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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번 교명 바뀌어 '인천고'로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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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05. 7. 14)
1895년 한성외국어학교로 출발
첫 졸업생은 9명....여섯번 교명 바뀌어 '인천고'로
1895년 2월, 고종은 교육칙어(敎育勅語)를 내리면서, 경전 중심의 교육을 지양하고, 세계정세 눈을 뜨게하는 새로운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교사 양성을 목적으로 정부는 1895년 4월 현대식 학교법규인 한성사범학교관제를, 이어 5월10일에는 외국어 교육을 위한 학교 관제를 공포한다. 관립한성외국어학교 관제에 따라 수업년한 4년의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인천지교가 6월27일 개교한다. 인천 내리 85번지, 인천감리서(仁川監理暑) 자리다.
처음 30여명 정도로 출발했지만, 교육여건이 썪좋지 못해 학생들이 빠져나가 1898년 5월25일 첫 졸업자는 9명에 불과했다. 재정난이 심화되고, 신교육에 점차 줄어 신입생 모집에 애를 먹었다. 1902년 배출한 두번째 졸업생은 단 1명뿐이었다.
1904년 관립 인천일본어학교로 교명이 바뀌지만, 실업 교육 등 전문교육에 대한 사회적 필요성에 의해 1909년 3월24일 관립 인천실업학교로 개편된다. 이에 앞서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 체결로, 이듬해 최초의 동맹휴학이 이뤄진다.
1912년 4월1일 인천공립상업학교로 개편됐다.
1919년 2월20일부터 학생교복을 착용한다. 그해 3월1일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3월7일이 동맹휴교에 나선다. 3월17일 학교안에서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벌인다. 이일로 7회 졸업생들은 졸업식 없이 졸업해야했다.
1922년 3월31일 송림동에 교사를 신축, 이전한다. 지금의 송림초등학교자리다. 1929년 12월13일 광주학생의거에 동참. 동맹휴학을 벌였고, 이듬해 1월17일 다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1933년 4월1일 일본인학교인 인천남상업학교와 합병됨으로써 한·일 공학이 시작됐다. 율목동 남상업학교로 학교를 이전한다. 1934년 항일 동맹 휴학 주동자 10명 집단 퇴학당했다.
1941년 인상 27회 졸업생 24명이 항일운동을 벌여 투옥됐고, 고문으로 인해 이 중 4명이 옥사하고, 11명이 석방이후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1945년 8월15일 광복이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3월7일 인천상업중학교에서 인천고등학교로 승격됐다. 그해 10월17일 인천고등학교가 개교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김주희기자 (블로그)kimjuhee
종이신문정보 : 20050714일자 1판 8면 게재
인터넷출고시간 : 2005-07-13 오후 6:3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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