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경기도 북부 높은 산에 가면 이런 청사초롱들이 밝혀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특산식물 금강초롱입니다.
특산종 식물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금강초롱은 상위 분류인 '속' 까지도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아주 아주 독특한 식물입니다.
게다가 서식 조건이 까다로와서 제한된 지역에만 자생합니다. 철 맞춰 찾아가지 않으면 보기도 힘들거니와 꽃 모양이나 색깔, 질감 자체가 경탄을 자아내며 줄기와 잎사귀마저도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자연미의 결정체입니다. 한마디로 귀하신 몸이죠.
[금강초롱, 2004.8.22 강원 화천, Nikon D100, AF 24-85mm(D)]
그런데 참 괴이하지요. 금강초롱의 학명 말입니다.
Hanabusaya asiatica, Nakai (속명) (종명) (명명자)
하나부사야? 나카이? 웬 일본인 이름 같은 단어가 2개? 어여쁜 우리 특산식물 이름에 어째서 일본인이???
예전에 대략의 사연을 지인들로부터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일본인 식물학자 나카이가 일본 공사의 이름을 따 명명했다는거죠. 아무리 일본인끼리라지만 자연과학을 하는 학자가 왜 일왕 신하의 이름을 기려서 학명을 지었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었는데요, 이번에 자세히 조사해보니... 전부 사실이더군요.
[하나부사와 일본인 공관원들, 1882년] 사진출처: http://www.tgedu.net/student/tfokuk/html/image/jo3033.html
금강초롱 학명중 하나부사야는 화방의질(花房義質) 즉 '하나부사 요시카타' (요시모토라고 표기된 자료도 있습니다만...) 라는 일본인 이름을 딴 것이 맞습니다. 위 사진 가운데 줄 가운데 인물입니다.(재수없는 얼굴 크게 볼 필요없죠?) 약력을 보면, 1842년 오카야마 출생인 정치가, 외교관으로 20대 중반에 유학을 떠나 프랑스, 영국, 미국에서 공부했다고 하네요. 40대 이후 주 러시아 공사, 농상무성 차관, 일본 적십자 총재로 출세하다가 죽기 몇 년전 귀족인 자작(子爵) 타이틀까지 챙기네요. 제국주의 일본 관료사회에 흔해빠진 이력서입니다.
문제는 이 자의 30대 시절 경력입니다. 서양 유학을 막 마치고 돌아온 외무부 서기관 하나부사는 1870년 일본 주재 독일공사 브란트 등과 함께 군함 헬타호를 타고 부산에 입항해 통상을 요구합니다. 이때는 실패하고 돌아가지만 이후 조선을 집어삼키기 위해 집요하게 무력시위와 외교공작을 벌이지요. 이듬해인 1871년 9월 초대 주한 공사로 부임하는데 따지고 보면 서울에 부임한 최초의 외교사절(?)이군요. 이 자가 공사로 있는 동안 운요오호 사건이 벌어지고 급기야 1876년 첫 불평등조약인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이 체결됩니다. 요새 식으로 말하자면 글로발 스탠다드 (?) 서구식 제국주의 노선을 체득하고 온 젊은 외교관이 하나부사인 겁니다. 그를 앞세워 일제는 조선을 강점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해갔던 것입니다. 별기군을 창설시킨 것도, 인천과 원산항을 강제 개항시킨 것도, 심지어 태극기를 쓰지 못하게 하려고 제멋대로 그린 괴상한 삼색기를 우리나라 국기로 쓰도록 강요했던 자가 바로 이 하나부사입니다. (주권의 상징물마저도 없애려고 한 치밀하고 교활한 인물이라고 생각됩니다.)
나중에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이 벌어질 때 별기군 출신들이 공사(이때는 미우라)가 고용한 일본 깡패들과 공범이 되어 황후의 시신을 불태우고 암매장하였으니 이 참혹하고 수치스런 사건도 하나부사가 씨앗을 뿌린 셈입니다.
[금강초롱, 2004.8.22 강원 화천, Nikon D100, AF 24-85mm(D)]
이렇게 빼어난 자태를 지닌 귀한 꽃에 다른 일본인도 아니고 침략 원흉의 이름이 붙여지게 된 경위는 이렇습니다.
갖가지 불평등조약으로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지리, 토양, 식생에 대한 상세한 조사를 진행합니다. 장래의 수탈을 위한 기초작업이었지요.
