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시골의 기나긴 겨울밤
작성자 : 윤용혁
작성일 : 2006.01.21 13:07
조회수 : 912
본문
나는 어려서 동네 형들이나 동네 누님들에게서 배운 됫 성냥 따먹기, 화투놀이를
일찍이 익혔다.
조금자라 머리가 굵을 쯤에는 민화투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뻥이라는 놀이를
하게 되었는데
이 놀이는 최종 화투장을 떨군다음 숫자 끝 수를 더하여 커다란 달력 뒷장에
적어서 여러 번 친
것을 합쳐 가장 적은 숫자를 가진 사람이 일등이 되어 공짜가 되고, 순차적으로
등수를 매겨
차등을 두는 놀이였다. 이를 통해 돈을 추렴하여 아랫마을 학교 정문 앞 경애네
구멍가게에서
과자 등 먹을거리를 사다먹는 일은 시골의 기나긴 겨울밤의 재미 중 하나였다.
당시 중학시절 남자친구들과 한 두 살 연상의 동네 누님들과 저녁후
동네 사랑방에 모여 ‘아이 엠 그라운드’ 놀이를 하였는데 그 중 가장 곤혹러웠던
것은 남의 아버지 이름이나 별명대기가 재밌고도 아이들간의 말 다툼으로 곧잘
이어지곤 하였다. 특히 나의 아버지 별명을
가지고 몇 명의 아이들이 ‘노새차차’ 라고 나오면 정말 싫었다. 그래도 야밤의
또래 친구들과 연상의 누님들과의 놀이에 동참하려면 그 정도쯤은 참고 웃어
넘겨야만 했다.
그 당시에 우리동네는 산골마을이라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등잔불을 켰는데
동네 사랑방에서 놀이에 지쳐 싫증이 날 때 쯤 짖굳은 한 남자친구가 갑자기 입김을 불어
등잔불을 끄면 그야 말로 여기저기서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주무르고, 꿰뜨리고,꼬집고, 깔깔거림, 비명소리와 함께 잠시 소동을 부린다음
헝클어진 모습의 동네 누님과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 정말 우습고 가관이었다. 그래도 나는
명세기 선생네 애라 속마음은 장난을 치고 싶어도, 본능에 충실하지 못하고 꼼짝 않고
상황을 지켜보니 남자친구들이 샌님이라고 여기며 꽁생원이라고 별명을 붙여주었다. 내가
그러지 못하는 이유중 또 하나는 집안네 누님뻘 되는여자들이 끼어있어 더더욱 얌전을
떨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상황을 여자들이 더 즐긴다는 것이었다. 남자애들이 못됐다고 핀잔을
주면서도 다음 날 저녁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모여 그런 게임을 또 즐긴다는 것이다.
그후 고등학교를 인천으로 유학나와 다잊고 지내다 겨울방학이 되어 고향 시골집에 내려온
나는 승부사의 기질로 동네 사랑방에서 벌어지는 흔히 말하는 ‘쪼이’라는 섯다와 그 후
발전한 속칭 ‘도리짓고 땡’에 열을 올리니 어릴적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내가 보기에도
한심하였다. 노름하라고 아버지께서 돈을 주실 리 만무하고 나는 궁리한 끝에 어머니께서
아버지 머리를 이발해 주시고 푼푼이 모아둔 저금통 입을벌려 오백원짜리 동전만을 골라
가지고 나가면 동네 친구나 형들이 쨍그렁 거린다고 노름판에 끼워주지 않으니 정말 난감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였다.
그래서 돈이 없었던 나는 노름판에 끼기위해 신문지를 화폐처럼 접어 천원짜리 지폐 한 장에
감싸 얼른 보여주고 노름판에 겨우 낄 수가 있었다.
추운 겨울날 밤 본당신부님이 오셨다고 시골집옆 성당에 나가라는 어머니의 당부말씀도
뿌리치고 담을 넘어 동네 사랑방을 찾으니 어머니께서 한심하기 그지 없으셨을 것이다.
한창 끝발이 오를 무렵이면 어머니께서 어떻게 아셨는지 찾아오셔서 친구네 사랑방
창호지문을 발로 걷어차며 나를 찾으시니 친구들 놀라 판 깨진다고 빨리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마지못해 일어서서 나가면 어머니의 심한 잔소리와 함께 아버지께 일러 바치겠다는 엄포에
마음고생을 많이하곤 하였다.
