입학했던 ‘심재갑’동문의 입을 통해 당시 이야기를 들어 보면 아주 드라마틱한 당시의 교육 제도에 대해, 그리고 제물포고등학교와 인천고등학교의 시작에 대해 알 수 있다.
1950년 6월 20일, 당시 해방 이후 인천중학교 교장으로 인천 교육계에 명성이 자자했던 길영희 선생님은 1950년 3월 10일 개정된 교육법에 따라 3년제 고등학교를 신설할 수 있다는 내용을 바탕으로 6년제 인천중학교 부설로 인천고등학교를 만들어 웃터골 인천중학교 교정에 ‘인천고등학교’ 현판식을 갖고 고등학교를 개교했다. 문리과 94명의 입학생까지 받은 터였다. 당시 입학생들은 대개 인천중 4학년 학생들로 이루어졌고 동산중, 인천상업중 4학년 학생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정식으로 입학시험까지 치르고 선발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불과 5일 뒤에 6․25 전쟁이 터지면서, 인천중과 인천고는 모두 무기 휴교에 들어갔고, 개교 5일만에 벌어진 전쟁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인천고의 존립 자체는 유야무야 되다시피 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 인천이 수복되면서 웃터골의 인천중, 인천고 학생들은 인근의 송림초, 신흥초, 그리고 월미여중(현재의 인천여상) 등에서 교사를 빌려 공부를 재개하였다. 인천중이 있던 자유공원 일대는 미군 야전병원으로 차출되어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와중에 1951년 3월, 부산 피난 국회가 교육법을 개정하여 중등학교 과정을 오늘날과 같은 ‘6-3-3-4’ 단선제로 확정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당시 6년제 중학교들이 1951년 6월부터 중․고등학교로 분리, 독립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인천중학교는 인천상업중학교 1, 2, 3학년 학생들을 받아서 3년제 중학교로 확정되었고, 인천상업중학교는 인천고 1학년(인천중 4학년) 및 인천중 5, 6학년 학생들을 받으며 학교 간판도 인천고등학교로 바꾸게 되었다. 즉, 1950년 6월 20일에 인천중 내에 개교한 인천고 94명의 학생들이 1951년 11월 인천상업중학교(현재의 정보산업고 자리)로 오게 되면서 ‘인천고’의 학교명까지 그대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당시 인천상업중학교 이인관 교장 선생님은 이렇게 인천상업중학교 1, 2, 3학년 학생들을 모두 인천중으로 보내고, 대신 인천고 1학년과 인천중 5, 6학년 학생들을 받으면서 자의 반 타의 반 ‘인천고등학교’의 명칭까지 함께 가져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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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인천상업중학교의 3학년 학생들의 모습 (출처: 인천고등학교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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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통에 결정된 일이라고나 할까. 당시 인천중 길영희 교장 선생님은 제주도에 피난을 가 있다가 올라 올 수 없는 상황이라 미처 손쓸 틈이 없었고, 이로 인해 결국 6년제 인천중학교는 3년제 인천중학교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는 3년제 인천고등학교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에 따라 1951년 당시 인천중학교에 다니고 있던 4(인천고 1학년), 5, 6학년 학생들은 모두 인천고등학교로 강제 배정되어 전학을 갔고, 인천상업중학교에 다니던 1, 2, 3학년 학생들은 거꾸로 인천중학교로 옮기게 되었다. 즉 중학교 1, 2, 3학년에 다니는 학생들은 모두 인천중학교로 몰고, 중학교 4, 5, 6학년에 다니는 학생들은 모두 인천고등학교로 보낸 것이다.
이렇게 해서 1951년 인천중 6학년이었던 학생들은 그해 11월에 인천고로 학적을 옮겨 이듬해 3월에 인천고 1회 졸업생이 되었다. 심재갑의 동기 약 150여 명이 여기에 해당한다. 1951년 인천고등학교의 탄생에는 이와 같은 비화가 담겨 있다.
한편, 1953년 11월 인천중학교는 유엔군으로부터 웃터골의 학교 건물을 돌려받게 되었는데, 인천중학교 길영희 교장 선생님은 1954년 8월, 제물포고등학교를 개교하여 인천상업중학교로 넘어가게 된 ‘인천중-인천고’의 끊어진 명맥을 ‘인천중-제물포고’로 되살려 이어가게 된다. 우리가 아는 ‘인중-제고○회’의 기수는 바로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제물포고등학교는 인천중학교 내에 다시 학교를 세워 당시 인중 출신의 타 고교 진학생들을 데려 와 54명의 학생들로 입학식을 치르며 그 시작을 알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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