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글
발표작-찔레꽃 향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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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우 곤
아침을 먹은 뒤 경기도립과천도서관 앞에 있는 양재천변으로 가서 산보할 생각에 집을 나섰다. 몇 발짝 걷지 않았을 때였다. 내 시선을 강하게 잡아 끄는 게 있었다. 다름아닌 붉은 장미와 더불어 눈이라도 뿌린 듯 하얗게 핀 찔레꽃 한 무더기였다.
그것을 보니 문득 작년 연말에 가졌던 송년회 때의 일이 떠올랐다. 인천에 있는 ‘소래 포구’에서 한 라이브 카페를 빌려 고등학교 동창들과 부부 동반 모임을 가졌다. 처음으로 시도한 것치고 부부 동반 모임에 40쌍이나 참석한 것은 뜻 깊은 일이었다. 다소 서먹서먹하고 어색한 감은 있었으나 그것도 점차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언제 그랬느냐 싶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바뀌어갔다.
약 3시간 정도가 걸린 공식적인 모임이 끝나고 아쉬운 작별의 악수를 나누며 서로 뿔뿔이 흩어져 돌아갈 때였다. 누군가가 금방 헤어지기가 뭣하다며 노래방이라도 가자는 권유에 나를 포함한 세 쌍의 부부가 이에 응했다. 우리는 인근의 노래방을 찾아 들어갔다.
순번대로 노래를 부르던 중 차례가 된 한 친구가 머뭇대었다. 자신은 요즈음 신식 노래에 대해선 별로 아는 게 없다고 운을 떼더니 자신의 십팔번이라고 토를 달며 첫 곡으로 ‘찔레꽃’이라는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닌가.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언덕 위에 초가 삼간 그립습니다/
자주 고름 입에 물고 눈물에 젖어/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사람아//
달 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던 세 동무/천리 객점 북두성이 서럽습니다/
작년 봄에 모여 앉아 박은 사진을/하염없이 바라보니 즐거운 시절아//
한껏 감정을 살려가며 멋들어지게 부르는 그의 노래 솜씨는 ‘백난아’ 란 가수를 뺨칠 정도로 동석한 이들을 뒤집어지게 하는 열창이었다. 과연 그가 밝힌 대로 십팔번에 걸맞았다.
막간을 이용하여 그는 ‘찔레꽃’을 즐겨 부르는 사연을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현재 그는 집이 서울에 있지만 직장 관계로 혼자 부산에 내려가 생활하는 처지란다. 주말부부로서의 고충이야 감내할 수 있지만 그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여간 적적하지 않은 객지생활이다. 특히, 그곳에서는 우리들과 같이 속을 훤히 털어놓고 지낼 만한 친구가 없단다. 나름대로 사람을 사귀려 애써 보지만 내성적인 탓으로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늘그막에 와서 새삼스럽게 친구처럼 대할 수 있는 사람을 물색하려니 쑥스럽단다. 설령 그런 사람을 만났다 하더라도 학창 시절의 친구와 같은 쫄깃쫄깃한 맛이 없어 안타깝다는 것이다.
낮에는 직원들과 어울려 그럭저럭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러나 밤이 되면 객지에서의 고달픔과 외로움, 그리고 식구들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 해일처럼 굽이친다. 하여 전전반측 잠을 못 이룰 때가 다반사다. 이러매 역시 나이가 들수록 술잔을 나누며 진솔한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 그 중에서도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들이 더 보고 싶어지더라고 하며 쓸쓸한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 하여 숱한 대중가요 중에서 우연히 접한 ‘찔레꽃’이라는 노래가 알게 모르게 자신의 분신처럼 입에 착 달라붙게 되어 이제는 어디 가서도 그 노래를 맨 먼저 부르게 되더라는 것이다.
