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74회 졸업30주년 기념행사 스케치
작성자 : 이인규
작성일 : 2005.11.27 21:18
조회수 : 1,042
본문
이제야 좀 정신이 드는 것 같습니다.
1년여 기간동안 행사의 총괄기획을 담당하며 힘이 많이 들었습니다.
돈 걷으랴, 행사 준비하랴, 인원 동원하랴.......
다행히 성황리에 잘 끝내고, 주변으로부터 수고 했다는 말과 함께
역시 74회라는 벅찬 칭찬에 동안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는 보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시간에 쫒기고, 여러가지 여건상 동문장학회와 야구후원회에
약속했던 회원가입을 못해 드려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내년도 정규사업으로 전개하여 약속을 지키고자 합니다
이 자리를 빌어 행사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여 주신 선.후배 동문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올리고자 합니다
행사장에 직접 오시지는 못했지만, 저희 74회 행사에 대해 궁금한 동문들을 위해 74회 진우곤
동문이 행사 스케치한 내용을 올리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74회 졸업 30주년 행사 스케치===============
--- 내용이 길다고 투정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오다가다 틈틈이 읽어주시면 됩니다. 이것은 씹고 씹을 만한 추억이 담긴 것이기에 너무 성급히 읽고 치우려는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마시기를 거듭 당부합니다. 급히 먹는 밥은 체할 수 있는 것이기에 ---
무슨 말부터 꺼내야 좋을까. 그것은 가슴이 뜨거워지도록 벅찬 감동을 안겨준, 한편의 아름다운 드라마였다고 하여도 대과가 없을 게다. 흡사 코스모스와 같은 순수와 맑은 우정이 어우러진 시간 속에 지난날의 추억들을 길어 올리며, 서로 얼싸 안고 굳게 잡은 손을 오래도록 놓지 못하는 정다움과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순간들이었다.
인고 74회 졸업 30주년 기념행사가 영종도에 있는 인천연수원에서 2005년 11월 19일 18:00부터 익일 오후 2시쯤 되어서야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우선 본 행사가 원만히 추진될 수 있도록 졸업 30주년 행사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2년여에 걸쳐 지금까지 물심양면으로 헌신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은 김영주 74회 동기회장님 이하 자문위원, 추진위원, 운영위원, 이사, 그리고 찬조 출연진 등등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번 진심어린 감사와 뜨거운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행사 당일 아침부터 가슴이 설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30년이라는 세월이 새로운 의미를 던져주었기 때문이다. 30년이라면 한 세대에 해당하는 세월이다. 향후 40주년, 50주년 행사도 예상할 수 있을 테지만 그것은 차후의 문제다. 30주년 기념행사를 거치고 나서야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 따라서 열일을 제쳐두고라도 기필코 참석해야 한다는 명분이 서는 바람에 더욱 가슴을 설레게 했던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사실 그날 나로서는 저녁에 또 다른 중요한 행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 19시에 문학 작품 심사를 주관해야 하는 입장이어서 아예 며칠 전에 졸업 30주년 기념행사 참여의 당위성을 내세워 심사 불참의 양해를 구할 수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더군다나 같이 가지 않겠느냐는 나의 권유에 아내도 쾌히 따라 나서겠다고 하는 바람에 나는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듯 어깨가 으쓱거려졌다.
아내와 나는 군포에 사는 김태환 동기 내외와 합류하여 행사장으로 향했다. 교통은 원활하였다. 시원스럽게 뻥 뚫린, 나로서는 처음으로 접하는 영종대교를 지나니 영종 공항고속도로 공항 방면 "화물터미널IC" 전방 200m부터 인고 마크가 찍힌 노란색의 현수막이 보였다. 공항신도시로 진입하여 운서2교 밑 통과 후 좌회전하여 가니 약도에서 명시한 대로 인천연수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후 4시 반이었다. 약 2시간 반 가량 걸린 셈이다.
