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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두 고등학교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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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신문(11. 2.16)
김윤식의 인천산책
'관학의 효시' 인천고 … '한국의 이튼' 제물포고
인천의 두 고등학교
조우성(趙宇星)의 저서 『인천 이야기 100장면』은 인천 역사적 사건 중에서 대표적인 것 100가지를 추려 간단한 이야기 형식으로 쓴 책이다. 그 중에 ‘관학의 효시 인고, 한국의 이튼 제고’라는 제목으로 인천의 고등교육 기관에 대해 언급한 것이 있다.
그러니까 학교 역사에 관련해서는 인천 최고(最古)의 연륜을 가진 인천고등학교와 한때 인천 최고(最高)의 두뇌 집단으로 ‘제고 신화(神話)’를 창조해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제물포고등학교, 이 두 학교에 대한 기록이다. 인천의 여러 고등학교 중에서 유독 이 두 학교만을 거론한 것은 바로 이런 대표적인 특성을 통해 인천의 학교 이야기를 축약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인천고등학교는 인천 교육사에 있어서 관학(官學), 곧 ‘국공립학교’의 효시이다. 물론 현재의 인천고등학교
인천고등학교 전경
가 직접 효시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전신인 한성외국어학교인천지교(漢城外國語學校仁川支校)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외국어 학교는 1895년 5월 10일 고종황제가 칙령 제88호로 ‘외국어학교관제’를 공포함으로써 생긴 학교이다.
당시 생긴 외국어학교 종류를 보면 일어, 영어, 법어(法語, 불어), 덕어(德語, 독일어), 한어(漢語), 아어(俄語, 러시아어) 등이었는데, 이렇게 외국어학교를 세우게 된 것은 개항 후 서구 문물에 대해 무지했던 정부가 ‘돌아보건대 시국은 크게 바뀌었다. 범백제도(凡百制度)가 다 함께 새로워야 하지만 영재 교육은 가장 급한 일’로서 ‘장차 무(務)를 알아 시(時)를 구하고, 내수(內修)와 외교에 각각 적용시키려 한다’는 자각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칙령 공포와 거의 동시에 인천에 외국어학교 지교가 생긴 것은, 인천항이 외세가 드나드는 제1 관문으로, 인천항감리서의 통상사무라든가 개항장재판소, 해관(海關) 같은 각국 외국인 상대 정부기관에 필요한 외국어 가능 인재 양성이라는 시급하고 절실한 소용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학교가 처음 문을 연 것이 바로 그 해 6월 27일, 내리(현 중구 내동) 인천감리서 자리에서였다. 오늘날의 내동 85번지로서 과거 서울지방법원 인천지원(1979년에서 1983년까지는 수원지방법원 인천지원 편제였다.)과 뒤이어 대한준설공사가 있던 곳이다. 지금은 한진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인천항 감리 박세환(朴世煥)을 교장 겸임으로 해서 감리서 내 경찰관 사무실을 빌어 30여 명의 학생으로 개교한 4년제 이 학교는 처음부터 일어를 중심으로 출발한 듯하다. 이 인천지교가 ‘당시 감리 박세환과 인천 주재 영사 진다[珍田捨己]가 주선하여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의 찬의를 얻어 정부에 품의하여 개교를 하게 되었다’는 『인고100년사』의 기록이 그 사실을 짐작케 한다.
1898년 5월 25일 첫 졸업생은 9명이었다. 1900년 6월 1일에 일어 야간 속성과를 부설하고 학생 27명을 모집했는데 그 다음 해에 고작 1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1904년 4월 20일에는 명목뿐인 외국어학교에서 막강해진 일본의 위세를 반영하듯 수업 연한 3년의 관립인천일어학교로 개칭되었다. 이로써 한성외국어학교인천지교는 1906년 마지막 졸업생을 배출하기까지 정규 졸업생 33명을 배출한다. 1907년부터는 관립인천일어학교의 졸업생이 된다.
1909년 다시 관립 인천실업학교로 개명하여 상업 중심의 실업학교로 출발했다가 1912년에 이르러서는 완
관립인천일어학교
전한 3년제 인천공립상업학교로 바뀌면서 인천공립상업학교는 전국의 수재가 모여드는 명문 상업학교로 부상한다. 이 학교는 1922년 현재의 인천송림초등학교 자리로 이전했다가 1933년 일본인 학교인 인천공립남상업학교와 합병되어 배다리 유동에 자리잡는다.