하나부사 자신이 조선 팔도를 다니며 수많은 식물을 채집해 그 표본을 자기네 나라 대학으로 보냈습니다. 그가 보낸 표본 중에는 금강초롱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미지의(?) 식물이 무더기로 들어오니까 동경제국대학도 연구원을 파견하기에 이릅니다. 이중 동경제국대학 식물원 직원 우치야마 토미지로(內山富次郞)라는 자가 1902년 금강산 유점사 근처에서 '금강초롱'의 학술표본을 채집해 일본으로 가지고 갔던 것입니다. 9년뒤인 1911년에 식물학자 나카이 타케노신(中井猛之進, 1882-1952)이 '화방초(花房草)' 즉 '하나부사'라고 이름을 붙였던 것입니다.
왜? 하나부사와 나카이는 어떤 인연이길래?
이 인연에 대해서는 나카이 자신이 동경식물학회 <식물학잡지> 1911년 4월호에 직접 밝혀 놓고 있습니다. 이순주님(제자리를 떠난 문화재에 관한 조사보고서 저자)이 옮긴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관련 URL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redirect.asp?at_code=168194)
"나는 이 조선의 진귀한 식물에 대해 새로운 속(新屬)을 세울 필요를 느끼고 그 명칭의 선정에 부심하였는데, 본인으로 하여금 조선식물을 연구하도록 지정하고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극진한 지도를 아끼지 않았던 은사 마츠무라 진조(松村任三) 교수가 이르기를… (중략) 아직 오늘날과 같이 조선의 일본에 대한 관계가 없던 일청전역(日淸戰役) 이전에 조선식물의 조사에 주목하여 그 시절 이곳의 공사였던 하나부사 자작이 손수 많은 식물을 채집하여 이를 이과대학 식물학교실에 기증했던 것에 기인하여, 그 후 식물원의 우치야마 토미지로(內山富次郞)를 두 차례나 파견하여 다시 전문적인 채취를 시도한 결과 나날이 조선의 식물조사에 등한히 했던 것을 알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내가 조선식물조사의 대임을 받는 것이 되었으니 그 원인이 되는 하나부사 자작의 공은 잊혀질 수 없어, 즉 마츠무라 교수에 상의하여 하나부사야(Hanabusaya)의 이름으로 이 신발견의 세계적 진식물(珍植物)을 자작에 바쳐 길이 그 공을 보존하여 전하고 싶다."
정말 재수없는 스토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나카이는 하나부사에게 신세를 갚으려고 이런 일을 벌였던 것입니다.
나카이가 유명 식물학자로 발돋움하도록 기회를 준 평생의 은인이 바로 하나부사였습니다. 하나부사는 전임 공사로서의 영향력을 이용해 나카이를 총독부 촉탁교수로 앉히고 식물조사 책임을 맡겼습니다.
사실 처음 조선 땅을 밟을 때만해도 나카이는 일개 식물학도에 불과했습니다. 석사 학위조차 없었습니다. 총독부의 지원 아래 나카이는 근대 식물학의 세례를 받지 않은 처녀지, 한반도와 만주의 식물상(flora)를 수십년 동안 독점적으로 연구할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학계의 거물로 급성장했던 것입니다. 이를테면 로또 당첨된거죠. 1909년에 ‘한국 식물상(Korean Flora)'으로 석사, 1911년 역시 우리나라 식물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동경대 교수까지 지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 식물학계의 원로 고 정태현 박사의 회고록을 통해서도 확인됩니다.
정태현 박사(1833-1971)는 1908년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임업권농모범장에서 임업 관련 일을 하던중, 1911년부터 나카이와 동행하여 우리나라 전역의 답사를 안내했던 사람으로, 식물 채집과 분류, 표본 작성과 관련 도서 발간 등 우리나라 식물분류학의 초석을 놓은 인물입니다. 1954년부터 성균관대 교수로 재직했고 아래 글은 1964년 성대 학보에 기고한 수기의 일부입니다.
