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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퇴임 조우성(65회) 인천시립박물관장(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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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일간경기(18. 4. 4)
[파워인터뷰] 지난달 퇴임 조우성 인천시립박물관장
“인천은 서울 관문아닌 그냥 인천이어야”
조우성씨와 4.19사진
조우성(70) 인천시립박물관장이 지난 3월 하순 물러났다. 갑자기 그가 사퇴하자 주변에서 여러 말이 나왔다. 그는 지난 3년간 재임하면서 박물관의 역할 변화와 확대, 인천의 예술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뮤지엄파크 추진 등에 앞장섰다.
인천의 문화 예술을 꿰뚫고 있는 인천에서 몇 안되는 ‘인천 전문가’인 그를 만나 ‘인천과 문화 예술 그리고 그의 삶’에 대해 들어봤다.
-우선 왜 갑자기 물러났는 지 궁금해 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인천시립박물관장은 공직이예요. 70이 넘어서까지 자리에 있는 게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무원들의 승진과 자리를 막고 있는 게 아닌 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6월에 지방선거가 치러지는 데 새로 임기를 시작하는 시장에게 부담이 되지 않기 위해 미리 사표를 내고 신변을 정리했습니다”
-아직 인천에서 할 일이 많을 텐데요?
“박물관장을 그만뒀다고 인천에 대한 일을 접는다는 건 아니예요. 요즘엔 나이 70이면 평생이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평생 모았던 인천과 근대사 사진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책과 글도 다시한번 손 볼 계획입니다."
실제로 숭의로터리 인근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책과 자료가 넘쳐났다. 특히 귀한 사진들이 많았다. 1960년 4.19 당시 인천에서 일어났던 시위 장면이 수십장이나 된다. 1909년 융희 3년에 인천세관이 발행한 영수증, 개항 당시 인천항과 개항장 일대, 인천 자유공원의 초창기 모습, 중국인으로 인천에서 거부가 되었던 오례당 집이 불타는 장면 등 희귀한 자료가 넘쳐났다. 1999년 인천 CGV극장이 개장할 때의 브로셔도 있다.
-어떻게 이렇게 귀중한 자료들을 많이 모았나요?
“부친이 소설가였어요. 일찍부터 집에 책과 사진들이 많았습니다. 일찍이 사진의 중요함을 깨달았다고 할까요. 1957년 열 살때인가 라이프 잡지에서 공산당 침입에 항거하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시민의 사진을 봤는 데 충격이었어요. 현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진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지요.”
그
의 부친은 한국문인협회 초대 인천지부장을 지낸 조수일이다. 영화 극작가와 기자, 소설가로 활동했다.
-인천에 대해서는 언제부터 관심을 갖게 되었나요?
“부친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요. 1988년 지역 신문인 인천일보가 창간되면서 기자로 들어갔어요. 인천을 체계적으로 잘 아는 사람이 많지 않더군요. 인천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책도 보고 자료도 모았지요.
창영초등학교가 인천 3.1만세운동의 시발점이었다는 사실을 찾아내고 조선 영조 때 좌의정을 지낸 김재로의 초상을 찾아 인천시문화재로 지정시키기도 했지요. 전봉준의 효수 사진이 가짜라는 것도 밝혀냈지요. 신문사에 있다보니 자료의 중요성을 더 알게돼 주머니를 털어서라도 인천 자료를 사기도 했어요”
-인천에서 주로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인천시 문화 예술 도시계획 등과 관련된 업무를 많이 한 편이지요. 이민사박물관 자문위원, 개항박물관 설립 추진위원, 수도국산박물관 운영위원, 지하철 역명 심의위원, 시사편찬위 자문위원 등을 지냈지요. 조선일보에도 2년정도 인천이야기를 연재했습니다. 그랬더니 모두 나를 시인이라고 하지 않고 인천 향토사가라고 하네요. 허 허.”
-인천은 어떤 모습을 발전해가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지?
“인천이 이제 서울의 관문이 아닌 말그대로 인천다워야 합니다. 서울 종속이 아닌 인천만의 정체성을 확실히 가져야 합니다. 동북아 시대 인천의 발전은 무궁무진합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1950년대 1960년대 인천에서는 독자적으로 영화가 많이 제작됐습니다.