우리로서는 조금 일찍 도착한 편이었다. 먼저 온 준비위원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저마다 맡은 일에 분주한지라 나도 장태한 교수의 출간한 책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 주었다. 시간이 점차 흐르자 동문들이 속속 모습을 나타내었다. 나는 일일이 악수를 하면서 감회가 새로웠다. 힘차게 쥐어지는 악수 속에 진한 우정의 물결이 흐르고, 서로의 포옹 속에 가물가물해지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피어나는 게 아닌가. '너가 진우곤이냐, 어떻게 생긴 놈인지 꼭 알고 싶었는데, 반갑다, 야. 너의 글 맛있게 읽고 있다. 아무튼 놀라워.'하며 저마다 한 마디씩 하는 것이었다. 간혹 상대방의 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아 곤혹스러워하는데 그는 내 이름표를 보며, ‘야, 진우곤, 얼마만이냐.’하고 먼저 악수를 청하기도 해 다행이었다. 아무튼 수많은 동창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헤아려 보니 나와 악수를 나누지 않은 동문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기념행사가 18:30분부터 시작되었다. 졸업 당시 담임 선생님으로는 3학년 1반 이봉재 스승님을 비롯하여 3학년 8반 윤주신 선생님까지 참석하셨으나, 안타깝게도 3학년 4반 담임 이덕석 선생님은 심장 수술 후 건강이 안 좋으신 관계로 안타깝게도 나오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또 그 당시의 학과별 선생님으로는 영어의 이광복 선생님을 비롯하여 생물, 미술, 역사, 지구과학, 교련 및 체조를 담당하셨던 선생님들을 사회자인 서무총무 이인규 동문이 그 때의 추억들을 하나하나 되씹으며 소개할 때마다 배꼽을 쥐게 하여 장내에 웃음바다를 자아내곤 했다. 그것은 잠시나마 우리를 30년 전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어서 새삼스러웠다.
1부 기념행사에서 특기할 것은 74회에서 야구발전을 위한 3,000만원 상당의 야구조형물을 제작하여 바치겠다는 기증서를 가용현 교장선생님께 전달하는 식과, 은사님께 선물 증정, 그리고 자랑스러운 인고인상으로 재미.남가주LA인천고 동문회 부회장이며, 현대병 투병 전문의학 박사로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는 백상진 목사에 대한 수여식이 거행되었다. 승승장구하는 그의 모습이 자랑스럽기 짝없다. 이는 곧 우리 인고인의 위상을 해외에서도 드높인 것에 대한 공로이기에 나무랄 데 없었다. 그리고 차기 회장으로 이상용 동문이 선출되었다. 앞으로 그의 무궁한 발전을 기대하여 마지 않는다.
2부에서는 내.외빈 케이크 절단식과 반별 은사님과의 사진 촬영이 있었다. 그 후 맛있는 식사에 들어갔다. 참석한 인원들을 보니 테이블이 모자랄 정도였다. 대략 200명은 조금 넘어선 것 같았다. 이 정도로도 감지덕지라 아니할 수 없다. 사노라면 어찌 자기 입맛에만 맞는 떡이 있겠는가. 마음은 있어도 불가피한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한 동문들이 많을 게다. 그들이 어디 있든지 간에 그들의 마음도 우리와 동일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특히, 먼저 유명을 달리한 친구들, 멀리 이국 땅에서 오지 못한 친구들을 생각하면 안타깝고 아쉬운 맘 금할 길 없다.
3부는 다채로운 축하공연으로서 분위기를 돋우었다. 인천여고 동문 합창단의 아침이슬 같은 맑고 고운 음성이 실내의 분위기를 사로잡았다. 뒤이어 살사 댄스, 초대 가수의 노래 등이 열기를 고조시켰다. 특히 강정득, 채호식 듀엣 공연은 완전히 젊은 시절을 되찾게 하였다. 우리 학창시절의 애창곡이 강정득 동문의 노래와 통기타 연주에 실려질 때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께 따라 불렀다. 술잔을 높이 들며 건배를 하기도 하고, 일어서서 삥 둘러 어깨 동무를 서슴지 않았다.