"1911년부터 일인 中井猛之進 박사와 함께 우리나라 야생식물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연구를 약 35년간 계속하였습니다. 필자가 처음으로 금강산의 조사를 갔던 것은 1916년의 일입니다. 이때도 역시 나카이(中井)박사와 같이 동행하였습니다. 이 당시만 하여도 본 산의 식물이 잘 소개되지 않을 때였습니다. 본 산의 식물은 일본 동대부속식물원(東大附屬植物園)에 있던 우치야마(內山富次郞)씨가 1902년에 갔던 것이 최초이었고 그 후 파우리(Urbain Faurie, 1906), 우에키(植木秀幹), 모리(森爲三), 石戶谷勉 등에 의하여 58과(科) 208종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조사결과 동산(同山)식물에 33과 502종을 추가하였고 기중(其中) 한국미기록이 1속(屬) 41종 21변종이었으며 새로 개명한 것이 1속(屬) 17종(種) 17변종(變種)이나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막대한 수확이었지요. 본산의 식물은 기후(其後)에 많은 학자들과 관광객들에 의하여 채집되었습니다. 관광객들에 의해서 채집된 것 중에 좋은 예는 금강초롱꽃(Hanabusaya asiatica)입니다. 이 식물은 최초로 하나부사(Hanabusa)라고 하는 사람(당시 조선총독, 花房義質)이 본 산을 구경하러 가서 채집했던 것인데 나카이(中井)박사가 한국식물을 조사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라 하여 이를 기억하기 위하여 하나부사야(Hanabusaya)라고 하는 속명(屬名)을 붙여서 1911년에 일본식물학회지(日本植物學會誌) 25권에 본산의 특산식물로서 발표한 것입니다. 신속(新屬)으로 확정한 것은 1909년에 전기(前記) 內山씨가 1902년에 채집한 표본에 의하여 고정(考定)했던 것입니다."
[금강초롱, 2004.8.22 강원 화천, Nikon D100, AF 24-85mm(D)]
침략자가 우리 이름에 손대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한번 퍼지면 좀처럼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더욱이 하나부사야(화방초)라는 이름에는 꽃 花자가 들어있어서 민간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지어진 향명으로 깜박 속기도 쉽다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일본 헌병을 본 적도 없고 일본식 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무의식적으로 이 끔찍한 명칭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지금 야후 검색 가서 화방초 쳐보세요. 눈물 납니다 ㅠ.ㅠ
하나부사는 어째서 식물채집에 그리도 유난히 열을 올렸을까? 이름이 '화(花)'자가 들어있는 花房이라거 그랬나? 피씨방도 노래방도 아닌 하필 화방일게 뭐람...
그의 생물자원 조사는 식민 지배의 기초 작업, 예비 조사였습니다. 강도가 사전 답사하고 예행연습한 것이지요. 이런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수법은 일본이 창안한게 아니고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를 대상으로 써먹던 것입니다. 다른 나라를 점령하면 그 나라의 생물상, 광물상 등 모든 것을 샅샅이 알아내는 것은 수탈을 위해 당연한 수순입니다. 우리나라에 이런 마수(?)가 뻗쳐온 것은 일본의 등장보다 훨씬 이른 1854년입니다. 슈리펜바흐 남작(Baron Alexsander Schripenbach)이란 사람이 버들을 비롯한 약 50여 종을 채집하여 유럽에 보낸 사실이 있다고 합니다. 일본은 이런 거 따라한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모방에 열을 올리는 Copycat이죠.
그러고 보면 하나부사는 유학생 시절을 허송세월하지 않고 공부를 착실히 했던 것 같습니다 ㅠ.ㅠ
아무튼 아직까지도 우리가 금강초롱을 화방초라고 부르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이제라도 꽃 이름에 밴 '수탈의 추억'을 말끔히 씻어줘야겠습니다. 다행히 금강초롱이란 이름은 어감이나 뜻이나 너무 이쁘지 않습니까?
다만, 학명은 국제식물명명규약을 통해서 결정된 이상 임의로 바꾸지 못합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에게 던져진 현실입니다. 북한 학자들은 일제가 학명을 뺏아간데 분노하여 '금강사니아' (Keumgangsania asiatica)라 바꿔 부르고 있다 합니다. 매우 북한다운 발상이고 그들의 자유지만 물론 국제적으로 전혀 인정되거나 통용되지 못합니다.
[칼잎용담, 2004.9.4 강원 정선, Nikon D100, AF 24-85mm(D)]
더 뼈아픈 사실은, 일본식으로 창씨개명 당한 것이 금강초롱 하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알면 알수록 기분 드러워지지만 냉정하게 정신을 가다듬고...
- 칼잎용담 Gentiana uchiyamai Nakai (우치야마!)
거참 골고루도 나눠가졌네요. 우치야마는 금강초롱 학술표본 채집한 그 사람 이름 아니던가요! 나카이하고 둘이 누가 선배인지 후배인지 모르지만 서로 챙겨주는 기억력도 비상하군요 ㅋㅋ
[섬초롱꽃, 야생화클럽 한석조님 사진 제공]
섬초롱꽃의 경우는 더 기가 막힙니다. 이 식물은 울릉도에만 자생하는 우리나라 특산종으로서 흔히 피는 초롱꽃과 모양은 비슷하지만 꽃잎에 털이 없고 미색 외에 자주색도 핍니다.