그래도 한번은 대박이 있긴 마련, 돈자랑 하던 친구들이 나의 코 묻은 돈을 보고 한판을
벌이다 파리보고 대포 쏜다고 나에게 그날 많은 돈을 잃어 억울해 하였다. 그러면 나는
푼돈을 나누어 주며큰소리 한번 치었다. 사나이가 노름판 뒷전에 나 앉아 개평이나
받는 인간이 되지말라고...
이런 과정을 거치며 기나긴 겨울밤을 나던 중 70년대 말 새마을 운동으로
국민계몽운동을 벌여도 나의 고향 시골동네에는 아직도 동네 사랑방에서 노름판이
정월 대보름까지 지속되었다.
아니 더 심각한 사람들은 봄이 다 되어 논에 거름을 낼 때까지 사랑방에서 화투놀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마침 그 때 아랫동네에 초상이 났다. 지금이나 그때나 초상이 나면 경삼한다는
명분아래 정말큰 노름판이 벌어졌다.
그러면 읍에서 전문 도박꾼들이 나와 첫날은 미끼로 돈을 조금씩 잃어주었다.
처음엔 좋았으나 나중에 동네 어른들은 소판돈, 돼지새끼 판돈, 종자돈을 다 들고
나와 노름판에 끼어들어 거의 다 돈을 날리고 말았다.
노름으로 인해 동네돈이 씨가 말라 버렸다. 보다못해 발인 전날 의협심을 발휘한 나
내 친구와 동네후배와 모의를 하였다.
낫으로 초상집 전기선을 끊어 암흑 세계로 만들자마자 퇴청마루에서
잽싸게 창호지를 뚫고 손을 너어 뒤에 서서 노돈 관리하는 놈의 손에 든 돈을
나꿔 챈다는 계획을세웠다.
드디어 초상집 사랑채에 도착한 우리는 계획대로 착착 진행을 하였다.나는 수신호를 보내고
동네후배는 낫으로 전기선을 끊고
내친구는 사랑방 퇴청마루에서 돈을 나꿔 채는 역이었다.
이미 동네분들은 이집 저집에서 빌린돈 대부분을 잃고 초라한 모습으로 뒷전에 물러앉아
개평이나 얻고, 전문 도박꾼들의 주머니는 터질 듯 배가 불러 있었다.
이때 나는 잽싸게 오른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니 동네후배 처마밑의 빨간 전선줄을 낫으로
끊는데 한번에 안되어 두 번을 내려치니 퉁하고 끊어지며 전기불이 나갔다.
정말 우리는 해서 않될 사고를 치고 만 것이다. 그것도 초상집의 전기를 끊었다는 양심의
가책과 함께 공포가 밀려왔다. 뒤도 안돌아 보고 동네후배와 죽을 힘을 다해 마당을 가로질러
밭두렁 논두렁을 넘어 큰논 한가운데 숨을 헐떡거리며 한참을 주저 앉아 있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짓을 한것이란 말인가? 동네후배의 손에는 아직도 낫이 들려있었다.
순간 증거물을 없앤다고 쌓아놓은 볍짚단속에 너으라고 지시했다.
주위가 조용할 쯤 거사후 만나기로 한 장소에 가보니 돈을 가지고 와야할 친구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거 정말 큰일 났구나.필시 붙들렸거나 아니면 경찰에 인계되어 일이 커진 것이
아닐까 하는 온갖 생각으로 미칠 것 같았다.
범인들의 범행후 심정이 바로 이렇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어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고 돈을 다 잃은 동네분이 올라오고 있기에
시치미를 뚝떼고나의 친구 근황을 물으니 아직도 노름판에 있다는 것이다.
아이쿠 이건 또 뭐란 말인가?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뒤늦게 사건현장을 찾으니 이친구 아무일 없다는 듯 뒷전에 바보처럼 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나중에 물은즉 불이 나가자 도박꾼들 떠빨리 돈을 챙겨 시도도 못해보고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한겨울밤의 거사는 허무하게 완전히 실패로 끝났지만 천만 다행이었다.
실제로 그친구가 강탈을 시도했다면 우리일행은 지금쯤 이력서에 빨간줄 하나 그어있을련지
모르겠다.
정말 얻은교훈이 많았다.
단순히 의협심만가지고 그 엄청난 일을 꾸며 무모한 짓을 한것에 대해 공소시효가
지난 지금에야고백을 하며 초상집에 정전사태를 일으켜 큰 혼란을 일으킨 점에 대하여
이제 와 심심한 사과의말씀을 전하고 비록 호상이었지만 아랫마을 할아버지의 명복을
다시한번 빌어본다.
