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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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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우 곤
두 눈을 감으면 선명해져요/꿈길을 오가던 푸른 그 길이/햇살이 살며시 내려앉으면/소리 없이 웃으며 불러봐요/
소나무야, 소나무야 언제나 푸른 네 빛/소나무야, 소나무야 변하지 않는 너/바람이 얘기해줬죠. 잠시만 눈을 감으면/잊고 있던 푸른 빛을 언제나 볼 수 있다//
많이 힘겨울 때면 눈을 감고 걸어요/손 내밀면 닿을 것 같아 편한 걸까/세상 끝에서 만난 버려둔 내 꿈들이/아직 나를 떠나지 못해/
소나무야, 소나무야 변하지 않는 너/바람이 얘기해줬죠. 잠시만 숨을 고르면/소중했던 사람들이 어느새 곁에 있다/소나무야, 소나무야 언제나 푸른 네 빛//
이것은 한때 TV로 방영되어 특히, 직장인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받아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의학 드라마‘하얀 거탑(巨塔)’의 주제곡인 ‘소나무’의 가사로서 가수‘바비킴’이 부른 노래다. 이 노래는 드라마가 진행되는 중간중간에 효과적으로 삽입되어 나의 심금을 꽤나 울려댔다.
이즈막에 나는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거나 어떤 불쾌한 일로 울적할 때마다 이 노래에 푹 빠져든다. 곁에 아무도 없다면 콧노래로 흥얼거리거나 직접 불러댈 정도로 말이다. 그러고 나면 속이 후련해지며 생활에 대한 강렬한 의욕마저 불일 듯 일어난다. 따라서 언제까지일지 모르지만 그 노래는 당분간 나에게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드라마 속의 사건 전개 자체에는 그리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드라마의 속성상 결말이 어느 정도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주안점을 둔 것은 드라마상에서 정의의 편에 선 약자들이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은 힘겹고 고통스러운 싸움을 할 때였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 들려오기 마련인 이 노래에 더 관심이 쏠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거나 코허리가 시큰거려지기도 했다.
따라서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며 평행선을 긋듯 또다른 세계로 잠겨 들어가기가 일쑤였다. 그 주된 흐름은 이제껏 내가 살아온 인생 역정에 대한 반추로 귀착되었다. 다시 말해서 동상이몽처럼 진지하게 드라마를 보는 것이 아니라 흘러간 나의 과거사에 대한 추억을 이끌어내어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고 해야 더 옳겠다. 그것이 끝나면 이렇게 살아선 안 된다고 하며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주먹이 불끈 쥐어지기도 했다.
미상불 내 삶의 일부도 그랬다. 주어진 현실의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나름대로 인내를 미덕으로 삼으며 고진감래(苦盡甘來)를 철석같이 믿었다. 또 정의와 진실이 기필코 승리하리란 신념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내 비록 출중한 재주는 타고 나지 못했지만 세월을 아끼며 성실하게 살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꿈꾸고 바라는 세상이 꼭 오리라고 말이다.
하지만 세상은 달랐다. 그런 나의 이러한 처세관은 이따금 조소의 대상이 되곤 했다. 즉, 그런 케케묵은 처세관으론 지금과 같은 험난한 세파를 헤쳐나가기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고 말이다. 실속도 없이 두루춘풍처럼 사람을 대하거나 너무 곧이곧대로 착하게 살아선 안 된다고 덧붙이까지 했다. 때때로 자기에게 유리한 길을 찾아야 하고 여차하면 도망칠 통로도 마련해두어야 한다고 다짜고짜 목소리를 높이는 게 아닌가.
그랬다. 세상이 매번 끈질기게 요구하는 것은 학연과 지연, 그리고 인맥이었다. 그리고 출세의 수단으로서는 인간됨됨이와 성실, 실력이 아니라 돈(혹은 뇌물)과 간도 쓸개도 다 내놓는 아부가 우선시 되었다. 특히, 서로 물고 뜯고 할퀴는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욱 그러했다. 실력과 성실만을 무기로 삼는 것은 지금의 세상에선 화력이 약한 총이나 다름없었다. 추잡해 보이더라도 불의와 간교한 술수와의 타협을 어느 정도 할 줄 알아야 출세하고 성공할 수 있다고 공공연히 입방아를 찧었다. 아니, 그런 사람들이 보기에 따라서는 남보다 훨씬 앞서갔다.
하지만 나는 이를 쇠귀에 경 읽기처럼 외면했다. 남들이 뭐라 하든 삶의 본질이라고 보는 내 처세관의 고수에 고집을 피웠다. 그런 흔들림이 없는 처세관이 때로는 결정적인 순간에 구정물을 흠뻑 뒤집어쓰는 경우도 있어 흡사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 듯 씁쓸함을 맛볼 때도 있었다. 겉으로는 그런 나의 처세관에 맞장구를 치지만 정작 뚜껑을 열면 별수없이 팔이 안으로 굽듯 학연과 지연, 인맥이라는 불변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을 수시로 접했다. 결국 내가 얻은 것은 역시 이 사회의 정서는 출세를 하려면 뭐니뭐니해도 등대고 비빌 언덕(돈과 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은 것이었다.