근데 일인들이 붙여놓은 학명 좀 보세요.
- 섬초롱꽃 Campanula takesimana (Nakai) Kitam
자기들이 독도를 부르는 '다케시마'를 섬초롱꽃에다가 붙여놨군요. 으~~~ 자꾸만 이런 식이기 때문에 나카이와 그 주변 인물들을 인정하기 어려워집니다.
[테라우치 총독과 조선 왕족, 덕수궁 인정전에서]
나카이가 조선의 꽃이름을 자기네 고관에게 들어 바친 사례가 금강초롱말고 하나 더 있다고 합니다. 바로 위 사진 속의 초대 조선총독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1852-1919)입니다.
잔혹한 무단통치로 악명높은 총독입니다만, 나카이는 백합과에 속하는 '조선화관(朝鮮花菅)' 혹은 '평양지모(平壤知母)라고도 하는 식물에 테라우치의 이름을 따서 사내초(寺內草)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이 꽃의 학명은 'Terauchia anemarrhenaefolia, Nakai'가 된 거죠.
다큐멘터리 방송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앞서 소개한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에 관한 조사보고서'를 펴낸 이순우님의 또다른 책 '테라우치 총독 조선의 꽃이 되다'를 보면 자세한 전말이 나옵니다. 일본 <식물학잡지> 1913년 10월호에 나카이의 글이 남아 있다는 거죠.
"평양고등보통학교 교유(敎諭) 이마이 한지로(今井半次郞)씨가 재작년 한 개의 백합과 식물을 다른 다수의 조선식물과 더불어 내게 보내 그 검정(檢定)을 원했는데, 요사이 자세히 이를 검사했더니 바로 학계 미지의 한 식물이고 또 분명히 일 신속(新屬)의 가치가 되었다. 분류학상의 위치는 백합과에 속하고 (중략) 여러 가지 점에 있어서 명백히 이것과는 구별이 되었다. 조선총독부 테라우치 백작 각하는 조선식물조사의 필요한 바에 착안하여 내게 조사를 명하노니, 내가 여러 해 품어왔던 뜻이 그로 인해 단서를 잡았으며, 조선의 땅은 일만(日滿)의 사이에 끼어있으나, 그럼에도 아직 식물상 정밀의 조사가 없어 식물학상 유감이 적지 않아 내외에 제 선배가 벌써부터 이를 안타까워했으나 지금 총독각하가 이 점에 착안한 것은 동학(同學)의 가장 감복하는 바이라 즉 이에 본 식물을 각하에 바쳐 길이 각하의 공을 보존하여 전하고자 희망한다."
저는 야생화 보러 다닌지 얼마 안되기 때문에 평양지모를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평양이란 접두어로 미뤄 한동안도 기회가 없겠지요. 하지만 만약 만나보게 된다면 학명은 잊고 싶을 겁니다.
[구상나무, 야생화클럽 한석조님 사진제공]
조선 식물 쟁탈전에 일본인만 나선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다시 정태현 박사의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씁쓸하네요 ^^
"1917년 미국 식물학자 윌슨과 함께 제주도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때 동행했던 윌슨(Wilson)박사가 분비나무 과실(果實)의 인편(鱗片)이 뒤로 제껴진 것을 발견하고 새로이 Aibes Koreana E.H. Wilson(구상나무)이라고 하는 신식물(新植物)로서 발표하게 되었는데 당시 한국식물에 조예가 깊었던 나카이(中井)박사가 선취권을 뺏기고 발을 구르며 억울해 하던 생각이 납니다."
아니 누구 땅에서 누구의 식물을 놓고 선취권을 주장한단 말입니까!
이 사람들 그런데 이런 쟁탈전 벌이다가 때로는 서로를 추켜세우기도 했나 봅니다. 울릉도에 드물게 자라는 섬개야광나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역시 한국에만 나는 특산종이고 울릉도 도동 일대의 자생지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인데요, 나카이가 붙인 학명 보시죠. 뒤집어집니다.
- 섬개야광나무 Cotoneaster wilsonii Nakai
[금강초롱, 2004.8.22 강원 화천, Nikon D100, AF 24-85mm(D)]
참 안타까운데... 이 역사를 되돌릴 수도 없고... 하필 침략 앞잡이가 꽃쟁이 하나부사였던 것인지. 만약 다른 자가 일본 공사였다면 우리 식물들은 이름을 지킬 수 있었을까? 아니면 하나부사가 임오군란 때 구사일생하지 않고 붙잡혀 죽었다면?
