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글
행복한 사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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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우 곤
-- 불행한 사람이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자이며, 그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란 어느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자이며, 가장 불행한 사람은 행복을 찾고자 하는 마음조차 없는 자이다. --
이는 폴란드의 시인이며 혁명가였던 ‘미치카이웨이츠(Mickiewicz, 1978 ~ 1855년)’의 말이다. 이를 뒤집어서 말하면 결국 가장 행복한 사람은 행복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래야 어느 누구든 사랑할 수 있으며,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된다. 따라서 그러한 마음가짐이 없으면 불행한 사람으로 떨어지는 지름길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성경의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서도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명백히 내세우는 것도 달리 있는 게 아니다. 또 영국의 철학자이며 근대 귀납법을 창시한 경험주의자인 ‘베이컨(1561~1626년)’도 『연애에 관하여』라는 에세이에서 ‘인간의 본성 가운데는 타인을 사랑하려는 숨은 욕구와 움직임이 있다’라고 말함으로써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결국 삶이란 곧 사랑이라고 단정을 짓는다 해도 별 무리가 없겠다. 따라서 사랑이 없으면 삶의 본질에서 벗어난 삶이요, 그것은 행복과도 배치된 삶이라는 등식이 자연스럽게 성립되지 않을까 싶다.
사전에서는 행복을 ‘흐뭇하도록 만족하여 부족이나 불만이 없음, 또는 그러한 상태’, 다른 말로는 ‘복(福)’이나 ‘복록(福祿)’이라고도 풀이하고 있다. 행복의 충족 요소로는 십인십색이듯 각양각색이다. 사랑과 건강을 쳐들기도 하고, 부와 권력을, 혹은 명예와 인기, 그리고 우정, 어떤 일에 대한 성취감 혹은 보람 등등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심지어 남녀간의 섹스라고까지 버젓이 내세우기도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재물이나 권력에 행복이 있다고 내세운다 치자. 그것을 가지고 천하고 비뚤어진 가치관을 가졌느니 어쩌느니 섣불리 트집을 잡거나 나무랄 수는 없다. 제 눈에 안경인 거처럼 그 사람에게는 그러한 것들이 최고의 가치를 지녔다고 생각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다만 어떤 형태로의 삶을 영위하든지 간에 기쁨과 즐거움을 발견하려면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제조건이 있어야 한다. 먼저 가능한 한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사고를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즉, 분명하고도 합리적인 삶의 목표 설정이 되어 있는지를 살펴야 하고, 그 목표를 향한 굳은 신념과 의지가 똘똘 뭉쳐져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혹시라도 과거의 실패 경험을 빌미로 거기에 마냥 붙들려 주저앉거나 체념하여 앞으로 나아가거나 재도전해 보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는 스스로를 인생의 실패자나 낙오자로 낙인을 찍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사물에 대한 두려움이나 소심한 자세를 버리고 기꺼이 밀고 나가려는 역동성이 수반되어야 한다. 자신의 숨은 능력이 발견되려면 자신감과 용기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결단코 자신을 과소평가하거나 미소망상(微小妄想)에 젖는 등 쓰잘데없이 자신을 비하시키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는 좋을 일이 하등 없다. 세인의 주목을 받는 화려한 명성도 마찬가지다. 시련과 고난을 딛고 일어서서 피나는 연습 끝에 일궈내지는 것이지 선반에 놓인 떡처럼 결코 그냥 앉아서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님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구약성서』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 1장 27절)’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신이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한 인간으로 하여금 능히 행복을 향유할 수 권리도 주어졌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세기 1장 31절)’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결코 소홀히 다루거나 간과할 수 없는 의미심장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면 마땅히 자신의 삶에 충실해야 하지 않겠는가.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구절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그럼에도 세상에는 행복의 길을 벗어나서 살아가는 이들이 숱하다. 마음에 독한 시기와 위선, 그리고 교만으로 가득 차 있거나 자신만의 유익 혹은 안일, 사치를 일삼는 것이 버릇이 된 이들도 있다. 또는 없거나 가난한 자를 멸시하고, 성실하고 착하게 사는 자를 유혹하여 악한 길로 이끄는 간교한 이들도 있다. 비단 여기에 그치랴. 남을 속여서 부당한 이득을 취하거나 터무니없는 말로 이웃을 이간하려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걸핏하면 남과 다투기를 즐기고, 여기선 이렇게 말하고 저기선 저렇게 말하듯 두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이도 있다. 그리고 자기과시와 허세, 자랑을 하지 못해 안달을 내기도 한다. 그리고 오로지 물질적 성공의 노예로 전락하여 정신적 행복을 경시하는 이도 있다. 일일이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누구나 한번쯤 위에 열거한 것들에 실족하기 마련이다. 어쩌면 그게 인지상정이요 처세의 한 방편일 수도 있다.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의 계명을 어긴 죄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듯이. 하지만 그러한 것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려 하지 않거나 중독되어 있는 줄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처럼 불행한 것도 없다. 한낱 막대기와 벌레만도 못한 인생과 뭐 다를 바 있겠는가. 왜냐하면 거기에서 발을 빼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기만 하다가는 허무와 절망, 좌절이 도둑처럼 살그머니 찾아오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신의 창조성에 반기를 드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보다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자세를 취하고 불도저처럼 밀어붙여야 한다. 성공과 행복은 확고한 신념과 불타는 용기, 사물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짙은 관심, 세상을 밝게 바라보려는 태도 여하에 달려 있다. 그렇다고 손님을 끌기 위해 겉만 번드르르하게 꾸미는 장사웃덮기 식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근심, 불안, 두려움, 증오, 시기(혹은 질투), 분노나 적개심 따위의 부정적인 생각을 제거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불행에서 벗어나 행복으로 자리를 옮기는 기틀이 되는 것이다.