이에 맛보는 비참함이나 허탈감. 소나무와 대나무처럼 사시장철 푸른 빛을 잃지 않으려 나름대로 애를 쓰며 살아왔던 게 과연 헛것인가 하고 분한 눈물을 삼키기도 했다. 하여 누군가가 쥐꼬리만한 지위를 앞세우고 나의 이성과 양심에 반하는 것을 강요할 때는 불끈 치미는 화를 참지 못하고 과격한 언사조차 불사했다. 사실 그것이 학연과 지연으로 똘똘 뭉쳐진 직장 생활에 있어서는 결코 환영을 받을 수 없는 처세법인 줄 뻔히 알면서도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하듯이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고질화된 버릇이었다.
이렇듯 세상이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음에 무슨 대책을 세워야겠다는 절박한 심정에 빠졌다.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셔야 한다. 그러자면 새로운 세계를 꿈꾸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미 승부나 결판이 나버린 게임이 아닌가. 내 적성이나 이상이 실현 불가능한 직업에 집착과 미련을 갖는다는 것은 일종의 세월의 낭비나 다름없다.
그때 새도 나무를 가려 앉는다는 말과 큰 고기는 지류(支流)에서 살 수 없다고 말이 떠올랐다. 그랬다. 더 이상 내가 몸바쳐 충성해야 할 이유가 사라지자 뭔가 용단을 내려야만 꽉 막힌 가슴이 트일 것 같았다. 즉, 죽기보다 싫은, 실력보다는 돈과 아부가 우선시되고, 학연과 지연, 그리고 인맥이 있어야만 승진과 출세의 발판이 된다는 처세술에 차라리 침을 뱉고 돌아서는 편이 백 번 나은 일이 아닌가.
그리하여 3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나는 내 자신을 돌아보았다. 과연 내가 나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또 내가 지향하는 처세의 방편에 걸맞고 늙어 죽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하고 숙고를 거듭한 끝에 선택한 것이 바로 문학이었다. 이유인즉 그것은 나만의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세상을 좀더 넓고 깊게 보고 확고한 나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일환으로서, 단 하루를 살아도 나다운 삶이 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에 내 인생의 전부를 걸고 온몸을 내던진다 할지라도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고 강한 의지를 갖는 근거를 마련했다.
그 이후 내 생활을 확연히 달라졌다. 직장 생활 틈틈이 금싸라기 같은 시간을 쪼개어 쓰면서 문학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고되고 힘들어도 작가로서 변신하여 여봐란듯이 정의와 진실, 그리고 성실이 올바른 대접을 받지 못하는 불편부당한 세상을 향해 한껏 질타하고 호령하고 싶었다. 물론 그것이 혼자서 가야 하는 길이고 자기와의 힘겨운 싸움이기에 때때로 가슴속 깊이 흐르는 차가운 눈물을 어쩌지 못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에 맥없이 무릎을 꿇거나 져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그래야만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찾는 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반드시 성공하리라 하고 오기를 불태우며 번번이 부닥치는 어려움을 참고 또 참는 법을 몸으로 익혀 갔다. 이때부터 나는 단 하루를 살아도 내가 나답게 사는 삶의 보람과 긍지를 맛보았다. 아니, 세상에 널려진 모든 사물들이 친구로 다가왔다. 그래서 매일 맞이하는 아침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제 난행 고행의 연속이었던 인생의 뒤안길을 겨우 벗어났다.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대로 작가의 길을 걷는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때의 각오와 고생이 없었다면 과연 어찌 되었을까. 죽도 밥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 서 있었을 게다. 나는 그때의 용단에 대해서 터럭만큼도 후회가 없다. 아니, 어느 누구에게도 당당히 얘기할 수가 있다. 그것을 통하여 진정 잃어버린 나를 찾았노라고 말이다. 그리고 내부에 충일한 힘은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크나큰 자산이라고 힘주어 말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일 게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나 고난의 가시밭길 속에서도 새벽을 일으켜 깨울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성경의 ‘누가 복음’ 11장 35절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여기서 빛이라 함은 그 어떤 불의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생명과 진리의 횃불’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바라는 빛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렇다. 이제 내가 나아갈 길은 ‘소나무’처럼 꿋꿋하게 사는 것이다. 목마른 세월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나 그렇게 두렵지 않다. 대범하게 헤치고 나아갈 것이다. 어차피 내 인생은 내가 책임져야 하지 않겠는가.
길을 가다 보니 소나무가 보인다. 나도 모르게 ‘소나무’의 노래가 흥얼거려진다. 그래, 언제나 푸른 내 빛을 온 누리에 뿌리리라고 다짐하면서 옹골차게 웃어본다. 그때 푸르디푸른 하늘 속에 내가 우뚝 선 모습이 환영처럼 다가오며 그와 동시에 장엄한 교향곡처럼 ‘소나무’의 노래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 소나무야, 소나무야 언제나 푸른 네 빛
소나무야, 소나무야 변하지 않는 너……
댓글목록 0
李茂春님의 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
윤인문님의 댓글
글을 읽고 보니 학교에 늘어선 소나무를 다시 보게 되었네..좋은 글을 올려줘 고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