(잘 나가던 하나부사도 하마터면 비명 횡사할 뻔했는데, 1882년 임오군란 때였습니다. 별기군만 우대하는데 화가난 구식 군대가 무장봉기한 사건이죠. 구식 군졸들은 일본 공사관으로 몰려가 건물을 불태웠고 1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여기까지는 국사 시간에 배운 내용이고 KBS 대하드라마 [명성황후]에서도 다뤄진 장면이죠. 근데 이후 하나부사는 어떻게 됐을까요? 구사일생으로 서울을 탈출해서 인천까지 한 걸음에 도주했다고 합니다. 제물포항에서 조각배 하나를 구해서 바다로 무작정 도망갔는데요, 그대로 뒀으면 고기밥이 될 수도 있던 것을 영국 측량선 플라잉피시호가 구조해줬다는 것이지요. 하나부사는 군함4척과 1개 대대 병력을 이끌고 돌아와서 임오군란의 손해배상금 등 또다시 불평등 조항으로 가득한 제물포조약을 강요했습니다.)
혹은 하나부사가 나카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역사에서 이런 가정법은 부질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요? 우리는 머리 속에 똑똑이 기억해둬야 합니다. 주권을 상실한 겨레와 그 강토, 심지어 그 식물상(flora)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져야 됩니다.
수탈의 일환으로 일제시대에 발간된 '한국식물지' 이후에 남북한을 아우른 식물지가 아직 없다고 합니다. 자기네 나라 식물상을 다 알고 있지 못한 것은 문명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창피한 경우라고 하네요. 그 점은 반성하고, 함께 노력해야겠지요. 그러다 보면 우리에게도 기회가 올 겁니다.
모르죠... 언젠가는 인류가 다른 행성으로 진출하는 날이 올 것이고 수많은 외계 식물에 우리말, 우리 학자 이름을 붙이는 날도 올지 모르죠.
뭐 이런 뉴스도 있습니다. 식물명은 아니지만은, 우리나라가 오늘 제주에서 열리는 국제식품규격위원회에 식품명 규격 초안을 상정한다고 합니다. `김치(kimchi)'에 이어 '고추장(Gochujang)'과 '메주(Meju)', `된장 Fermented Soybean Paste(Doenjang)'이라는 우리말 이름을 세계인이 사용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금강초롱, 2004.8.22 강원 화천, Nikon D100, AF 24-85mm(D)]
금강초롱은 무척 아름답지만, 이를 여러분 가까이 옮겨 심고자 욕심부리시면 안됩니다. 꽃이 피어있는 야생화를 캐면 그대로 죽어버립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개화기간엔 절대 손대지 마세요. 아니, 꽃이 피었건 안 피었건 야생화는 그 자리에 그대로 두세요. 야생화가 아름다운 것은 척박한 환경을 이겨내려고 스스로 분투하기 때문입니다. 벌 나비 꼬셔서 번식하려고 색도 향기도 진하게 단장하는 것이죠. 이걸 뽑아다 마당이나 화분에 키워봐야 원래 색깔이나 향기는 사라져 버립니다.
더욱이 금강초롱은 특산종으로서 보호받고 있기 때문에 일체 채취 훼손하면 안됩니다. 더위에 무척 약한데다가 가을에 열매가 성숙하기 때문에 종자가 채 익기도 전에 서리를 맞고 죽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몇몇 곳에만 분포하고 숫자도 적은 겁니다.
굳이 원예화하려면 씨앗을 받아서 해야 되는데 서늘한 고산 기후를 사람이 만들어주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로서, 우리나라의 많은 야생화 농가에서도 재배를 포기한 형편입니다.
[금강초롱] 금강산에서 처음 발견되었고 꽃 모양이 청사초롱같이 생겨서 붙여진 이름 (앗! 요건 누가 붙인 이름일까!) 분류 : 초롱꽃과의 여러해살이풀. 학명 : Hanabusaya asiatica 분포 : 한국특산 (경기도 북부와 강원도 북부, 함경도) 서식 : 1,000m 이상 높은 산지의 약간 습기찬 나무 그늘 크기 : 키 30∼90cm, 화관 길이 4cm 화관 : 자주색 또는 흰색 종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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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홍상(67)님의 댓글
재준동문!
참 반갑소이다.
오늘도 해박한 글,신선한 자료들이 자리를 빛나게 해주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