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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게임을 향한 산뜻한 출발/조우성(65회)(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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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05. 9. 9)
아시안게임을 향한 산뜻한 출발
/ 조우성 시인
인천은 우리나라 스포츠 발전에 인상적인 발자취를 남긴 유수한 고장이다. 영국에서 태동한 근대 축구를 인천항을 찾은 군함 ‘플라잉 피쉬(Flying Fish)’ 호의 수병들을 통해 처음 받아들였고, 미국에서 탄생해 일본으로 전해진 ‘야구'를 인천영어야학교 학생들에게 익혀 한국 야구 100년의 기원을 세웠던 것이다.
그렇듯 근대 스포츠는 개화기 당시 선교사, 군인, 학생, 교사, 외교관 등에 의해 인천에 전해졌으나, 척박한 토양 위에 뿌려진 씨앗이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려 오롯이 꽃을 피우기까지는 우리의 근현대사처럼 수많은 파란을 겪어야 했다. 그 시절 ‘룰’에 맞는 변변한 시설이나 기구, 운동화, 유니폼이 있을 리 없어 선수들은 짚신 신고 망건을 쓴 채 경기를 벌였고, 더구나 평평하게 고른 운동장 한 곳이 없어 이곳저곳의 공터를 찾아다녔던 것이 초창기 인천 스포츠의 모습이었다.
“本月 二十九日 上午 十時 仁川府 官公私立 各學校가 春期 聯合大運動會를 本港 松林洞 後園에서 設行한다 하더라.” 1908년 4월 25일자 황성신문에 게재된 이 인천발 단문(單文) 기사는 그 때 이미 각급 학교의 대운동회가 봄가을에 열렸고, 운동장으로는 송림동의 ‘후원(後園)’을 이용하고 있었음을 알게 해 준다. ‘후원’이 오늘날 정확히 어디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웃터골 운동장’이 설치되기 훨씬 전부터 스포츠 활동이 활발했음을 전해 주고 있다.
인천 스포츠의 산실인 ‘웃터골 운동장’이 비로소 문을 연 것은 1920년 11월이었다. 1926년에 6천400여 평으로 확장한 이 운동장의 공식 명칭은 ‘인천공설운동장’이었는데 학교 운동회, 부민체육대회를 비롯해 당시 크게 유행했던 야구, 정구와 축구, 씨름, 활쏘기 등 온갖 경기가 펼쳐졌고, 그 때마다 웃터골은 부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특히 경인기차통학생이 주축이 된 한용단(漢勇團) 야구팀이 미나토(港), 미신(米信), 인천세관 등 일본 팀을 격파할 때면 그 환호성이 마치 만세 소리처럼 하늘을 찌를 듯햇고, 종종 일본인 심판이 편파 판정을 할 때면 온 관중이 격렬히 항의를 한 끝에 많은 이들이 경찰에 붙잡혀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는 것이다. 웃터골 운동장은 항일(抗日) 스포츠의 본거지이자 인천의 청년들이 가슴에 품었던 울분과 패기를 스포츠로써 승화시켜나갔던 정신적인 도장(道場)이기도 했다. 그러나 1934년 인천부립중학교에 자리를 내주고, 도원동으로 옮겨 가면서 그 전성기는 막을 내리고, 스포츠를 단지 식민 통치의 강화 수단으로 전락시킨 암울한 시기가 계속되었다.
스포츠를 순수하게 스포츠로써 누리기 시작한 것은 광복 후, 인천공설운동장을 속칭 ‘그라 운동장’으로 불렀던 때부터였다. 모든 것이 열악했지만 원로 스포츠인들이 앞장서 부평 에스컴사령부 등의 도움으로 운동장을 확장, 개수하고 각종 시설과 기구를 보급해 학교와 사회의 스포츠를 부흥시켰던 일은 실로 눈물겨운 분투였다. 그 무렵 인천고와 동산고 야구팀이 전국을 제패하고, 인천공고의 육상과 럭비가 발군의 실력을 보였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나 도원동 ‘그라 운동장’은 2002년 월드컵 개최를 계기로 인천 스포츠 사의 바톤을 문학경기장으로 넘겨주게 되었다. 송림동 후원에서 출발해 웃터골 운동장, 도원동 그라운동장을 거쳐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스포츠의 요람을 우리 손으로 건설해 냈다는 것은 대견한 일이었고,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던 것 역시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더구나 금년 들어서는 아마프로를 망라한 인천 야구, 축구팀들이 선전을 거듭했고, 며칠 전 막을 내린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 또한 ‘역대 최고의 대회’였다는 찬사를 받기에 이른 것이다. 한 세기 전, 이 땅에 뿌려진 스포츠의 씨앗들이 온갖 풍상 속에서도 꿋꿋이 자라나 이 가을 바야흐로 만개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번 대회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행사 참여, 자원 봉사자들의 헌신적 노고, 대과 없는 경기 진행 등이 돋보였는데 이 모든 것은 시민들이 합심해 가꾼 향토애의 결실이었다는 생각이다.
다만, 옥의 티가 있었다면, ‘북측’에 지나치게 신경을 쏟은 나머지 ‘저희 민족끼리만 놀더라.’는 인상을 아시아 이웃들에게 주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과공(過恭)도 비례(非禮)이지만, 손님을 청해 놓고 상대적으로 홀대를 했다면 그 또한 주인 된 도리가 아니다. 물론 그런 흠결이 ‘이번 대회가 스스로 놀랄 만큼 성장한 내 고장 인천의 총체적 역량 발로요, 아시안게임 유치를 향한 산뜻한 출발이었다.’는 평가를 지울 수는 없을 것 같다.
종이신문정보 : 20050909일자 1판 5면 게재
인터넷출고시간 : 2005-09-08 오후 4:4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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