그것은 밤하늘을 아름답고 화려하게 수놓는 폭죽의 터짐처럼, 벅찬 감동의 물결이 넘실대는, 그야말로 살아서 꿈틀거리는 장엄한 한편의 교향곡이었다. 아니, 쌀쌀한 날씨조차 녹이는 시뻘겋게 달구어진 용광로 같은 열기라 아니할 수 없었다. 가슴속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너와 나를 떠난 우리의 외침이 멋들어지게 절묘한 화음으로 빚어낸, 진정 살아있는 것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몸부림이었다.
그 이후 자정이 넘어설 때까지 스승과 제자, 동문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시간을 가졌다.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가운데 춤과 노래가 뒤엉켰다. 젊음의 발산과 허심탄회하게 쏟아내는 인생살이의 갖가지의 모습들. 누구는 건강이 안 좋다는 슬픈 소식, 사업에 실패하여 곤경에 빠져있다는 것, 자녀와 부모의 문제 등등 인생을 어느 정도 아는 나이에 직면하는 우리의 공통적인 문제요 관심사들이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서로의 건강을 챙기자며 입을 모았다. 그래야 40주년 기념행사에 나올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공식적인 행사는 아쉬움을 남긴 채 자정이 훨씬 넘어 끝났고, 저마다 정해진 숙소에 들어갔다. 술을 더 마실 사람들은 별도의 방을 지정해 주었다. 피곤이 엄습해왔다. 어떻게 잤는지 모르게 아침에 일어나니 6시 반쯤이었다. 몇몇 먼저 일어나 밖으로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밖에 나가보니 아침 일찍 떠나는 동문들이 여럿 있었다. 후일을 기약하며 악수를 나누거나 어깨를 툭툭 쳤다.
아침은 8시에 있었다. 시원한 콩나물국이 속 풀이에 그만이었다. 남은 인원은 부부동반 합쳐 45명 정도가 되었다. 조식이 끝난 후 백상진 목사와 함께 조촐하게 주일 예배를 가졌다. 그의 성경 역대하 32장 7절로 8절의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였는데 고난과 시련의 극복 방법으로서 긍정에 인생을 걸라는 것과 믿음은 육체의 메커니즘을 변화시킨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 예로 근위축병에 걸린 ‘안젤라’ 양이 승리한 긍정 인생은 감동적이었다. 다양하고 구체적인 예를 하나하나 들어가며 열정과 힘이 실린 그의 설교는 옷깃을 여미고, 코끝이 찡해질 정도로 심금을 울리는 명 설교였다.
예배에 뒤이어 백목사의 50세에 절실한 현대병 예방법 강좌는 참으로 유익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의학적인 새로운 지식과 더불어 생활 습관의 중요성을 인식시켜 주었다. 특히, 암세포가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은 놀라웠다. 무엇이 그것을 증식시키는 것인가에 대한 규명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았다. 아무튼 그 어느 때보다 미래와 건강을 중요시해야 하는 기로에 선 우리에게 그의 유머를 곁들인 알차디 알찬 강좌는 수시로 웃음을 자아냈고, 박수갈채를 받았다. 먼 길을 마다하고 행사에 참석해 준 성의도 놀라운데 동문들에게 적시에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니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오전 10시 반. 행사계획으로는 백운산으로의 산행이 잡혀 있었으나 두 부류로 나누어 백운산으로의 산행과, 윤인문 동문이 근무하는 인천교육과학연구원 관람으로 행사가 진행되었다. 나는 아내와 함께 인천교육과학연구원 관람을 택했다. 윤인문 동문의 배려와 안내로 좋은 관람을 할 수 있었다. 특히, 천문별자리 여행은 또 다른 삶의 의미를 발견케 하였다. 산행을 했던 동문들도 내려오는 길에 들러서 관람을 하고 합류하여 대절한 버스를 타고 인천연수원으로 향했다.