일찍이 익혔다.
조금자라 머리가 굵을 쯤에는 민화투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뻥이라는 놀이를
하게 되었는데
이 놀이는 최종 화투장을 떨군다음 숫자 끝 수를 더하여 커다란 달력 뒷장에
적어서 여러 번 친
것을 합쳐 가장 적은 숫자를 가진 사람이 일등이 되어 공짜가 되고, 순차적으로
등수를 매겨
차등을 두는 놀이였다. 이를 통해 돈을 추렴하여 아랫마을 학교 정문 앞 경애네
구멍가게에서
과자 등 먹을거리를 사다먹는 일은 시골의 기나긴 겨울밤의 재미 중 하나였다.
당시 중학시절 남자친구들과 한 두 살 연상의 동네 누님들과 저녁후
동네 사랑방에 모여 ‘아이 엠 그라운드’ 놀이를 하였는데 그 중 가장 곤혹러웠던
것은 남의 아버지 이름이나 별명대기가 재밌고도 아이들간의 말 다툼으로 곧잘
이어지곤 하였다. 특히 나의 아버지 별명을
가지고 몇 명의 아이들이 ‘노새차차’ 라고 나오면 정말 싫었다. 그래도 야밤의
또래 친구들과 연상의 누님들과의 놀이에 동참하려면 그 정도쯤은 참고 웃어
넘겨야만 했다.
그 당시에 우리동네는 산골마을이라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등잔불을 켰는데
동네 사랑방에서 놀이에 지쳐 싫증이 날 때 쯤 짖굳은 한 남자친구가 갑자기 입김을 불어
등잔불을 끄면 그야 말로 여기저기서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주무르고, 꿰뜨리고,꼬집고, 깔깔거림, 비명소리와 함께 잠시 소동을 부린다음
헝클어진 모습의 동네 누님과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 정말 우습고 가관이었다. 그래도 나는
명세기 선생네 애라 속마음은 장난을 치고 싶어도, 본능에 충실하지 못하고 꼼짝 않고
상황을 지켜보니 남자친구들이 샌님이라고 여기며 꽁생원이라고 별명을 붙여주었다. 내가
그러지 못하는 이유중 또 하나는 집안네 누님뻘 되는여자들이 끼어있어 더더욱 얌전을
떨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상황을 여자들이 더 즐긴다는 것이었다. 남자애들이 못됐다고 핀잔을
주면서도 다음 날 저녁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모여 그런 게임을 또 즐긴다는 것이다.
그후 고등학교를 인천으로 유학나와 다잊고 지내다 겨울방학이 되어 고향 시골집에 내려온
나는 승부사의 기질로 동네 사랑방에서 벌어지는 흔히 말하는 ‘쪼이’라는 섯다와 그 후
발전한 속칭 ‘도리짓고 땡’에 열을 올리니 어릴적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내가 보기에도
한심하였다. 노름하라고 아버지께서 돈을 주실 리 만무하고 나는 궁리한 끝에 어머니께서
아버지 머리를 이발해 주시고 푼푼이 모아둔 저금통 입을벌려 오백원짜리 동전만을 골라
가지고 나가면 동네 친구나 형들이 쨍그렁 거린다고 노름판에 끼워주지 않으니 정말 난감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였다.
그래서 돈이 없었던 나는 노름판에 끼기위해 신문지를 화폐처럼 접어 천원짜리 지폐 한 장에
감싸 얼른 보여주고 노름판에 겨우 낄 수가 있었다.
추운 겨울날 밤 본당신부님이 오셨다고 시골집옆 성당에 나가라는 어머니의 당부말씀도
뿌리치고 담을 넘어 동네 사랑방을 찾으니 어머니께서 한심하기 그지 없으셨을 것이다.
한창 끝발이 오를 무렵이면 어머니께서 어떻게 아셨는지 찾아오셔서 친구네 사랑방
창호지문을 발로 걷어차며 나를 찾으시니 친구들 놀라 판 깨진다고 빨리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마지못해 일어서서 나가면 어머니의 심한 잔소리와 함께 아버지께 일러 바치겠다는 엄포에
마음고생을 많이하곤 하였다.
그래도 한번은 대박이 있긴 마련, 돈자랑 하던 친구들이 나의 코 묻은 돈을 보고 한판을
벌이다 파리보고 대포 쏜다고 나에게 그날 많은 돈을 잃어 억울해 하였다. 그러면 나는
푼돈을 나누어 주며큰소리 한번 치었다. 사나이가 노름판 뒷전에 나 앉아 개평이나
받는 인간이 되지말라고...