인생은 짧다. 잠깐 나타났다가 바람같이 사라지는 안개와 같다고 성경에서는 말하고 있다. 눈부신 첨단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긴 하나 인생은 한낱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만 치중한다면 그것처럼 불행한 것도 없다. 하느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면 거기엔 반드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즉,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도록 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지구상에는 똑같이 생긴 사람이 없다. 하다못해 쌍둥이일지라고 뭐가 달라도 다르다. 그러기에 쌍둥이를 가진 부모는 누가 선둥이이고 후둥이인지 판별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따라서 저마다 행복 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아니할 수 없다.
사노라면 쓴맛, 단맛을 모두 겪게 된다. 어느 한 맛만 계속되는 경우가 전혀 없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사흘이 되면 물리듯 줄곧 단맛만 계속된다면 그 또한 견디기 어려울 때도 있다. 쓴맛도 마찬가지다. 살면서 쓴맛을 보지 않으려고 교묘히 피하려 하다가 큰 코 다치는 경우도 있다. 혹은 쓴맛이 계속된다 해서 슬퍼하거나 벌컥 성을 낼 일도 아니다. 쓴 약이 오히려 병에 이롭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인생 백 년에 고락이 반반이라는 말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나도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단맛은 잠시요, 쓴맛은 참으로 오래갔다. 이런 조랑복에 가슴이 시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 딴에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가 신통치 않거나 터무니없을 때마다 세상살이에 염증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생활이라는 무게에 짓눌려 내 뜻을 맘껏 펼치지 못할 때마다 가난을 물려준 부모와 제멋대로 돌아가는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불평도 뒤따랐다. 결국 내 팔자는 오로지 혼자서 부지런을 떨어야만 겨우 먹고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체념에 빠지기도 했다. 아니, 질곡 같은 이런 운명을 타고난 것에 대한 치미는 분노와 함께 세상사는 게 너무 허무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닌게아니라 염량세태라는 높고 거센 파도에 떠밀려 어딘지도 모르는 낯선 섬에 맥없이 내동댕이쳐질 때도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종잡을 수 없는 어지러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올바른 것인지 그 답을 찾지 못해 쩔쩔매기도 했다. 때로는 걷잡을 수 없는 변화 앞에 막막하거나 황당해져 만사를 뿌리치고 올무와 같은 세상에서 확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솟구치는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렇듯 세상일이 내 뜻과 같이 돌아가지 않을 때마다 맛보는 실의와 좌절, 고통과 비애로 숨이 턱턱 막히지 않았던가. 하긴 염세주의자처럼 인생은 불행과 고난에 찬 존재로서 이 세상에서는 행복을 차지할 수가 없다는 말이 어지간하게 맞아떨어지지 않나 하는 생각조차 들기도 했다. 즉, 그 어떤 것에서도 기쁨과 위안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기나긴 심적 고통과 세상살이에 대한 염증을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겨우 떨쳐낼 수 있었다. 다름아닌 나약하고 소극적인 나를 이기기 위한 일환으로 문학에 본격적으로 뜻을 둠으로 해서였다. 물론 문학을 하는 일이 만만하거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임했다. 그것을 통하여 날마다 새로워지는 나 자신을 발견했고, 사물에 대한 이치를 하나하나 깨우칠 때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을 맛보았다. 이는 어떻게 보면 ‘즐거운 일을 찾아내라. 할 일을 찾아낸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다.’라는 ‘카알라일’의 말을 실천에 옮겼다고 볼 수 있다.
