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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작-부자로 사는 길
본문
무더위에 어떻게 지내시는지....... 오랜 만에 얼굴을 내밉니다. 자주 찾아와야 하는데, 늘 마음은 있어도 그리 쉬이 되지 않습니다. 그게 삶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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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우 곤
--- 그 성격이 악독스럽고 심술궂어
먹어도 또 먹어도 만족을 모르며
먹이를 얻은 후에 도리어 더 허기져 하도다. ---
이 시구는 이탈리아의 시인 ‘A. 단테’가 쓴 장편 서사시인 ‘신곡(神曲)’에 나오는 것인데, 끝이 없을 정도로 만족을 모르고 사는 인간 욕망의 속성을 비유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사실 누구라도 되면 더 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조로아스터(Zoroaster) 교의 신학, 윤리, 철학의 경전인 ‘아베스타(Avesta, 페르시아의 진리의 복음)’에는 “욕심은 증오를 낳고, 증오는 폭력을 낳고, 폭력은 죽음을 낳는다.”라고 욕심의 악순환을 지적하고 있다. 이렇고 보면 과도한 욕심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큰 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하긴 없이 사는 사람보다는 있는 사람이 더 구두쇠 노릇을 한다는 말이 달리 있는 게 아니다.
몇 년 전, 세상 돌아가는 일에 아는 것이 많고 구변이 좋은 한 직원이 내게 들려준 얘기가 생각난다. 강남에 사는 한 노인이 자수성가한 입지전(立志傳)으로서, 어릴 때부터 머슴살이로 출발하여 산전수전 다 겪은 끝에 부자가 되기까지의 인생 역정(歷程)에 관한 것이었다. 말하는 이는 그 부자가 지금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겠다며, 세상에 그렇게 지독한 구두쇠가 없다고 허두(虛頭)를 떼며 얘기를 끌고 갔다.
구두쇠 노릇에 맛들려 있는 그 부자의 학벌은 국민학교 중퇴가 전부다. 어린 시절 집안이 가난한 탓으로 열 살이 되던 해부터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모친의 손에 이끌려 산 넘고 물 건너 한 부잣집의 머슴으로 들어갔다. 모친은 그에게 그 집에선 배를 곯을 염려는 없을 거라고 누차 안심을 시켰다. 하지만 그는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그리 달갑지 않았다. 까닭인즉 그리운 부모형제 곁을 떠나 멀리 떨어져서 살아가야 한다는 게 못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그는 주인이 시키는 대로 새벽같이 일어나 저녁 늦게까지 일에 파묻혔다. 밤에는 피곤에 지쳐 부모형제를 생각할 틈도 없이 곯아떨어지기가 다반사였다. 하지만 마소처럼 아무리 피땀 흘리며 일해도 주인에게선 칭찬 한 마디가 없었다. 오히려 밥을 먹인 만큼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한다고 때리거나 구박을 주기가 일쑤였다. 이런 냉대와 멸시는 어린 그에게 한으로 고스란히 뼛속에 깊이 박혔다. 그러면서 입술을 꽉 물며 다짐을 했다. 자신도 언젠가 여봐란듯이 부자가 되어 떵떵거리며 살 것이라고 말이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그도 20살의 청년이 되었다. 그는 뭔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느꼈다. 즉, 아무리 뼈빠지게 일해도 뭐 하나 나아지고 달라지는 구석이 없는, 지옥 같은 머슴살이로는 숙원(宿願)인 부자의 꿈을 언제 이룰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지막지한 고생으로 점철된 머슴살이가 여간 지겹지 않았다. 될 수 있으면 하루라도 빨리 그 일에서 벗어나고픈 생각이 간절했다. 왜냐하면 10년 동안의 머슴살이로 잔뼈가 굵은 이력이라면 어디에 가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이보단 속이 더 편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기회를 보던 그는 자신의 의중을 주인에게 털어놓았다. 어찌 된 일인지 모르지만 주인도 순순히 들어주는 게 아닌가. 그는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듯 속이 후련했다. 아니, 새처럼 훨훨 날아갈 것만 같았다. 한 많은 주인집 나선 그는 고향에 들르지 않은 채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수중엔 몇 푼 안 되는 돈밖에 없었다. 그리고 몸뚱어리 하나뿐이었다. 더군다나 배운 것도 없으니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도리질을 쳤다. 어떻게 해서든 부자가 되겠다고 큰맘을 먹고 나선 길이 아닌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부딪쳐보자, 머슴시절부터 몸에 밴 고생을 무기로 삼으면 그 어떤 거친 세파인들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을 고쳐먹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자 어떤 일이 닥치든 문제가 될 게 없다는 자신감마저 가슴속에서 용솟음치는 것이었다.
