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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야구 시발지···구도 100년(퍼온글)
작성자 : 이덕호
작성일 : 2006.07.07 08:27
조회수 :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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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신문(06. 7. 7) 키워드로 보는 인천 |
한국야구 시발지···구도 100년 |
‘이곳은 경성그라운드 네트 뒤의 마이크로폰입니다. 야구하기에 아주 좋을 만큼 일기도 활짝 개었습니다. 입추의 여지없이 스탠드를 가득 메운 팬들의 열기 또한 대단합니다. 과연 인천상업을 대망의 갑자원구장으로 보내느냐 그렇지 않으면 경성상업이냐 실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결전이 이제 곧 시작합니다.’ 인천상업의 전신 인천고가 개교 100주년을 맞아 지난 1995년 발간한 ‘인고백년사(仁高百年史)’에 실린 전국중등학교 조선선발 야구대회 결승전(1932년)을 생중계한 라디오 방송 내용의 일부분이다. 당시 인천상업은 조선 대표로 처음 갑자원대회 본선 무대를 밟았다. ‘구도(球都)’ 인천을 말 할 수 있는 한 단면이다.또한 개항의 상징인 인천이 한국 야구의 시발지이며 ‘구도(球都)’라는 데 이견은 없다.특히 인천에는 한국야구 100년의 역사와 함께한 전통의 야구 명문 인천고와 한국야구를 빛낸 숫한 스타를 배출한 야구 명가 동산고가 고교야구의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경인기차통학생들로 구성된 한인 최초의 야구단인 한용단에서부터 지금의 인천 프로야구팀 SK와이번스까지 야구는 인천 시민과 오랜 세월 애환을 나눈 대표적인 스포츠다. 짠물 야구의 지난 한 세기를 되돌아 봤다. ▲한국야구의 시작=인천이 간직한 최초의 기록 중 하나가 야구다. 지난해 대한야구협회가 한국야구 100주년을 기념해 발간한 ‘한국야구사’를 보면 한국에서 야구가 처음 선보인 것은 1905년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Philip L Gilet)에 의해서다. 그가 황성기독교청년단 회원들에게 ‘타구(打球)’ 또는 ‘격구(擊球)’라는 이름으로 야구를 가르쳤고, 이듬해인 1906년 2월 11일 독일어학교팀과 야구경기를 했는 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야구 경기라고 한국야구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인천에서의 야구 시작과 관련한 공식적인 기록은 없지만 이보다는 훨씬 앞선다는 증거는 많다. 1895년 개교한 인천영어야학회(인천고 전신)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일본인 후지야마 후지후사는 당시 자신의 일기에 베이스볼이란 서양 공치기를 했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질레트보다 무려 6년을 앞서 인천에서는 야구를 즐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우리말로 쓰인 최초의 야구 규칙집인 ‘야구규칙과 용어’란 책이 인천야구협회에 의해 1947년 편찬됐다고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인천의 자랑 한용단=인천 향토사를 엮은 ‘인천 한 세기(신태범저, 1983 홍익사)’에는 1919년 3.1 운동이후 문화통치를 실시한 일본이 인천 웃터골(현 제물포고자리)을 공설운동장으로 개설해 야구 경기를 가졌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조선인 청년들로 구성된 ‘한용단(漢勇團)’이란 야구팀이 이곳에서 경기를 가졌던 것으로 이 책은 전하고 있다. 더욱이 한용단이 일본인 야구팀과 경기를 펼칠 때면 ‘어른들은 빈 석유통을 두드리고 아이들은 째지는 목청을 돋우어 응원했으며 지게를 세워놓고 경기를 구경하던 장수는 조갯살과 생선을 썩혔다’는 웃지못할 에피소드도 이 책에서 소개되고 있다. 이처럼 야구라는 서양식 공치기가 당시 인기를 모았던 것은 나라를 잃고 핍박받던 시절 일본인에 대한 민족적 원한과 울분을 야구 잘하는 ‘용맹스런 사내(漢勇)’의 모습을 통해 해소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경인전철통학생 친목회가 중심이었던 한용단은 당시 항일 학생운동의 주축이기도 했다. 