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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미소(美蘇) 상징물/조우성(6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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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05.10.17)
인천의 미소(美蘇) 상징물 / 조우성 시인
인천에는 외국과 관련된 대표적인 기념물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1957년 9월 만국공원에 건립한 맥아더 장군 동상이고, 다른 하나는 2004년 2월 연안부두에 세운 ‘제물포 해전’ 추모비이다. 두 기념물은 공교롭게도 한민족 분단에 일단의 책임이 있는 미소(美蘇) 양국의 근현대사와 관계가 있는 것들로, 양국은 모두 이를 중요한 ‘국가 상징물’로 여기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러시아는 2002년판 역사 교과서에도 제물포 해전을 소개할 만큼 그 전사자들을 ‘영웅’으로 치켜세워 왔고, 그를 소재로 한 영화와 노래까지 만들어 보급해 국민 대부분이 ‘적에게 건네지 않는다’는 노래를 부를 정도라 한다. 1959년에는 ‘바략 호’의 함장 르도네프의 동상을 콤소몰 공원 광장에 건립했고, 1989년에는 100년 전의 패배를 설욕하겠다는 듯 최신형 순양함의 이름을 ‘바략 호’라 명명한 바 있다.
‘제물포 해전’ 전사자들이 러시아의 ‘국가 영웅’이라면, 맥아더는 미국인들의 영웅이었다.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는 요지의 명연설을 남기고, 그가 ‘사라져 갈 때’ 미국 국민들이 그에게 보낸 찬사와 경의(敬意)는 현직 대통령의 시기(猜忌)까지 살만한 것이었다. 미국의 노포크에는 그의 기념관이, 인천에는 그의 동상 건립되었고, 더불어 그에 의해 ‘자유’를 찾게 되었다는 뜻으로 동상 건립지인 ‘만국공원’을 ‘자유공원’이라 고쳐 불렀다.
두 기념물을 건립 취지에서 본다면, 러시아 추모비가 동북아에서의 미국세의 퇴조와 때를 맞춰 재기를 꿈꾸는 러시아의 집요한 요청과 우리 정부의 ‘외교적 실수(?)’로 탄생한 ‘역사적 사생아’라면, 맥아더 장군 동상은 시쳇말로 적어도 ‘국민적 합의’라는 과정을 거쳐 우리 스스로가 뚜렷한 ‘시대적 명분’을 가지고 세운 국가 기념물의 하나라는 점에서 크게 다른 것이다.
러시아 추모비 건립은 주한 러시아 대사관 무관(武官) 모(某) 대령이 인천을 방문한데서부터 시작됐다. 그는 ‘바략’ 호와 ‘코리예츠 호’ 수병들의 시신이 어디에 묻혔는지를 물었고, 더불어 수병들의 장례와 치료에 도움을 준 인천 사람들에게 감사한다는 말을 장황하게 해 필자를 비롯한 좌중을 당황케 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당시 전사자들은 자폭 직전 ‘바략’호에 안치돼 해군예(海軍禮)에 따라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인천 앞바다에 수장(水葬)됐으며, 부상자들은 일본군에 인계되어 치료를 받았다. 다만 부상자 중 일본으로 후송되기 전에 사망한 2명만이 인천 만석동 외국인 묘지에 매장되었을 뿐이다. 인천 사람들은 그 때 러시아인들을 돕기는커녕 제 운명이 어떻게 바뀔지도 모른 채 속수무책으로 그들의 각축만을 바라보던 처지였다.
그런데 2003년 10월 APEC 정상회담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주한 러시아 대사관 무관과 같은 내용의 말로써 노무현 대통령에게 한국민에 대한 사의(謝意)를 표하며 ‘제물포해전’을 기념하는 비(碑)를 전쟁 100년을 맞아 인천에 세웠으면 한다고 의사를 타진했고, 대통령은 이를 외교 특보의 자문을 받아 승낙했다는 것이다. 그 후 국가 정상 간의 약속에 따라 일사천리로 연안부두에 추모비가 세워졌음은 물론이다.
반면에, 1957년도의 여러 신문을 종합해 보면, 맥아더 장군 동상 건립은 애초 내무부의 발의로 시작됐지만 곧바로 국민들이 동참할 수 있도록 동상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됐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모금을 시작해 그 해 9월 15일‘거국적인 제막식’을 거행했음을 알 수 있다. 모금에는 학생, 시민, 공무원, 군인 등과 일부 외국인들이 동참했고, 대다수 국민들이 이를 쌍수를 들어 환영했던 6?25전쟁 직후의 ‘국가사업’이었음이 드러나 있다.
‘제물포 해전’ 추모비가, 제국주의 러시아가 우리를 지배하겠다고 그 경쟁국인 일본과 다투던 전쟁을 기념케 해 준 ‘어처구니없는 상징물’이라면, 맥아더 장군 동상은 그가 국제연합의 사령관으로서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저지하는 데 기여한 인물이라는 점을 기렸다는 데서 근본적으로 명확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정부는 정작 국가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허가해서는 안 될 ‘제물포 해전’ 추모비는 흔쾌히 건립을 허가하고, 그 과정을 거들어 준 반면, ‘맥아더 동상 철거 캠패인’에 대해서는 한동안 수수방관해 왔다는 인상이 짙다. 무엇이 그 같은 선택을 하게 한 동인(動因)이었는지는 앞날의 연구 대상이 되겠지만, 국민들은 매우 혼란스럽기만한 것이다.
종이신문정보 : 20051017일자 1판 4면 게재
인터넷출고시간 : 2005-10-16 오후 5: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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