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글
가을걷이
본문
김장밭을 붙이기 위해 텃밭에 배를 깔고 기어가던 호박넝쿨을 낫으로 둘둘 말아 밭이랑 끝으로 몰고 갔어요. 대롱대롱 매달려 끌려가는 것도 있었죠. 애호박이에요. 어떤 것은 아직 이마에 호롱불을 달고 애처로이 호박 흉내를 내다 말고 호박잎에 덮여 숨죽이고 있었어요. 호박전을 붙이신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그중 실한 놈들을 따 부뚜막에 올려놓았죠. 은행낭골에 위치한 윗말 밭으로 달려가야만 했어요. 고추밭에 고추들이 햇볕에 온몸을 맡겨 새빨갛게 익었더군요. 고추를 딸 적에는 조심해서 따야 했어요. 몸이 상해 물컹거리는 고추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시치미를 떼고 숨어 있었거든요. 허리를 굽혀 일일이 잘 익은 것을 따려면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았어요. 수년 전 도꾸라는 개가 쥐약을 먹고 죽어 아버지와 같이 와 묻어 주었던 감나무에 제법 많은 누런 감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어요. 너무 슬퍼 울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여러 해가 흘렀군요. 도꾸는 매년 감으로 태어나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반갑게 인사를 하며 꼬리를 흔드는 것 같았어요. 어머니는 아까부터 너른 보자기를 펼치시고 다듬이 방망이로 참깨를 두드려 터셨어요. 참깨는 너무 익기 전에 털어야만 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아!” 하고 입을 벌려 하늬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물고 있던 참깨 알을 모두 땅에 떨어뜨렸죠. 어머니의 참깨 터는 소리가 가을하늘에 울려 퍼졌지요. “탁! 탁! 탁!” 하늘을 날던 고추잠자리가 무심코 어머니의 어깨에 내려앉았군요. 그리고 뭐가 그리 신기한지 고개를 갸우뚱 거리고 두 눈을 씰룩 거렸어요. 어머니를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날랐다 잠시 후 또 내려않고요. 잘 익은 수수들이 겸손을 가장하다 어머니의 날카로운 낫에 모두가 목이 잘렸어요. 깍지가 긴 까만 녹두들도 데려가 달라고 입을 헤하고 벌렸군요. 어머니는 너무나 바쁘셨지요. 콩도 꺾으시고 팥도 덩이 져 꾸리시고. 조금 있으면 들깨도. 어떻게 다 가져가야할지 걱정이 태산 같았어요. 큰 덩이 하나를 어머니는 손을 발발 떠시며 머리에 이으려고 하셨어요. 그러다 중심을 못 잡고 한바탕 나동그라지셨어요. 날아가던 철새가 그 모습에 키들키들 웃었죠. 달려가 잘 일어나시도록 도와 드렸죠. 지게작대기를 걸치고 지게에 잔뜩 콩 덩이를 실었어요. 가을을 한 짐 실었죠. 그런데 중심을 잘 잡아 실어야하는 것을 욕심만 많아 얼기설기 쌓고 지게의 바를 당겨 맺는데 “끙!” 하고 일어서 비틀비틀 거리다가 저 만치 나가 떨어졌어요. 메뚜기가 깜짝 놀라 눈을 흘기며 이리 저리 날뛰었어요. 바지가 반쯤 벗겨져 큰일 날 뻔 했어요. 고무줄이 오래되어 바지춤이 느슨해져 그랬어요. 어리지만 밑천은 있었거든요. 만일 옆에 똥독할머니라는 별명을 가진 사나운 옆집 계집애라도 있었다면 분명 놀림감이 될 뻔했죠. 뭔가를 봤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것이 자명했어요. 바를 풀고 다시 실어야만 하는 아주 귀찮은 일이었지요. 그래도 서쪽 하늘에는 노을이 빨갛게 수채화를 그리고 있었어요. 이제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시간이 되었어요. 멀리 영각의 울음소리도 아련히 들려오더군요. 어미 소를 따라 산속에 들어갔던 송아지도 꼬리를 말아 흔들며 졸졸 고갯길을 따라 내려왔어요. 가끔 제 어미의 젖을 물려다 뒷발에 채였군요. 덕선이네 초가집에서 모락모락 저녁연기가 머리를 풀고 하늘로 향했지요. 집에 오신 어머니는 아직 일이 안 끝나셨어요. 더욱 바쁘셨지요. 동네 우물가에 가셔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오셨어요. 똬리를 정수리에 대시고 물동이를 머리에 이셨지요. 머든지 머리에 이는 것에는 이골이 나셨어요. 가운데 솥에 불을 지피시고 쌀을 씻어 저녁을 손수 지으셨지요. 다른 집과 달리 큰 솥과 작은 솥 사이에 어머니가 머리를 써 양은 솥 두 개를 더 걸어 놓으셨어요. 순 어머니의 아이디어였어요. 일석 삼조라 할까, 일종의 에너지 절약이었지요. 부지깽이의 끝은 불을 빨아 댕겨 빨갛더군요. 구수한 밥 냄새가 진동을 했어요. 찌개도 끓이시고 새우젓도 계란을 풀어 찌셨어요. 어느새 아궁이에 햇고구마가 노릿하게 익어 꺼내 달라 애원을 했어요. 껍질을 벗겨 입을 호호 불며 눈치껏 그놈을 식히려 무던히 애를 썼지요. 손에는 검댕이가 묻어 시커멓군요. 한입 베어 입에 물었어요. 그 달콤한 맛이란.... 이제 저녁노을도 사라지고 가끔 개짓는 소리만 들려왔어요. 남쪽하늘에는 샛별이 파란 외눈을 껌뻑이며 떠올랐군요. 누나가 그러는데 금성이랬어요. 까만 가방을 드신 아버지도 학교에서 퇴근해 돌아오셨어요. 온가족이 밥상에 둘러앉아 행복을 먹었어요. 가을걷이는 아직도 계속 진행형이었지요. 벼 베기, 논둑 콩, 벼 타작 등. 서산마루에 초승달이 졸음에 겨워 꾸벅이고 있었어요. 너무 지치신 어머니는 설거지도 미루시고 마른 빨래를 개키시다 그만 쓰러져 잠이 드셨어요. 새카맣게 그을린 어머니의 얼굴에 드리운 머릿결이 흐트러져 가여웠지요. 시집와 농사철 하루도 쉴 새 없던 어머니, 삶의 무게가 너무나 무거워 애처로웠어요. 차라리 농사꾼의 아내였다면 오히려 덜 고생하실 것을 교사의 아내로 힘겨운 농사일을 도맡아 하루의 피로를 내려 놓으셨어요. 온갖 궂은 일로 갈라진 어머니의 손등이 등잔불에 유난히 환하게 비쳐졌지요. 곤히 잠드신 어머니 눈가의 주름과 움푹 파져 야위신 볼이 안타까웠어요. 이제 모두가 하루의 일기장을 덮을 시간이 되었군요. 고단한 하루가 몰려와 눈꺼풀을 무겁게 당겼지요. 광속 귀뚜라미가 자장가를 불러 주었어요. 가물거리던 등잔불도 깊이 잠들었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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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문님의 댓글
시골 짙은 가을의 정경이 그대로 묻어있는 글입니다. 항상 용혁후배는 시골의 추억을 항상 연상 시켜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