인천상업학교는 조우성이 기록한 대로 특히 ‘3·1운동 당시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 전신)와 함께 인천 최초로 만세 운동을 펼치는 등 한국인 학생들의 민족정신이 투철했던 것으로 유명했고, 야구부는 일본 갑자원대회 조선 대표로 출전했던 맥을 이어 2004년 5월 야구부 창단 한 세기만에 대통령기를 쟁취하는 등’ 우리나라 고교 야구사의 한 장(章)을 차지하고 있는 명문이다. 인천고등학교로의 개명은 1950년 3월 10일로서 이때부터 인천고등학교의 역사가 쓰이기 시작한다.
관립 한성외국어학교인천지교 1회 졸업생 이근호(李根浩)를 위시해서 관립일어학교 1회 졸업생 이원옥(李元玉) 전 교장, 이당 김은호(金殷鎬) 화백, 인천 토박이로 송림 이씨 문중의 대표적인 인물로 인천시 초대 시의회 의장을 지낸 이명호(李明浩), 독립운동가 이을규(李乙奎), 개항 후 인천에서 성공한 실업가로 인천 10대 갑부에 이름을 올린 주씨(朱氏) 일문의 셋째 주정기(朱定基), 남로당 2인자로 월북 후 김일성 정권에서 사법상을 지낸 대부도 출신 이승엽(李承燁), 인천 상공업계 거물 권정석(權正奭), 주정기의 아우 주원기(朱元基), 인천 체육계의 공로자 정용복(丁龍福), 문학평론가 김동석(金東錫), 서울대 총장을 지낸 신태환(申泰煥), 극작가 함세덕(咸世德), 시인 한상억(韓相億), 영문학자 오화섭(吳華燮), 인천 야구의 기념비적 존재 김선웅(金善雄) 등이 모두 옛 인상 출신들이다. ‘인천 관학의 효시’라는 말 그대로 개항 이후 조선인 인재들이 처음으로 이 학교에서 배출되었다. 이후 인천고등학교 출신들의 활약상도 눈부신 바 있으나 차후 다른 기회로 미룬다.
이제 조우성이 평한 대로 ‘한국의 이튼’ 제물포고등학교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이다. 우선 고쳐 두어야 할 것이 ‘제물포고등학교의 전신은 인천 최초의 인문계 남자 중학교인 인천공립학교<仁中>로 1935년에 설립되었다’는 말이다.
사실 인중, 곧 인천중학교는 1935년에 용강심상소학교(전 축현초등학교)의 교실을 빌어 개교했다가 1936년
옛 인천중학교
지금의 자유공원 웃터골에 교사를 짓고 이전했다. 이 학교는 일본인 학생들을 위한 학교여서 한국인 학생은 아주 소수에 불과했다. 이 학교가 광복 후 독립운동가요, 교육자인 길영희(吉瑛羲) 교장이 취임하면서 우리나라 교육사에 한 획을 긋는 인천 수재의 요람으로 태어난다.
이후 인천중학교는 1954년 인천고등학교와의 병합이 불가능해지자 독자적으로 제물포고등학교를 병설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인천중학교는 박정희 군사정부 시절 학교 평준화 시책에 따라 폐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두 학교는 따로따로 존재했던 학교로서 인천 향토사 기술자들이 간혹 ‘인천중학교를 제물포고등학교의 전신’으로 표현하는 것은 오류라고 할 것이다.
아무튼 인천중학교나 제물포고등학교는 인천의 옛 고로(古老)들로부터 ‘웃터골 학교’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웃터골은 자유공원에서 기상대로 돌아가는 웅봉산 분지를 옛날 인천 시민들이 부르던 지명인데 시내 어디서 보아도 산등성이에 자리잡은 이 골짜기가 높아 보였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보인다.
이 웃터골은 1920년에서 35년까지 15년간 인천 공설 운동장으로 쓰였다. 웃터골에는 민족 감정을 발산하던 한용단(漢勇團) 야구팀의 선전과 단장 곽상훈(郭尙勳) 씨의 일화가 생생히 전한다. 고일(高逸) 선생이 『인천석금(仁川昔今)』에 ‘인천 청년 운동의 발원지는 웃터골이다. 인천 시민에게 민족혼의 씨를 뿌렸고 민주주의의 묘목을 심었으며, 인천의 애국 투사들이 육성된 곳이 바로 웃터골이다.’라고 썼는데, 그런 민족정신을 이어진 것인지 이 자리에 인천중학교와 제물포고등학교가 개교해 인천의 명문으로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기에 이른 것이다.