오후 1시에 인천연수원을 떠났다. 헤어지기 섭섭하여 마지막으로 시내에서 점심을 먹자는 것이었다. 소주를 곁들인 굴국밥으로 점심을 들었다. 우리 테이블에서는 윤인문 동문과 내가 술잔을 기울였다. 낮술이어서 그런지 금방 취기가 올랐다. 오후 2시에 해장국 집을 나와 서로들 작별을 나누었다. 모두들 자주 연락하고, 건강하기를 기원하며 후일을 기약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돌아오는 길에 김태환 동문과 나는 부친상을 당한 한상길 동문의 조문 차 ‘김포 우리병원’에 들렀다. 암 진단을 받은 후 한달 정도되어 별세하셨다는 게 아닌가. 환절기 탓도 있겠지만 연령이 높아질수록 면역력이 떨어진다는 백목사의 말이 떠올랐다.
이제는 동문들로부터 여기저기서 부모상에 대한 부고나 부음을 접할 때마다 자꾸만 아래의 시구가 떠오른다.
樹欲靜而風不止하고 子欲養而親不待라 (나무가 고요히 있고자 하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고자 하되 어버이는 기다리지 않는다)
살아계실 때의 효도가 무엇보다 중요함을 지적한, 숙연해지게 만드는 금언이다.
조문을 마치고 병원 문을 나서니 초겨울로 돌아간 만큼이나 바람이 쌀쌀했다. 그러나 가슴속엔 때아닌 훈훈함이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우리의 솜씨로 일군, 그 언제든 길이 기억될 인고 74회 졸업 30주년 기념행사. 저마다 세월의 여러 구비를 거쳐 살아온 동문들. 30년 만에야 처음으로 만나는 친구도 있고, 자주 모임에서 만나던 친구들도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우리들. 장차 미래의 꿈이 무엇이든 백목사의 말대로 우선 건강부터 챙겨야 할 때다.
인고 74회 파이팅!
도약하라, 영원한 인고 74회 동문들이여!
우정의 깃발을 높이 들고, 가슴을 활짝 열고 노래하자!
너와 내가 아닌 진정 살아서 꿈틀거리는 ‘우리’로 더불어 살아가는 노래를!
삼현아, 영주야, 수만아, 만기야, ......
우리도 부디 건강하게 잘 살아보세!
(2005년 11월 21일)
1년여 기간동안 행사의 총괄기획을 담당하며 힘이 많이 들었습니다.
돈 걷으랴, 행사 준비하랴, 인원 동원하랴.......
다행히 성황리에 잘 끝내고, 주변으로부터 수고 했다는 말과 함께
역시 74회라는 벅찬 칭찬에 동안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는 보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시간에 쫒기고, 여러가지 여건상 동문장학회와 야구후원회에
약속했던 회원가입을 못해 드려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내년도 정규사업으로 전개하여 약속을 지키고자 합니다
이 자리를 빌어 행사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여 주신 선.후배 동문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올리고자 합니다
행사장에 직접 오시지는 못했지만, 저희 74회 행사에 대해 궁금한 동문들을 위해 74회 진우곤
동문이 행사 스케치한 내용을 올리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74회 졸업 30주년 행사 스케치===============
--- 내용이 길다고 투정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오다가다 틈틈이 읽어주시면 됩니다. 이것은 씹고 씹을 만한 추억이 담긴 것이기에 너무 성급히 읽고 치우려는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마시기를 거듭 당부합니다. 급히 먹는 밥은 체할 수 있는 것이기에 ---
무슨 말부터 꺼내야 좋을까. 그것은 가슴이 뜨거워지도록 벅찬 감동을 안겨준, 한편의 아름다운 드라마였다고 하여도 대과가 없을 게다. 흡사 코스모스와 같은 순수와 맑은 우정이 어우러진 시간 속에 지난날의 추억들을 길어 올리며, 서로 얼싸 안고 굳게 잡은 손을 오래도록 놓지 못하는 정다움과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순간들이었다.
