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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고 학생들의 항일투쟁기(하)(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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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05. 7.14)
18.인천상고 학생들의 항일투쟁기(하)
1941년 비밀회동·집회 39회 동기 15명이 옥사.병사로 생애 마쳐
- 日교장 명령 거부 비밀리에 졸업앨범 제작
- 불심검문서 '독립주장' 편지 덜미 전원 연행
- 후배들 추모비 세워 고인들의 항일정신 기려
슬프도다 우리 민족아/ 4천여 역사국으로/ 자자손손 복락하더니/ 오늘 이 지경 웬말이냐/ 철사 주사로 결박한 줄은/ 우리의 손으로 끊어버리고/ 독립만세 우뢰 소리에(망국가)
최초의 항일 투쟁은 1905년 11월8일 을사늑약이 있던 이듬해, 동맹휴학으로 나타난다.
당시 인천일본어학교 2학년에 재학중이던 이원옥씨가 ‘인고백년사’에 밝힌 내용을 보면, ‘주권을 빼앗긴 슬픔이 온 나라를 뒤덮고 있었던, 그 해 동지달도 다 지나간 때’ 그를 비롯한 김삼, 이장춘 등은 등교길에 학교 간판을 부수고 수업을 거부를 주동한다. 이날 수업거부는 1·2학년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이들은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판국에 일본어는 배워서 무엇하겠는가. 우리가 일본의 노예가 되려고 일본말을 배우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라고 외쳤다.
일제의 조선인 교육정책은 철저하게 동화(同化)와 노예화에 촛점이 맞춰졌다.
나라를 잃고 ‘황국신민’을 강요받은 학생들의 울분은 적지않았을 터. 교장 선생이 떨리는 목소리로 일본 국왕의 ‘교육칙어’ 읽어내려갈 때 학생들은 비웃음을 흘렸고, 망국가와 근학가를 부르며 힘을 키우자고 다짐했다.
1919년 3월1일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전국 방방 곳곳에 울려퍼졌다. 3월6일 인천보통학교(현 창영초) 학생들이 만세시위를 벌였고, 다음날 인천상업학교 학생들은 동맹휴교를 결행한다.
학생들이 시작한 만세운동은 삽시간에 인천전역에 퍼져, 인천부내에 독립신문이 배포되는 가 하면, 만국공원에서는 기독교 신자들이 중심이 돼 만세운동을 벌였다. 인천부내 거의 모든 상가들이 철시하자 당시 신문들은 ‘행변의 파도 소리만 시가지를 울렸다’고 전하기도 했다.
인천상업학교 학생 280여명은 3월17일 강당에 모여 만세를 불렀고, 주동자 17명이 경찰에 붙잡혔다.
1929년 11월3일 광주에서 젊은 학생들의 항일시위가 벌어졌다. 일본인 학생의 조선인 여학생 희롱사건이 빌미가 돼 벌어진 ‘광주학생운동’은 일제의 보도 통제에도 불구하고 입에서 입으로 전국에 퍼졌다. 식민지 교육에 억눌려 살아야 했던 전국의 젊은 청년들이 분연히 일어섰다.
인천상업학교 학생들도 광주에서 유학온 친구들의 입을 통해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되고, 12월13일 동맹휴교에 들어갔다. 이듬해 1월17일 280여명의 학생들이 강당에서 만세를부르고 교문밖으로 진출하려다 경찰에 저지당했다. 이 일로 16명이 경찰에 붙잡혔고, 12명이 퇴학처분 당한다.
일명 ‘학급지 프린트 사건’이 터진 것은 1931년 여름방학이 끝난 후다. 학생들은 비밀리에 ‘학급지’를 만들었다. 여름·겨울 방학을 앞두고, 원고를 받아 등사해 일본인 교사들 몰래 학생들끼리 나눠봤다. 이 학급지는 주로 대한의 독립과 민주주의, 조국의 미래 같은 주제로 채워졌다.