한용단은 인천에서 기차로 통학하던 배재, 중앙, 휘문, YMCA 등 서울의 각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중심이었는 데 과거 국회의장을 지냈던 고 곽상훈 선생이 당시 단장을 맡아 야구팀 결성에 산파역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지만 당시 한용단은 웃터골에서 펼쳐졌던 일본 미두추인소(현 증권거래소) 야구팀과의 경기에서 일본의 편파판정으로 우승을 빼앗기는 일이 벌어져, 흥분한 조선인들이 대회 본부석으로 뛰어드는 등 충돌사태를 빚어 그만 팀이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 이들의 영웅적인 행동은 지역 청년들을 자극시켜 인천에서의 야구 열기는 더욱 확대됐다. ▲사회인 야구의 효시 ‘전인천군’=해방 후 46년은 신탁통치로 인한 미군정이 실시됐던 시기로 이때는 미군들과 자주 야구시합을 벌였다. 인천 사회인야구를 대표했던 ‘전인천군(全仁川軍)’ 역시, 에스컴, 21항만사령부 등 인천지역에 주둔했던 미군 팀들과 경기를 치르며 두드러진 활약상을 남겼다. 처음에는 전인천군이 실력을 과소평가했던 미군들이 건성으로 경기에 임했으나 몇차례 경기에서 전인천군에게 혼 줄이 나자 조직적인 훈련을 했으며 차후에는 미군사령부가 주최한 양팀간의 정기전이 치뤄졌다. 이를 계기로 국내에서는 46년 자유신문사가 주최한 4대도시 대항야구대회가 해방후 첫 공식대회로 열렸다. 46년 5월 17일부터 19일까지 경성운동장에서 펼쳐졌던 이 대회는 서울, 인천, 부산, 대구, 등 4개도시를 대표한 팀이 참가해 풀리그방식으로 펼쳐졌다. 그러나 인천 팀은 예상외로 3전 전패로 첫 대회에서 최하위로 밀려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런데 이 대회 인천팀 전적 중 특이한 점은 인천이 최하위를 기록했으나 대구와 1차전 경기에서 13회 연장 끝에 0-1로 분패한 것을 비롯 서울팀에게는 8-9, 부산팀에게는 2-3, 모두 1점차로 패해 아쉬움을 남겼다.하지만 전인천군은 이듬해인 제2회 대회에서 당당히 우승을 차지하며 인천야구의 위세를 떨쳤다. 당시 전인천군은 전주팀을 8-2로 꺾고, 결승에서 서울팀에 2-1로 역전승을 거뒀다. 이후 인천 야구팬들의 열화와 같은 성화에 편승 대회는 인천에서 개최됐다. ▲인천야구의 전성기=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후 10년 넘게 부동의 정상을 지키며 한국야구를 호령했던 인천야구는 1989년 또 한 번의 야구 전성기를 맞는다. 당시 인천 야구의 양대산맥인 동산고와 인천고가 각각 봉황대기와 황금사자기 정상을 차지해 구도 인천을 야구 열기로 뜨겁게 달궜다.동산고는 제19회 봉황대기(8월8일∼25일, 동대문구장)에서 초고교급 투수인 2년생 위재영을 내세워 패권을 차지했다. 이 대회에서 위재영은 직구평균 135㎞의 빠른 볼로 17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혼자서 6승을 도맡아 MVP와 우수투수상을 수상했다. 한편 위재영은 그해 프로구단 태평양 돌핀스와의 조기계약설에 휘말려 곤욕을 지르기도 했다. 그리고 4대 전국대회 마지막을 장식한 제43회 황금사자기대회(9월 5일∼12일 동대문구장)에서는 인천고가 이 대회 5차례 우승 관록이 있던 선린상고를 4-2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인천고는 ‘에이스’ 허호석의 구원 역투와 최성훈의 결승타에 힘입어 35년 만에 황금사자기를 품에 안았다. 1950년대 초반 전국을 호령했던 인천고는 1979년 무려 4개의 전국대회(전국체전 포함)에서 모두 결승까지 올라 준우승이 그친 기억에 있어, 당시 우승의 감격은 더했다. ▲슈퍼스타에서 비룡에 이르기까지=인천을 연고로 한 프로야구는 삼미 슈퍼스트즈-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현대 유니콘스에 이어 지금의 SK 와이번스까지 다섯 번이나 팀이 바꿨다. 야구단 모기업의 잇단 부도와 재정 압박, 그리고 연고지 이탈로 인천 야구는 한 때 주인 없는 야구 도시로 전락했다. 지난 2000년 3월 신생구단 SK가 인천을 연고지로 택하며 인천 야구는 또 한번 구도의 명성을 되찾고 있다. SK는 팀 창단 4년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 한동안 침체돼 있던 짠물 야구에 붐을 조성했다. 국내 최고 시설을 자랑하는 메이저급 야구장인 문학구장에서 SK는 또 한 번 인천 야구의 부흥을 준비하고 있다. 지건태기자 jus216@i-today.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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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현님의 댓글
70회에도 야구광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