그는 돈을 버는 일이라면 험하고 궂은 일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다. 사고무친의 서울바닥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억척스러움과 부지런함은 서서히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무슨 일을 맡겨도 믿음이 간다고 그를 추켜올리기까지 했다. 국민학교도 못 나온 그였지만 그것이 돈을 버는 일에는 하등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몸뚱어리 하나면 어디든 통했다.
배를 곯는 날도 많았다. 아니, 돈을 벌기 위해서 일부러 굶고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돈이 한 푼 두 푼 모이는 족족 허허벌판인 강남 쪽에 땅을 하나하나 사들였다. 당시만 해도 사람들이 거의 거들떠도 보지도 않는 땅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땅이 점점 넓어질 때마다 쏠쏠한 재미에 푹 빠져들었다. 뼈가 바스러지는 고생도 낙으로 삼았다. 밥을 먹지 않아도 자신의 땅이 넓어지는 만큼 배부름을 느꼈다. 타향살이의 외로움과 서러움도 잊을 정도였다.
그렇게 지내던 중 그에게 뜻밖의 행운이 찾아 들었다. 까닭인즉 정부에서 강남 개발이란 굵직굵직한 카드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는 엄청난 호재였다. 미상불 그가 땅을 산 곳마다 개발 계획에 의해 고층 빌딩이 하나하나 세워져 나가는 게 아닌가. 흡사 그에게 선경지명이 있어 땅을 사들인 듯이 여겨졌다.
그는 땅을 판 돈으로는 빌딩을 짓고 세를 놓았다. 아파트도 사고 팔았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주체 못할 만큼 돈이 굴러 들어왔다. 돈이 돈을 번다고 그가 손대는 일마다 톱니바퀴가 제대로 물린 듯 척척 맞아떨어져갔다. 이러매 재산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나날이 새끼를 치듯이 불어났다. 누구에게도 남부러울 데가 없었다.
문득 지난날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먹는 것과 입는 것을 아껴가며 땅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사들이는 그를 두고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비웃었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땅을 뭣 하러 사들이느냐며 머저리, 등신 같은 사람이 따로 없다고 입방아를 찧지 않았던가. 더할 나위 없는 그의 성공은 그들로 하여금 침을 흘릴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어떤 이들은 옛정을 보아서라도 없는 사람 도와 달라고 손을 벌리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그는 언제 보았냐는 식으로 그들의 부탁을 냉정하게 물리쳤다.
그만큼 돈을 벌었으면 족할 텐데도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과거 머슴을 살던 때의 주인처럼 지독한 구두쇠로 변해갔다. 그는 수전노(守錢奴)처럼 돈을 긁어 모을 줄만 알았지 제대로 쓸 줄을 몰랐다. 결혼하고서도 밥 한 그릇에 간장 한 종지면 족했다. 그의 지론인즉 어떻게 번 돈인데 먹는 것에 함부로 쓸 수 있느냐는 것이다. 옷도 허구한 날 아무거나 걸치면 된다는 식으로 유행에 훨씬 뒤떨어진 허름한 옷을 마르고 닳도록 입고 다녔다. 누구와 만나도 마찬가지였다. 얻어 먹을 줄만 알았지 선뜻 자신의 지갑을 열지 않았다. 심지어 자식들에게조차 용돈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고생에 비하면 삼시 세 끼 밥을 꼬박꼬박 먹는 것만으로도 호강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이처럼 그는 남에게 제 돈 한 푼 쓰는 것도 벌벌 떠는 위인으로 변해버렸다. 자신이 소유한 빌딩의 관리가 제대로 되고 있는지 살펴보러 나갈 때도 그는 아무리 힘들어도 버스나 전철, 혹은 큰맘을 먹고 택시와 같은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기가 다반사였다. 그러다가 점차 나이가 들어 거동이 불편해지자 어쩔 수 없이 중고차를 사고 운전기사를 고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인색한 면모가 잘 드러난 것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단다. 늘 함께 다니는 운전기사에게 점심이나 저녁 한 끼를 사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차에서 함께 내리고서도 그와 운전사는 따로따로 음식점에 들어간단다. 이유인즉 일한 만큼 꼬박꼬박 월급을 주는데 왜 거금이나 다름없는 제 돈을 들여가면서 밥까지 사주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이런 고약한 심보를 잘 아는 운전기사는 자신이 알아서 다른 데로 가서 끼니를 해결한단다.
