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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공이산, 해불양수 20년/조우성(시인 65회)(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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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공이산, 해불양수 20년
새얼아침대화를 회고하며
조우성/시인
새얼문화재단 주최 제240회 ‘아침대화’가 12일 인천 파라다이스호텔에서 열렸다. 햇수로 20주년을 맞는 이날 아침대화의 강사는 이인호 명지대 석좌 교수. 강연 내용은 작금 우리 사회의 뜨거운 화두로 떠오른 ‘역사 읽기와 역사 쓰기’였다. 그간 서울대 교수, 주 러시아 대사, 국제교류재단 이사장 등으로 다각적인 활동을 해 온 대표적인 여류 지성의 진솔한 육성을 대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뜻이 깊었다.
‘아침대화’가 그 첫 걸음을 내디딘 것은 지난 1986년 4월 8일이었다. 그 날 정석빌딩 지하 식당 원미정에 조촐하게 마련한 강연장에는 이른 시간임에도 신태범 박사, 이기성 인천상의회장, 류충렬 라이온스 총재 등 지역 원로들과 청장년 각계 인사 30여 명이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지역 문화운동에 동참하고 있었는데 사뭇 고조된 분위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까지만 해도 인천에는 그 흔한 시민단체는 물론이거니와 지역적 담론이나 여론을 토의하거나 공론화할 장이 없는 상황이었다. 거기에다가 설상가상으로 신문, 방송마저 없는 암울한 언론의 공백기였던 때라 어쩌다 흘러나온 지역의 목소리는 대부분 황야의 외침만큼이나 공허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역대 정부나 정당은 인천의 지정적 위상이나 실제적 역량을 과소평가하거나 기껏 수도권 위성 도시의 하나로 치부해 왔고, 지역 소재 대기업들은 덩달아 시민의 뜻을 외면한 채 타 지역에서는 상상조차 못할 전횡을 저지르기가 일쑤였다.
그런 사회적 정황 속에서 제1회 ‘아침대화’의 강사로 나선 분이 고 박광성 인하대 사학과 교수였다. 그분은 당시 인천시 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으로서 지역사 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학자였다. 지역사 전공 학자를 첫 강사로 초빙했다는 점과 그 내용이 ‘굴포천’이었다는 점 등은 오늘에 보아도 퍽 인상적이며 그날의 강연은 ‘인천학’ 연구에 선구적인 씨를 뿌렸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이었다는 생각이다. 그렇듯 ‘아침 대화’는 초창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천의 정체성을 밝혀 세워나가는 데 주력하는 한편 그를 바탕으로 동아시아 속의 인천, 환황해시대의 인천으로 그 시각을 넓혀 나왔다. 특히 최근에 시리즈로 마련했던 4당 대표 초빙 ‘아침대화’는 인천 초유의 중량급 정치적 행사여서 여러 면에서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비록 4당 대표들이 ‘인천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임했다는 지적을 받기는 했으나, 정치권으로부터 늘 소외받아 왔던 인천의 실질적 면모를 일깨워준 커다란 계기가 됐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아침대화’의 초지일관한 주제가 있었다면 그것은 지용택 이사장이 즐겨 비유해 온 ‘우공이산(愚公移山)’과 ‘해불양수(海不讓水)’가 아닐까 한다. 우공이산,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움직인다’. 해불양수, ‘바다는 물을 가리지 않는다’는 그 겸양지덕과 무한한 포용성이야말로 바로 인천적 정체성의 집약이자 아침대화를 중단 없이 일구게 한 근간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러고 보니, 새얼문화재단이 설립 이후 추진해 온 사업들에 우공이산적이며 해불양수적이 아닌 것이 없었다. 국내의 명망있는 석학들이 총출연해온 ‘아침대화’가 그렇고, 전국 최초로 백일장을 열었던 인천문단의 전통을 이은 새얼백일장이 전국 최대, 최고의 백일장으로 자리매김한 것과 황해문화가 전국지로서 지가를 올릴 수 있었던 것 모두가 그를 반증하는 예라 하겠다.
아침대화와 더불어 살아온 지난 20년이다. 그간 우리는 인천의 아픈 과거를 반추하고, 어렵사리 오늘을 꾸려가며, 꿈과 희망찬 내일을 간절히 소망해 왔다. 그리고 이제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인천의 하늘에 서기(瑞氣)가 충만해 있음을 느끼게 되는 요즈음이다. 그럴수록 더욱 더 우공이산, 해불양수의 정신으로 모두가 내 고장 인천을 가꿔나가는데 힘을 모아야겠다는 생각이다./조우성 시인
종이신문정보 : 20060414일자 1판 4면 게재
인터넷출고시간 : 2006-04-13 오후 7: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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