지금은 제물포고등학교만 남아 있는데, 개교는 물론 길영희 교장 선생에 의해서였다. 이 학교의 개교를 흔
제물포고등학교 전경
히 ‘단순한 일개 고등학교의 개교가 아니라 대한민국 백 년 교육이 나아갈 바, 방향을 제시한 개교이면서, 인간 교육의 참 이념을 실현하는 혁명적 개교였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 웃터골 학교의 독특한 교육 방향과 방침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길영희 교장의 교육 이념이자 철학이었다.
이 학교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고등학교들과 달랐다. 이 학교는 교훈을 교실 벽에 써 붙이지 않는 학교였다.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 이 구전(口傳) 문구가 교시(校是)이고 강당의 액자 속에 ‘유한흥국(流汗興國), 위선최락(爲善最樂)’ 이 글귀가 교훈이었다. 더불어 불필요한 일체의 격식을 버리고 오직 양심에 따른 자율을 존중하는 것, 이것이 제물포고등학교가 지향하는 교육의 최종 목표였다. 한국 초유의 무감독 시험 제도, 무규율부 제도, 학생 주관 전교생 월례 조회 제도, 전교생이 스스로 그룹을 결성하는 그룹 제도, 전문 운동부가 없이 학생 모두가 스스로 체육부원이 되는 학교, 교사의 글은 단 한 줄도 학생 교지(校誌)에 실리지 않는 학교, 한국 중·고교 최초의 대규모 개가식 도서관을 가진 학교.
그리고 1960년 서울대 입시에서 전체 수석을 비롯해 여타 대학의 수석을 여럿 배출함으로써 조선일보에 ‘학부형이 자식에게, 서울서 못된 것만 보지 말고 저 학교로 가자’는 만평(漫評)이 실릴 정도로 신생 제고의 저력에 한국 사회 전체를 놀라게 했었던 학교.
‘물론 혹자는 그분의 영재 교육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광복과 6·25를 거치면서 혼란과 황폐 속에 신음하던 이 나라 재건을 위해서 가장 시급하고 절실했던 것이 인재 양성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정의와 양심으로 민족을 이끌 영재! 이것이 제물포고등학교가, 또 길 교장이 품었던 교육의 이상이기도 했던 것이다. 선생이 계셨으면 무너져 내린 오늘의 한국 교육 현실을 뭐라 질타하실 것인가. 웃터골 학교는 좋은 목수가 동량(棟樑)을 고르던 학교였다.’
과거 어느 지역 신문에 썼던 이 구절을 다시 옮겨 보는 소이는 오늘날 이 학교가 현존하는 자리에서 이전해야 하느니, 그대로 있어야 하느니, 논란에 휩싸여 있어 심란하기 때문이다. 같은 중구에 있던 인천 최고(最古)의 학교 인고는 이미 옛날에 이곳을 떠났으니…. 글=김윤식 시인·인천문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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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2월 16일 (수)
인천신문 itoday@i-today.co.kr
댓글목록 0
劉載峻님의 댓글
인천중학교는 박정희 군사정부 시절 학교 평준화 시책에 따라 폐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전 두환 군사정권 시절 학교 평준화 시책" 이라 정정해야 되리라 봅니다
윤용혁님의 댓글
두 명문 고등학교의 역사와 내력을 세세히 알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재준형님,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오늘이 대 보름이군요. 인중이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사라진 것이 맞을 것 같군요.제가 70년에 인중을 시험 보려다 중학교 평준화 조치로 없어지는 바람에 아쉬움이 많았지요.어린 나이에.69년에 없어졌지요.여여하세요
劉載峻님의 댓글
바로 잡아 준 윤 동문 감사해요 68년 우리 67회 졸업 직후 없어졌군요 참으로 명문교인데...아쉽군요 유명한 옛 것을 마구 없애 참 그렇습니다
전재수님의 댓글
인천 연수동에 "인중"이 2001년도 다시 생기어 2011년 74회 졸업식도 있었습니다.
劉載峻님의 댓글
江華邑 玉林里가 배출한 명사, 전 재수 회장 반갑습니다 그럼 인중은 현존 학교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