인천의 독자 문화 예술 영역이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서울에서 인천을 찍어주길 바랄 뿐입니다. 우리가 경쟁도시로 여기는 부산만 해도 영화 ‘해운대’ ‘국제시장’ 등 부산을 주제와 소재로 한 영화가 만들어지는데 인천은 그런 게 없습니다. 인천은 ‘영화 불임의 시대’ 아니 ‘예술 불임의 시대’가 된 거죠. 인천의 문화 예술인들이 더 분발해야 합니다.
인천시가 계획하는 뮤지엄파크도 단순히 지역 종합박물관이 아닌 중국 상해나 일본의 요코하마, 후쿠오카와 경쟁한다는 생각으로 조성되어야 합니다.”
그는 인천 문화예술에 대해 이야기하자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는 그야말로 국제경쟁력을 갖춰야 한다고 했다.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기에 말을 많이 아꼈다. 자신이 그만 둘때도 특정 캠프로 가는 것 아니냐는 소문을 의식한 듯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묻자 “70평생을 살아보니 뭐가 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더라며 자신이 열심히 하면 세상이 보네 안 보네 해도 다 보고있어 도와주는 사람이 꼭 생긴다”고 했다.
인간 조우성은?
시인·교사·기자에서 원로 인천 전문가로
그는 1948년 인천 배다리 경동에서 태어났다. 송림초와 동산중, 인천고를 거쳐 한양대 국문과를 나왔다. 인천고 시절 문예반에서 활동했으며 백일장에서 여러 차례 입선해 일찍 시인을 꿈꿨다.
한양대에서 부친과 인연이 있는 박목월 선생을 교수로 만나 사랑을 듬뿍 받았다고 했다. 군 제대 후 1973년 인천 광성고에서 교사를 시작했다.
1975년 월간 시 전문지 심상에 작품을 발표해 등단했다. 1988년 교사를 그만두고 인천일보 창간때 입사해 문화부장 경제부장 편집부국장 8년을 지내다 인생 후반전에 대비하기 위해 다시 광성고로 돌아갔다.
5년간 교사 생활을 마치고 퇴직 후 강연과 글쓰기, 인천시 각종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지난 3년간 시립박물관장을 지냈다. 인천일보를 나온 뒤에도 10년간 객원논설위원으로 글을 게재하기도 했다. 인천의 3대 문화재단인 새얼, 가천, 선광 문화재단 임원을 지내기도 했다. 10여편의 인천 관련 책을 내기도 했다.
인천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인천사랑운동 시민대상, 인천언론대상, 인천시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심정구 전 국회의원,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 언론인 신용석, 시인 김윤식 등 지역 인사들이 많이 도와줬다며 고마움을 나타냈다.

‘인천이야기 100장면’ ‘영종 용유지’ 등 상당수 출간
그는 인천 관련 책도 많이 냈다. 인천시민들이 읽기 쉽게 내용이 구성되어 있다. 인천 근대사의 이모저모를 소개한 ‘인천이야기 100장면’, 월미도 역사를 보여주는 ‘월미도 이야기’ ‘간추린 인천사’등을 펴냈다.
‘영종·용유지’는 특별히 영종도에 인천공항이 들어서면서 사라지는 섬과 모든 것을 담았다. 그는 영종도의 모든 것을 담았다고 했다.
연표로 읽는 인천현대사와 20세기 인천생활문화연표도 있다. 책을 내는 데 문화재단의 도움을 적지않게 받아 감사하다고 했다. 인천시 홍보잡지인 ‘굿모닝 인천’과 조선일보에 ‘인천 이야기’를 연재해 인천 시민들에게 인천을 알렸다. 경인방송에도 매주 출연해 인천을 소개했다.
지난 2009년에는 인천의 지식인들을 상대로 하는 월간 잡지 ‘리뷰 인천’을 펴내기도 했다. 현재 휴간 상태지만 올해 중 ‘리뷰 인천’을 다시 만들어 인천 알리기에 앞장서겠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오래 몸담았던 인천일보가 올해 창간 30년이다. 창간 이전의 신문 역사를 써달라고 해서 자료를 준비 중이다. 인천의 언론 역사도 많이 잘못되어 있다면 해방후 인천 최초 신문인 대중일보와 경기교육신보 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두 기자 ld@1gan.co.kr
승인 2018.04.03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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