뿐만 아니라 부자는 결코 고급스런 음식점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개가 대중 음식점에 들어가서 메뉴를 보고 그 중에서 제일 싼 음식만 시켜서 먹는단다. 이런 터에 운전기사에게 밥 한끼를 사 주기를 바란다는 것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 아닌가.
비단 이에 그치랴. 그는 자식농사에도 실패했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하나같이 칠칠치 못하여 결혼까지 했음에도 아무런 직장도 없이 그의 집에서 빈둥빈둥 논다는 게 아닌가. 까닭인즉 그는 자식들을 모두 국민학교만 졸업시키고 그것으로 자식 교육은 끝이라고 손을 놓았기 때문이다. 자식들이 아내와 합세하여 중학교만이라도 보내달라고 극구 간청했으나 소 귀에 경읽기였다. 국민학교도 못 나온 자신도 몸뚱이 하나로 이렇게 성공하였다, 돈 버는 일에 그깟 간판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호통을 치며 더 이상 자신의 앞에서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며 묵살해버렸단다.
하지만 그것은 자식들의 장래를 생각지 않은 크나큰 오산이었다. 결국 어른이 되고서도 사람구실을 제대로 못하여 부모 곁에 빌붙어 사는 자식들이 아닌가. 국민학교 졸업장만 가지고서 어찌 온전한 직장을 구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머리를 써야 하는 일에 제대로 따라가겠는가. 이는 자승자박이 아니고 무엇인가.
물론 그에게도 자식들의 교육을 굳이 비싼 돈 들여가며 가르치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못 배운 것을 한스러워하지 않았다. 남들이 공부하는 동안 그는 몸뚱이 하나만으로도 소나 말처럼 일하며 능히 돈을 긁어 모으는 일에 성공했다.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고대하던 부자의 꿈도 일궈냈다. 이런 정도라면 능히 대학교를 나온 이들보다 백 배, 천 배나 낫지 않은가.
그러기에 더더욱 그는 돈이 제일이라고 서슴없이 내세웠다. 돈이 있으니 직원들도 그의 앞에서 깍듯이 허리를 굽히지 않는가. 그는 아무리 학식이 높아도 돈이 없으면 사람 대접을 못 받는다는 것을 누누이 보아온 터였다. 친구도 필요 없었다. 만나봐야 돈이 새어나가는 통로요, 전혀 이득이 될 게 없다고 간주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모임에도 나가지 않았다. 이런 그의 처세에 친구들도 질려버려 하나 둘 떨어져나갔다.
게다가 부자간에도 원망과 증오의 골은 점점 깊어만 갔다. 자식들에게 자신의 빌딩들을 관리하라고 일을 맡기지도 않았다. 까닭인즉 그것을 빌미로 자신 몰래 재산을 빼돌릴까 버쩍 의심이 들기 때문이었다. 하여 자식들의 소원은 오로지 그 구두쇠 노인이 어서 죽기를 바라는 것뿐이란다. 그래야 상속받은 막대한 유산으로 지금껏 살아오면서 돈 한번 실컷 써보지 못한 한을 풀어볼 수 있으니까.