인고 74회 졸업 30주년 기념행사가 영종도에 있는 인천연수원에서 2005년 11월 19일 18:00부터 익일 오후 2시쯤 되어서야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우선 본 행사가 원만히 추진될 수 있도록 졸업 30주년 행사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2년여에 걸쳐 지금까지 물심양면으로 헌신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은 김영주 74회 동기회장님 이하 자문위원, 추진위원, 운영위원, 이사, 그리고 찬조 출연진 등등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번 진심어린 감사와 뜨거운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행사 당일 아침부터 가슴이 설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30년이라는 세월이 새로운 의미를 던져주었기 때문이다. 30년이라면 한 세대에 해당하는 세월이다. 향후 40주년, 50주년 행사도 예상할 수 있을 테지만 그것은 차후의 문제다. 30주년 기념행사를 거치고 나서야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 따라서 열일을 제쳐두고라도 기필코 참석해야 한다는 명분이 서는 바람에 더욱 가슴을 설레게 했던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사실 그날 나로서는 저녁에 또 다른 중요한 행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 19시에 문학 작품 심사를 주관해야 하는 입장이어서 아예 며칠 전에 졸업 30주년 기념행사 참여의 당위성을 내세워 심사 불참의 양해를 구할 수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더군다나 같이 가지 않겠느냐는 나의 권유에 아내도 쾌히 따라 나서겠다고 하는 바람에 나는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듯 어깨가 으쓱거려졌다.
아내와 나는 군포에 사는 김태환 동기 내외와 합류하여 행사장으로 향했다. 교통은 원활하였다. 시원스럽게 뻥 뚫린, 나로서는 처음으로 접하는 영종대교를 지나니 영종 공항고속도로 공항 방면 "화물터미널IC" 전방 200m부터 인고 마크가 찍힌 노란색의 현수막이 보였다. 공항신도시로 진입하여 운서2교 밑 통과 후 좌회전하여 가니 약도에서 명시한 대로 인천연수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후 4시 반이었다. 약 2시간 반 가량 걸린 셈이다.
우리로서는 조금 일찍 도착한 편이었다. 먼저 온 준비위원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저마다 맡은 일에 분주한지라 나도 장태한 교수의 출간한 책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 주었다. 시간이 점차 흐르자 동문들이 속속 모습을 나타내었다. 나는 일일이 악수를 하면서 감회가 새로웠다. 힘차게 쥐어지는 악수 속에 진한 우정의 물결이 흐르고, 서로의 포옹 속에 가물가물해지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피어나는 게 아닌가. '너가 진우곤이냐, 어떻게 생긴 놈인지 꼭 알고 싶었는데, 반갑다, 야. 너의 글 맛있게 읽고 있다. 아무튼 놀라워.'하며 저마다 한 마디씩 하는 것이었다. 간혹 상대방의 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아 곤혹스러워하는데 그는 내 이름표를 보며, ‘야, 진우곤, 얼마만이냐.’하고 먼저 악수를 청하기도 해 다행이었다. 아무튼 수많은 동창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헤아려 보니 나와 악수를 나누지 않은 동문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기념행사가 18:30분부터 시작되었다. 졸업 당시 담임 선생님으로는 3학년 1반 이봉재 스승님을 비롯하여 3학년 8반 윤주신 선생님까지 참석하셨으나, 안타깝게도 3학년 4반 담임 이덕석 선생님은 심장 수술 후 건강이 안 좋으신 관계로 안타깝게도 나오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또 그 당시의 학과별 선생님으로는 영어의 이광복 선생님을 비롯하여 생물, 미술, 역사, 지구과학, 교련 및 체조를 담당하셨던 선생님들을 사회자인 서무총무 이인규 동문이 그 때의 추억들을 하나하나 되씹으며 소개할 때마다 배꼽을 쥐게 하여 장내에 웃음바다를 자아내곤 했다. 그것은 잠시나마 우리를 30년 전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어서 새삼스러웠다.
