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西施)
서시(西施)는 고대(古代)에서 제일가는 비밀정보기관원과 같은 존재였다. 적국(敵國)을 제멋대로 좌지우지하고 오왕(吳王)부차(夫差)를 아주 백치로 만들어 버렸는가 하면 오자서(伍子胥)의 머리를 잘라 성문에 걸어놓아 오자서가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게 하였다.
듣건데 “구천(勾踐)”이 국가사업(?...)에서 성공한 후 서시에게 눈독을 들였다고 한다. 구천의 아내는 아주 드센 여자였는데, 이는 그녀가 구천과 함께 사람의 인분(변)을 맛보았다는데서 알 수 있다.
이런 그녀가 천하에 이름을 남기는 영광스러운 일에 두손들어 서시와 남편간의 일을 내놓을 수 있단 말인가? 때문에 서시의 처지는 매우 위험하였다고 한다. 마치, 서시는 그물에 걸려든 고기와 같아 나갈 방도를 찾을 수밖에...
다행히 서시와 범의(范懿)가 예전부터 정이 들고 사랑했기에, 그들 두 사람은 <<작은 배는 타고 태호(太湖)로 가서, 그들의 남은 여생을 태호(太湖)에 의탁하였으며 다시는 친구, 친척이나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서시(西施)의 말로(末路)는 어찌되었는지 그 진실성을 알 수는 없지만, 사람들이 그녀가 비참하게 죽지 않기를 바라는 이상, 그녀가 정말 정든 남자와 태호에서 여생을 보냈다고 생각하자.
왕소군(王昭君)
왕소군(王昭君)에 대한 인상은 매우 어렴풋하다. 그녀가 고집을 부리고 모연수(毛延壽)에게 뇌물을 받치며 다가가지 않은 것은 좀 세상물정에 어둡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함의 이유였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자기의 개성을 견지(堅持)한다고 하여 장래의 빛나는 미래를 놓친 것은 미모와 그에 따른 태도가 거만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자진하여 화반(和磻)에게 시집을 간 것도 사실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내키지 않은 마음의 마지막 모험을 한 것이다. 비록 역사는 그녀에게 매우 높은 평가를 주었지만 왕소군 개인적인 각도에서 볼 때 그녀는 그저 운명을 바꾸고 인생을 돌려보려 한 것뿐이다.
남편이 죽은 후 당시의 풍습에 의해 왕소군은 남편과 전처의 아들에게 시집을 갔다고 한다.
양옥환(楊玉環)
양옥환(楊玉環) 은 38세까지 살았는데 그녀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부드럽고 따스한 향기로운 옥체를 품에 안는다는 시 구절이 있다. 감정의 갈등으로 볼 때 양옥환과 홍루몽에 나오는 진가경(秦可卿)은 마치 “곡(曲)은 달라도 그 기교(技巧)는 같음을 의미하는 곳”도 있다.
양옥환은 모든 총애를 다 받았으나 흰 비단에 목을 매는 죽음을 선사 받은 끝에 꽃잎 떨어지듯 가고 말았다. 애인(당 현종)의 손에 죽는 것이 하나의 자비인지 아니면 더욱 큰 비애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융기(李隆基)와 양옥환의 러브스토리는 역사를 변화시켰다. 안사의 난(安史之亂)은 천하에 성세(盛世)한 당조(唐朝)의 노래와 춤으로 물든 그림을 일약 화약고로 분쇄시켰다. 양옥환은 한 나라를 기울이는 전설이었다는 것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다.
초선(貂蟬)
초선(貂蟬)의 죽음은 제일 억울하다고 한다. 그녀가 일생에서 가장 큰 성공이 바로 동탁(董卓)과 여포(呂布)를 이간시킨 것이다고 한다.
동탁은 비만한 늙은이이고 여포는 소년영웅이었다. 여기서 초선의 몸과 마음이 갈라짐은 얼마나 억울하고 고통스러웠는가를 알 수 있다.
여포가 얼마나 용맹한가? 유비(劉憊), 관우(關羽), 장비(張飛) 세 사람은 그를 이기지 못한다.
초선은 마지막에 관우의 칼에 죽었다. 관우는 <<너무 예쁘구나! 보기만 해도 화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 하였다. 아름다움이 피할 수 없는 죄로 되었으니 실(實)로 더 무어라 할 말이 없다.
오천 년의 중국역사에서 미녀는 끊임없이 나타나고 사라졌다. 일명 중국의 4대미인 이라고 하는 네 명은 아마 제일 예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녀들은 다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고 역사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기에 후세사람들은 끊임없이 그녀들을 언급하면서 감개무량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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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광회님의 댓글
좋은 공부 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