그토록 고대하던 작가가 되고 나서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숨통을 죄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허다한 이중적인 잣대와 고정관념, 그리고 편견들을 작품 속에 주로 다루었다. 그제서야 꽉 막혔던 숨통이 서서히 트이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알게 모르게 나의 고유한, 단단한 바위와 같은 철학마저 갖게 되었다. 또 그것을 말보다는 실천에 옮기는 일에 주력했다. 자연적으로 내 하루하루의 생활엔 맑은 공기와 같은 신선함과 함께 리듬과 윤기, 그리고 생기가 실렸다. 하여 나는 문학을 통하여 예전에 보이지 않던 삶의 보람과 긍지를 찾았다. 그것이 바로 행복과 직결되는 통로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당시의 선택에 대하선 추호도 후회가 없다. 까닭인즉 숨이 떨어지는 그 날까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은 작품이 나오느냐 마느냐는 내 노력 여하에 달린 문제이기에 최선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은 무한한 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때로는 몸이 아프면 마음이 초조해진다. 아직도 완성되지 못한 작품이 수두룩한데 이렇게 덜컥 무너지거나 주저앉아선 안 된다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문학을 통하여 행복을 느낀다. 이제는 내가 사물에게 말을 거는 것도 있지만 오히려 사물이 내게 은근히 말을 걸어올 때도 있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펜을 나아가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매 내가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행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즉, 내게는 죽을 때까지 사물과 대화를 나누는 기쁨과 즐거움이 그림자처럼 따라붙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작품으로 형상화할 수 있다는 것은 나를 세상에 내보내준 신에게 감사드릴 일이 아닌가.
이제 조금씩 눈에만 보이는 사물보다는 마음이 닿아 만나는 사물에 주안점을 두고 작품에 담으려 하고 있다. 그리고 폭 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려고 애를 쓴다. 나만의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말이다. 정녕 혼을 실어 능숙한 솜씨로 엮어낸 예술품은 아무리 장구한 세월이 흘러도 그 가치는 결코 변하지 않으리란 것을 철석같이 믿고 싶다.
흥미 있는 일을 하면 두뇌는 피로를 모른다고 한다. 사뭇 일리가 간다. 나 역시 작품을 쓰면서 싫은 기색을 내보인 적이 별로 없다. 오히려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임한다. 무론 작품이 잘 써지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를 비비듯 초조해하지 않는다. 그것은 제대로 뜸이 들어 감칠맛이 날 때까지 기다리라는 신호로 혹은 내 재능의 부족함에 박차를 가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편하기 때문이다. 하여 내 애씀이 결코 헛되지 않을 때마다 천금을 얻은 듯 거늑함을 금할 수가 없다.
따라서 내 삶은 결코 피곤하지 않다. 이유인즉 내가 문학하는 일에 열심히 하면 그에 상응하는 행복이 수반되리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아니, 스스로 몸으로 느끼는 경우도 허다하다. 내게는 하루하루가 지극히 소중하기 짝없다. 건강만 허락한다면 늙어 죽을 때까지 여한 없이 좋은 글을 쓰고 싶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행복과 동행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거듭 말하거니와 나는 불행과는 담을 쌓고 지낸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사람에게 가장 슬픈 일은 자기가 마음 속에 의지하고 있는 세상을 잃어버렸을 때이다.’라고 ‘G.W.F. 헤겔’은 말했다. 나는 마음 속에 의지하고 있는 세상, 즉 문학하는 일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J.W. 괴테’는 ‘자기가 인정한 것을 힘차게 찾아 헤매는 하루하루가 인생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 역시 문학을 통하여 어떻게 사는 것이 진실된 것인지 규명하는 일에 몰두하며 살아가고 있다. 더구나 그것을 작품화하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힘차게 보내고 있으니 더더욱 즐거운 일이 아닌가.
인생의 반이 지나서야 삶의 의미를 안다고 한다. 나에게도 숱한 좌절도 있었고, 비참함도 맛보았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지금의 나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한 일련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가 중요하고 앞으로가 중요하다. 계속 실패했거나 불운했던 과거에 붙들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가재 걸음처럼 내일에 대한 희망이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것은 불행한 인생이요 실패한 인생이며 비창조적인 인생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게 결코 아니다.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 마음만 먹으면 금방이라도 행복을 손에 쥘 수 있다. 때로는 제 발로 찾아오기도 한다.그러나 거미도 줄을 쳐야 벌레를 잡듯이 행복을 찾으려고 준비를 한 사람만이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행복은 바로 우리 생활 가운데에 있고, 자신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다만 거기엔 사물에 대한 따뜻한 사랑과 짙은 관심으로 가득 채워져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단서를 늘 명심해야 하는 소이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사랑과 관심으로 일궈낸 행복. 그것이야말로 가치 있는 크나큰 보물이 아닐 수 없다.
내게 복을 몰아주는 이도 없는 거친 세상이지만 결코 좌절하거나 지망(志望)없이 살고 싶지 않다. 가진 것이 넉넉지 않아도 의기소침하거나 주눅이 들 필요도 없다. 언제든 내 마음먹기에 따라서 혹은 실천하기에 따라서 능히 가질 수 있는 게 행복이니까 말이다.
사는 동안 세상에 있는 것들을 온몸으로 껴안으며 뜨거운 사랑의 입맞춤을 하고 싶다. 바로 그것이 내 죽어 하느님께로 돌아갔을 때 참 잘했다, 내 아들아 하고 칭찬을 받지 않겠는가.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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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문님의 댓글
내가 마음 먹기에 따라 행복해 질수 있다는 진리를 잊지 않고 살아가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