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홈런왕, 쉬흔의 나이를 넘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천재 스포츠인 이영민(1905~1954)의 셋째 아들 이인섭(70)씨가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해 통한을 억누른 채 13년만에 재창간되는 <주간야구>와의 인터뷰에서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경성운동장(현재 동대문구장) 1호 홈런의 주인공이며, 3할에서 6할대를 넘나들며 국내 각종 대회 타격상을 휩쓴 이영민은 1934년 11월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일본올스타(일본 자이언츠의 전신)로 뽑혀 일본에서 홈런왕 베이브 루스가 이끈 미국프로야구선발팀과의 경기에 외야수로 나섰던 전설적인 인물이다. 대한야구협회는 그의 공적을 기려 48회째 이영민타격상을 아마추어 최우수 타자에게 시상해오고 있다.
“돈이 필요해 친구들에게 아버지가 돈을 둔 곳을 알려줘 훔쳐오라고 한 것이 발단이었다.” 당시 배재고 학생이며 밴드부에서 활약했던 그는 범행을 공모한 2명의 친구중 한명이 결국 아버지를 1954년 8월12일 종로 필운동 자택에서 총으로 쐈으며, 그 친구는 무기징역, 이씨 본인은 단기 5년, 장기 7년의 징역형을 각각 선고받았다고 설명했다.
1960년 4.19혁명 때 감옥에서 나온 그는 수소문 끝에 망우리 묘소를 찾았다. “대한야구협회가 세워놓은 비석을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남들은 아버지를 이토록 위하는데, 나는 무슨 짓을 했던가?”
출소 뒤 포장마차로 생계를 꾸리던 그는 미8군 악단에서 일하는 선배를 만나 8군에서 섹서폰을 불기도 했다. 한때 강남 나이트클럽까지 운영하며 돈도 모았다. 하지만 그에겐 두번째 인생의 시련기가 닥쳤다. “조금만 벌면 아버지를 기념할 사업을 할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동료가 돈을 챙겨 달아나고 말았다. 아버지를 위해 아무 것도 할수 없었던 내가 더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그의 이런 처절한 인생 이면엔 불우한 어린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이혼과 가정불화 등. 아버지와의 불행한 사건 탓에 회한의 한 평생을 살아온 이씨는 현재 서울 영등포에서 자그마한 슈퍼마켓을 운영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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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열님의 댓글
기구한 부자지간의 운명이 뒤에있었군요.
이상동님의 댓글
세상에 이런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