이런 과정을 거치며 기나긴 겨울밤을 나던 중 70년대 말 새마을 운동으로
국민계몽운동을 벌여도 나의 고향 시골동네에는 아직도 동네 사랑방에서 노름판이
정월 대보름까지 지속되었다.
아니 더 심각한 사람들은 봄이 다 되어 논에 거름을 낼 때까지 사랑방에서 화투놀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마침 그 때 아랫동네에 초상이 났다. 지금이나 그때나 초상이 나면 경삼한다는
명분아래 정말큰 노름판이 벌어졌다.
그러면 읍에서 전문 도박꾼들이 나와 첫날은 미끼로 돈을 조금씩 잃어주었다.
처음엔 좋았으나 나중에 동네 어른들은 소판돈, 돼지새끼 판돈, 종자돈을 다 들고
나와 노름판에 끼어들어 거의 다 돈을 날리고 말았다.
노름으로 인해 동네돈이 씨가 말라 버렸다. 보다못해 발인 전날 의협심을 발휘한 나
내 친구와 동네후배와 모의를 하였다.
낫으로 초상집 전기선을 끊어 암흑 세계로 만들자마자 퇴청마루에서
잽싸게 창호지를 뚫고 손을 너어 뒤에 서서 노돈 관리하는 놈의 손에 든 돈을
나꿔 챈다는 계획을세웠다.
드디어 초상집 사랑채에 도착한 우리는 계획대로 착착 진행을 하였다.나는 수신호를 보내고
동네후배는 낫으로 전기선을 끊고
내친구는 사랑방 퇴청마루에서 돈을 나꿔 채는 역이었다.
이미 동네분들은 이집 저집에서 빌린돈 대부분을 잃고 초라한 모습으로 뒷전에 물러앉아
개평이나 얻고, 전문 도박꾼들의 주머니는 터질 듯 배가 불러 있었다.
이때 나는 잽싸게 오른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니 동네후배 처마밑의 빨간 전선줄을 낫으로
끊는데 한번에 안되어 두 번을 내려치니 퉁하고 끊어지며 전기불이 나갔다.
정말 우리는 해서 않될 사고를 치고 만 것이다. 그것도 초상집의 전기를 끊었다는 양심의
가책과 함께 공포가 밀려왔다. 뒤도 안돌아 보고 동네후배와 죽을 힘을 다해 마당을 가로질러
밭두렁 논두렁을 넘어 큰논 한가운데 숨을 헐떡거리며 한참을 주저 앉아 있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짓을 한것이란 말인가? 동네후배의 손에는 아직도 낫이 들려있었다.
순간 증거물을 없앤다고 쌓아놓은 볍짚단속에 너으라고 지시했다.
주위가 조용할 쯤 거사후 만나기로 한 장소에 가보니 돈을 가지고 와야할 친구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거 정말 큰일 났구나.필시 붙들렸거나 아니면 경찰에 인계되어 일이 커진 것이
아닐까 하는 온갖 생각으로 미칠 것 같았다.
범인들의 범행후 심정이 바로 이렇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어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고 돈을 다 잃은 동네분이 올라오고 있기에
시치미를 뚝떼고나의 친구 근황을 물으니 아직도 노름판에 있다는 것이다.
아이쿠 이건 또 뭐란 말인가?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뒤늦게 사건현장을 찾으니 이친구 아무일 없다는 듯 뒷전에 바보처럼 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나중에 물은즉 불이 나가자 도박꾼들 떠빨리 돈을 챙겨 시도도 못해보고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한겨울밤의 거사는 허무하게 완전히 실패로 끝났지만 천만 다행이었다.
실제로 그친구가 강탈을 시도했다면 우리일행은 지금쯤 이력서에 빨간줄 하나 그어있을련지
모르겠다.
정말 얻은교훈이 많았다.
단순히 의협심만가지고 그 엄청난 일을 꾸며 무모한 짓을 한것에 대해 공소시효가
지난 지금에야고백을 하며 초상집에 정전사태를 일으켜 큰 혼란을 일으킨 점에 대하여
이제 와 심심한 사과의말씀을 전하고 비록 호상이었지만 아랫마을 할아버지의 명복을
다시한번 빌어본다.
댓글목록 0
이성현님의 댓글
글이 참 맛이 있어요.
윤용혁님의 댓글
성현선배님 고맙습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안태문(80)님의 댓글
감상 잘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추억이 있겠지요. 저 역시 그런 공소시효가 지난 추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