1부 기념행사에서 특기할 것은 74회에서 야구발전을 위한 3,000만원 상당의 야구조형물을 제작하여 바치겠다는 기증서를 가용현 교장선생님께 전달하는 식과, 은사님께 선물 증정, 그리고 자랑스러운 인고인상으로 재미.남가주LA인천고 동문회 부회장이며, 현대병 투병 전문의학 박사로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는 백상진 목사에 대한 수여식이 거행되었다. 승승장구하는 그의 모습이 자랑스럽기 짝없다. 이는 곧 우리 인고인의 위상을 해외에서도 드높인 것에 대한 공로이기에 나무랄 데 없었다. 그리고 차기 회장으로 이상용 동문이 선출되었다. 앞으로 그의 무궁한 발전을 기대하여 마지 않는다.
2부에서는 내.외빈 케이크 절단식과 반별 은사님과의 사진 촬영이 있었다. 그 후 맛있는 식사에 들어갔다. 참석한 인원들을 보니 테이블이 모자랄 정도였다. 대략 200명은 조금 넘어선 것 같았다. 이 정도로도 감지덕지라 아니할 수 없다. 사노라면 어찌 자기 입맛에만 맞는 떡이 있겠는가. 마음은 있어도 불가피한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한 동문들이 많을 게다. 그들이 어디 있든지 간에 그들의 마음도 우리와 동일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특히, 먼저 유명을 달리한 친구들, 멀리 이국 땅에서 오지 못한 친구들을 생각하면 안타깝고 아쉬운 맘 금할 길 없다.
3부는 다채로운 축하공연으로서 분위기를 돋우었다. 인천여고 동문 합창단의 아침이슬 같은 맑고 고운 음성이 실내의 분위기를 사로잡았다. 뒤이어 살사 댄스, 초대 가수의 노래 등이 열기를 고조시켰다. 특히 강정득, 채호식 듀엣 공연은 완전히 젊은 시절을 되찾게 하였다. 우리 학창시절의 애창곡이 강정득 동문의 노래와 통기타 연주에 실려질 때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께 따라 불렀다. 술잔을 높이 들며 건배를 하기도 하고, 일어서서 삥 둘러 어깨 동무를 서슴지 않았다.
그것은 밤하늘을 아름답고 화려하게 수놓는 폭죽의 터짐처럼, 벅찬 감동의 물결이 넘실대는, 그야말로 살아서 꿈틀거리는 장엄한 한편의 교향곡이었다. 아니, 쌀쌀한 날씨조차 녹이는 시뻘겋게 달구어진 용광로 같은 열기라 아니할 수 없었다. 가슴속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너와 나를 떠난 우리의 외침이 멋들어지게 절묘한 화음으로 빚어낸, 진정 살아있는 것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몸부림이었다.
그 이후 자정이 넘어설 때까지 스승과 제자, 동문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시간을 가졌다.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가운데 춤과 노래가 뒤엉켰다. 젊음의 발산과 허심탄회하게 쏟아내는 인생살이의 갖가지의 모습들. 누구는 건강이 안 좋다는 슬픈 소식, 사업에 실패하여 곤경에 빠져있다는 것, 자녀와 부모의 문제 등등 인생을 어느 정도 아는 나이에 직면하는 우리의 공통적인 문제요 관심사들이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서로의 건강을 챙기자며 입을 모았다. 그래야 40주년 기념행사에 나올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공식적인 행사는 아쉬움을 남긴 채 자정이 훨씬 넘어 끝났고, 저마다 정해진 숙소에 들어갔다. 술을 더 마실 사람들은 별도의 방을 지정해 주었다. 피곤이 엄습해왔다. 어떻게 잤는지 모르게 아침에 일어나니 6시 반쯤이었다. 몇몇 먼저 일어나 밖으로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밖에 나가보니 아침 일찍 떠나는 동문들이 여럿 있었다. 후일을 기약하며 악수를 나누거나 어깨를 툭툭 쳤다.
아침은 8시에 있었다. 시원한 콩나물국이 속 풀이에 그만이었다. 남은 인원은 부부동반 합쳐 45명 정도가 되었다. 조식이 끝난 후 백상진 목사와 함께 조촐하게 주일 예배를 가졌다. 그의 성경 역대하 32장 7절로 8절의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였는데 고난과 시련의 극복 방법으로서 긍정에 인생을 걸라는 것과 믿음은 육체의 메커니즘을 변화시킨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 예로 근위축병에 걸린 ‘안젤라’ 양이 승리한 긍정 인생은 감동적이었다. 다양하고 구체적인 예를 하나하나 들어가며 열정과 힘이 실린 그의 설교는 옷깃을 여미고, 코끝이 찡해질 정도로 심금을 울리는 명 설교였다.
