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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고학생들의 항일투쟁기(상)(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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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05. 7. 7)
<< 광복 60년 인천의 항일 운동사 >>
17.인천상고학생들의 항일투쟁기(상)
- 광주학생운동 동조 동맹휴학 결행
- 거리시위 경찰저지로 좌절
- 주도 33명 무기정학 . 9명은 구류 처분
- 조선. 동아일보 사건전말 세세히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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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고의 항일투쟁 정신은 수많은 학생들이 퇴학당하고, 죽음으로 내몰려도 꺽이지 않았다. 위 사진은 1929년 인천공립상업학교 제15회 졸업생 기념사진이다>
1929년 11월3일 전라도 광주에서는 대규모의 학생시위가 일어난다. 그해 10월3일 광주중학교에 다니는 일본인 학생들이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한데서 촉발된 이 사건은 일제의 보도통제에도 불구하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전국적인 항일시위로 발전된다.
수 많은 학생들이 이 사건으로 연행되거나 구속됐고, 사회운동단체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열풍을 불러오긴 했지만 3·1운동때와 달리 청년학생들은 적극적이고 심화된 반인·항일의식을 표출했다.
인천에서 또한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인천상업학교(현 인천고) 학생들은 1920년12월13일 동맹휴학을 결행하고, 이듬해 1월17일에는 280여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수십명이 검거되고 퇴학처분을 받았으나 인천상업학교 학생들의 항일의식은 꺾이지 않았다.
1930년1월21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인천상업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를 주도한 학생 33명에 대한 학교당국의 무기정학 결정을 보도한다. 이 사건으로 12명이 일본경찰에 붙잡혀, 이 중 9명이 10∼20일간 구류조치됐다.
광주학생운동은 일제의 철저한 보도통제에도 불구하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전국으로 퍼졌다.
인천상업학교에도 이 소식은 어김없이 전해졌고, 마침 방학 중이라 고향인 전라도 광주에 내려갔다가 다시 인천으로 돌아온 유학생들을 통해 사건의 전모가 상세하게 드러난다.
언론은 편파보도를 일삼았고, 일제는 ‘학생 간에 벌어진 사소한 분쟁을 일부 공산주의자와 불온분자들이 선도한 결과’로 선전하며 사건의 확산을 막았다.
그러나 혈기왕성한 젊은 학생들의 움직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인천상업학교 학생들은 12월13일 광주학생들에 호응하는 동맹 휴학을 결의한다.
이듬해인 1930년 1월17일 교내에서 만세시위를 시작, 교문밖으로 진출을 시도한다. 18일 동아일보와 19일 조선일보는 이 소식을 상세히 보도한다.
동아일보는 이날 경성, 인천, 원산, 진주 등 각지의 만세시위 소식을 전하며, “인천상업학교 생도 280명이 17일 아침 9시30분에 대강당에 모여 만세를 고창하고 전교생들이 모두 열을 지어 밖으로 나오려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의 기사를 요약하면 “지난해 12월13일 동맹휴학 당시 5명이 반대한 일이 있었다. 학생검거 바람이 각지에서 다시 불자, 학생들의 동요가 다시 시작됐다. 이날 학생들은 반대학생 5명과 다투고 이어 만세를 고창했다. 정사복 경찰이 들이닥쳐 16명을 검거했다”고 보도했다.
검거된 학생들은 밤샘조사를 받았다. 학교는 4학년 김경운, 신필수, 김형일, 3학년 송영갑, 이형칠, 하요한, 박창서, 김병용, 2학년 김종혁 등 9명에 무기정학처분을 내렸다.
인천고 100년사에 당시의 긴박한 상황이 노근형(인상 20회·당시 1학년)씨와 한국인 교사 이원옥씨의 증언으로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노근형씨는 “선생님들이 들어오기 전에 상급생이 강당에 있던 탁구대를 들어서 출입문을 막아버리는 (중략) 한 상급생이 연단에 올라 (중략) ‘다같이 일어나자’고 힘창 웅변을 했다. (중략) 교장이 문을 열라고 호통을 쳤다. 어느새 왜경이 밀려들기 시작했고 상급생 십여명이 검거되는 뼈아픈 광경을 보아야 했다”고 말했다.
이원옥씨는 “인천경찰 형사대가 화물 자동차를 교정에 대고 교실에 난입하기 시작했다. 주모자 색출에 혈안이 됐던 것이다. 교장이 진화에 나서며 경찰들에게 교문 밖으로 나가라고 말했다”고 전했지만 학생들의 희생은 끝내 막을 수 없었다.
일본 경찰의 검거활동은 17일 밤으로 이어져, 2명을 더 붙잡아 조사한다.
광주학생운동은 1929년 11월3일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항쟁이다. 서울에서는 1930년 1월17일까지 이어졌고, 경기도 지역은 1월9일 시위가 일어났다. 전라도에서는 1월20일 전후 시위를 또다시 계획하다 무산됐고, 경상북도에서는 1월 중순까지 시위가 벌어졌다. 충청도, 강원도와 함경도, 평안도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동아일보는 1월17일자 신문에 “1월15일 대검거 이후에도 만세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고 보도한다.
학교는 이날 시위와 관련해 모두 33명에 대해 무기정학을 내렸다. 이후 1월28일자로 15명에 대해선 정학을 해제하고 4학년 이두옥, 김영순, 신대성, 고원건을 비롯한 12명에 대해서 퇴학처분을 내렸고, 나머지 학생들은 무기정학을 그대로 유지했다.
3·1운동 당시 인천보통학교(현 창영초) 학생과 함께 만세운동을 벌인 인천상고 학생들의 항일투쟁은 면면히 이어진다. ‘광주학생운동’을 비롯, 학급지 프린트 사건 등이 발생했고, 일본인의 인천남상학교와 한국인의 인천상업학교가 합병된 이후에도 항일투쟁은 계속됐다. 인천상고 27회 졸업생 동기 중 11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김주희기자 blog.itimes.co.kr/kimjuhee
종이신문정보 : 20050707일자 1판 9면 게재
인터넷출고시간 : 2005-07-06 오후 6: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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