별탈 없이 만들어 배포해 오던 ‘학급지’가 일본 교사들에 발각됐다. 경찰이 알기전에 학교측에서 미리 손을 써 크게 확대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인천은 개항장이다. ‘백여 조선인보다 한 개 일인의 갓이 더 큰’(시대일보 1925년 11월6일자)것을 몸으로 경험한 곳이다. 인천은 다닥다닥 초가산간이 밀집된 조선인 거주지 건너, 신식 건물로 깨끗하게 조성된 일본인 동네가 마주한 곳이었다.
지배자 행세를 하던 일본인 학생들과의 잦은 마찰은 불가피했다. 남상업학교와 합병된 이후 학교안에서는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들간 싸움이 빈번했다. 학교는 ‘한일 학생이 싸움을 벌이면 퇴학처분한다’는 규정을 만들 정도였으니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학년당 50명뿐인 조선인 학생들은 2배나 많은 일본인 학생들을 제치고 언제나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다. 그러나 문제학생으로 낙인찍힌 것은 조선인 학생이었다.
런던 올림픽 레슬링 부문 6위를 차지한 김영석씨는 4학년때 일본인 학생을 괴롭힌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했다. 일본인 교사들의 차별대우에 동맹휴학을 모의한 학생들이 대거 퇴학되는 일도 있었다. 학교 규율지휘자로 일본인 하급생의 잘못을 지도한 일이 오히려 “일본인 학생을 때린 것은 내선일치 정책과 어긋난다”고 받아들여져 무기정학 당하는 일도 있었다.
1940년 일제는 조선의 이름을 버리고, 일본식으로 바꾸라는 일명 ‘창씨개명’을 강요한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창씨개명’을 ‘姓을 갈 개자식’이라며 비하하기도 했다. ‘창씨개명’에 끝까지 저항한 정구택씨는 졸업장조차 받지 못했다.
이 정구택씨의 졸업동기(인상 27회·통합 39회)들은 졸업을 앞두고 모두 경찰에 연행되는 일이 벌어졌고, 이 들 중 15명이 유명을 달리하는 아픔을 겪어야했다.
소수인 조선인 학생들은 비밀리에 친목회를 만들어 우의를 다졌다. 졸업을 앞두고 학생들은 사진을 교환하고, 졸업앨범을 만들어 간직하기도 했다. 학교측도 이를 묵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학교측이 돌연 39회 졸업생들에게는 이를 불허했다.
사건의 발단은 학생들이 이를 거부하고 몰래 앨범을 만들어 나눠가진 일이 알려지면서부터다. 일본인 교장은 학생들을 힐난했고, 이에 동문들까지 나서 일본인 교장 추방운동을 벌였다. 그러다 1941년 1월10일 충북 영동경찰서에 39회 졸업생들이 체포되기에 이른다.
39회 졸업생들은 일본인 교장이 앨범 제작을 불허하자, 부처산(현 재능대)에서 항일정신을 북돋는 집회를 하고, 비밀리에 앨범을 만들었다. 이들의 동기동창 중 명치대 법과대에 다니던 송재필의 친구가 송재필의 사진과 편지를 지니고 있다가 충북 영동 기차 정거장에서 불심검문을 당하게 된다. 편지의 내용이 문제됐다. 대한독립과 인상시절의 우국충정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로 인해 정구택씨를 비롯해 24명이 구속됐다. 이들은 조사과정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 후유증으로 가재연, 고윤희. 정태윤, 김여수 등 4명이 옥사했다. 석방된 사람들도 온몸이 퉁퉁붓고, 요독증에 시달리다 11명이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1986년 정부는 가재연, 김여수, 정태윤 등 3명에 대해 독립유공자로 서훈했다.
그들을 추모하는 비가 현재 인천고 체육관 앞에 서있다.
김주희기자 (블로그)kimjuhee
종이신문정보 : 20050714일자 1판 8면 게재
인터넷출고시간 : 2005-07-13 오후 6:3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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