예배에 뒤이어 백목사의 50세에 절실한 현대병 예방법 강좌는 참으로 유익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의학적인 새로운 지식과 더불어 생활 습관의 중요성을 인식시켜 주었다. 특히, 암세포가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은 놀라웠다. 무엇이 그것을 증식시키는 것인가에 대한 규명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았다. 아무튼 그 어느 때보다 미래와 건강을 중요시해야 하는 기로에 선 우리에게 그의 유머를 곁들인 알차디 알찬 강좌는 수시로 웃음을 자아냈고, 박수갈채를 받았다. 먼 길을 마다하고 행사에 참석해 준 성의도 놀라운데 동문들에게 적시에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니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오전 10시 반. 행사계획으로는 백운산으로의 산행이 잡혀 있었으나 두 부류로 나누어 백운산으로의 산행과, 윤인문 동문이 근무하는 인천교육과학연구원 관람으로 행사가 진행되었다. 나는 아내와 함께 인천교육과학연구원 관람을 택했다. 윤인문 동문의 배려와 안내로 좋은 관람을 할 수 있었다. 특히, 천문별자리 여행은 또 다른 삶의 의미를 발견케 하였다. 산행을 했던 동문들도 내려오는 길에 들러서 관람을 하고 합류하여 대절한 버스를 타고 인천연수원으로 향했다.
오후 1시에 인천연수원을 떠났다. 헤어지기 섭섭하여 마지막으로 시내에서 점심을 먹자는 것이었다. 소주를 곁들인 굴국밥으로 점심을 들었다. 우리 테이블에서는 윤인문 동문과 내가 술잔을 기울였다. 낮술이어서 그런지 금방 취기가 올랐다. 오후 2시에 해장국 집을 나와 서로들 작별을 나누었다. 모두들 자주 연락하고, 건강하기를 기원하며 후일을 기약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돌아오는 길에 김태환 동문과 나는 부친상을 당한 한상길 동문의 조문 차 ‘김포 우리병원’에 들렀다. 암 진단을 받은 후 한달 정도되어 별세하셨다는 게 아닌가. 환절기 탓도 있겠지만 연령이 높아질수록 면역력이 떨어진다는 백목사의 말이 떠올랐다.
이제는 동문들로부터 여기저기서 부모상에 대한 부고나 부음을 접할 때마다 자꾸만 아래의 시구가 떠오른다.
樹欲靜而風不止하고 子欲養而親不待라 (나무가 고요히 있고자 하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고자 하되 어버이는 기다리지 않는다)
살아계실 때의 효도가 무엇보다 중요함을 지적한, 숙연해지게 만드는 금언이다.
조문을 마치고 병원 문을 나서니 초겨울로 돌아간 만큼이나 바람이 쌀쌀했다. 그러나 가슴속엔 때아닌 훈훈함이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우리의 솜씨로 일군, 그 언제든 길이 기억될 인고 74회 졸업 30주년 기념행사. 저마다 세월의 여러 구비를 거쳐 살아온 동문들. 30년 만에야 처음으로 만나는 친구도 있고, 자주 모임에서 만나던 친구들도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우리들. 장차 미래의 꿈이 무엇이든 백목사의 말대로 우선 건강부터 챙겨야 할 때다.
인고 74회 파이팅!
도약하라, 영원한 인고 74회 동문들이여!
우정의 깃발을 높이 들고, 가슴을 활짝 열고 노래하자!
너와 내가 아닌 진정 살아서 꿈틀거리는 ‘우리’로 더불어 살아가는 노래를!
삼현아, 영주야, 수만아, 만기야, ......
우리도 부디 건강하게 잘 살아보세!
(2005년 1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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