강남의 노른자 땅에 고급 빌딩 5개와 대형 아파트 2채를 가지고 있는 부자. 가만히 앉아있어도 뭉칫돈이 굴러들어오는 판이다. 이는 쌀독에 앉은 쥐와 다를 바 없다. 말하는 이는 죽어라 일해도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하루하루 버겁게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언제 자신도 그렇게 떵떵거리며 살아보나 하고 군침을 흘리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이 얘기를 듣고 뒷맛이 여간 씁쓸하지 않았다. 얘기의 진위 여부야 차치하고라도 이처럼 불우한 인생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혀끝에 오르내리는 재물에 대한 끝없는 탐욕과 인색으로 점철된 노인의 삶. 자식들을 썩은 나무토막처럼 만들어놓고서도 자신의 잘못을 모르는 후안무치가 그렇고, 하다못해 자신을 위해 일하는 운전기사에게조차 따뜻한 밥 한 끼를 선뜻 사주지 못하는 구두쇠 노릇이 그렇다. 이는 무늬만 부자일 뿐더러 속 빈 강정과 같은 삶이요, 벌레만도 못한 삶이 아니고 그 무엇인가.
이러고 보면 노인의 인생은 한마디로 말해서 실패한 유형에 속한다. 고생을 밑천으로 삼아 그가 원하던 부자가 되었다고는 하나 단지 물질적인 부의 획득에 불과할 뿐이다. 그는 재물이 갖는 진정한 가치와 풍요로운 부자로서의 삶에 대해 거의 까막눈이었다 할 수 있다. 부자가 되고서도 남에게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는 스스로 밝은 빛을 저버리고 어둠 속에 들어감을 즐기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부자로서 반의 반 쪽짜리의 대접도 받지 못하는 그의 삶. 한낱 자신의 물질적 부의 축적에만 치중하여 금싸라기 같은 세월을 낭비하고 만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돈을 개처럼 벌었지만 정승같이 빛나는 일에 쓰지 못했다. 그저 쌓아두기만 하는 것은 돼지가 배부름만 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거기에 무슨 마음의 행복이 따르고, 삶의 즐거움이 있겠는가.
--- 仁者 以財發身, 不仁者 以身發財 ---
이는 중국의 사서삼경의 하나인 ‘대학(大學)’에 나오는 말로써 ‘어진이는 재물로써 몸을 일으키나, 어질지 못한 이는 몸으로써 재물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즉, 어진 사람은 재물을 유익한 곳에 써서 이름이 높아지고, 어질지 못한 사람은 재물을 한낱 이익만을 도모하는 데에 써서 몸을 망치고 재앙을 입는다는 것이니 부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날카롭게 짚어주는 말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능히 가슴에 새겨둘 만한 값진 말이다.
누구나 자신이 뼈빠지게 고생해서 벌은, 피 같은 돈을 허튼 곳에 함부로 쓰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때로는 고생한 보람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정승같이 값진 일에 쓰려는 용기도 필요하다. 쌀독에 인심 난다는 말이 있다. 부자일수록 인덕을 쌓으라는 말은 고금동서의 진리다. 사실 부자이면서 지독하게 인색한 사람과는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 가령 함께 밥을 먹자고 불러내는 친구나 이웃이 없다면 그것처럼 헛되고 서글픈 인생도 없다.
하지만 부자로 사는 길이 결코 쉽지 않은 것일까? 갈수록 부자들이 오히려 구두쇠 노릇을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부자가 될수록 욕심이 늘어난다는 것과, 재떨이와 부자는 모일수록 더럽다는 속담 그대로다. 재물에 대한 과도하고 삐뚤어진 욕심은 영혼까지 좀 먹게 한다. 이마를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만큼 인색한 사람보다 수더분하고 돈을 쓸 데 쓸 줄 아는 사람이 그리운 요즈음이다.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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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문님의 댓글
진작가 오래간만에 등장이오..요즘 부자들 옛날얘기처럼 쌀 99섬을 가지고 있으면서 100섬을 채우려고 욕심을 부린다하니 그것이 현세 부자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베풀줄 모르는 부자들 안타깝기만 합니다.
안태문(80)님의 댓글
선배님 글 잘 읽었습니다.
그래서 넘치는 것이 부족함만 못하다란 말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중심의 셰계에서 살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여 봅니다.
살아 숨쉬는 것 자체를 행복이라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늘 편안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