나는 오랜만에 듣게 된 ‘찔레꽃’이라는 노래와 그 친구의 솔직한 심경 고백을 듣고 나자 울컥 어머니에 대한 생각이 치밀었다. 어머니의 십팔번도 ‘찔레꽃’과 ‘박재란’ 씨의 ‘님’이란 노래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부르는 그 노래를 자주 들었다. 지금도 어머니는 식구들과 이따금 노래방에 가면 항상 두 노래를 빼놓지 않으신다.
부산이 고향이신 어머니. 거제도로 시집을 가서 그 곳에서 나를 낳으셨다. 그리고 내가 네 살이 되던 해엔 그곳을 떠나 천리 타향인 항구 도시 인천으로 올라오셨다. 미군부대 취직 차 미리 인천에 올라가셨던 아버지로부터 일이 거의 성사된 것이나 다름없으니 가장집물을 챙겨 속히 올라오라는 전갈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인천에 발을 내디뎠을 때 우리 모자 앞에는 크나큰 슬픔과 절망이 기다리고 있었다. 큰소리치셨던 아버지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까닭인즉 취직을 미끼로 한 사기에 덜컥 걸려들어 논밭을 팔아 마련한 돈을 몽땅 날려버리고 게다가 빚까지 덤으로 짊어진 상태였다. 이러매 우리 가족의 신세는 길거리에 나앉아 있지 않달 뿐이지 미래에 대한 희망마저 꿈꿀 수 없는 알거지나 다름없었다.
이렇듯 타관에서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는 바람에 그 이후 모든 것을 맨주먹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다니던 몸서리치는 지옥 같은 가난과 진날 마른날 없이 눈물겨운 고생의 연속. 양친은 도둑질을 빼고는 일감이 닥치는 대로 아니해 본 일이 없었다.
하지만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은 이상하게도 우리 가족과는 무관한 듯 비껴가기만 했다. 살림이 어느 정도 불어날 만하면 꼭 탈이 생겼다. 까닭인즉 남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경향이 있는 아버지가 이것저것 사업에 손을 대었다가 얼마 못 가 알토란 같은 재산을 거덜내기가 일쑤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머니의 뼈가 바스러지는 고생도 한낱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이나 다름없었다. 지금도 나는 아버지에 대해선 여간 원망이 깊지 않다. 가족들의 앞날을 위해 좀더 앞뒤를 재고 처신에 신중을 기했더라면 오래도록 가난에 허덕이지 않았을 텐데 하고 말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렇게 험한 세월 속에서도 앞서 언급한 두 노래만큼은 빼놓지 않고 부르셨다. 특히 ‘찔레꽃’ 노래는 수시로 들을 수 있었다. 이는 아마도 신산스런 타향살이에서 오는 설움과 시름을 달래기 위함이었지 않나 싶다. 아니, 아무리 고생해도 헤어날 길이 없는 가난과 내일에 대한 희망마저 감감하니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고향에 자주 가시지도 못했다. 가난이 죄였다. 하긴 동기간에도 서로 잘살아야 왕래가 잦는 법이 아닌가. 때로는 궁핍한 살림에 못 견딘 나머지 어머니는 가끔씩 외가나 이모들에게 가서 돈을 구해오기도 하셨다. 그것도 한두 번이지 매번 손을 벌리는 것도 염치가 없는 일이라 그 이후 아주 큰일이 아니면 발을 끊으셨다. 참으로 가슴 쓰리고 아픈 인생 역정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래서 향수를 절실히 불러일으키는 맛이 있는 ‘찔레꽃’이라는 노래가 어머니의 분신과도 같았는지 모른다.
아닌 게 아니라 일명 ‘야장미(野薔薇)’라고도 불리는 찔레꽃은 다음과 같은 애틋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한때 북방 몽고족이 고려를 지배하던 시절의 얘기다. 당시 원나라는 걸핏하면 고려에 굴욕적인 것을 허다하게 요구했다. 그 중에는 처녀를 매년 바치는 관례도 포함되어 있었다.
‘찔레’라는 한 소녀가 살았다. 그도 여타 처녀들처럼 공녀(貢女)로서 몽고족한테 끌려갔다. 불행 중 다행으로 맘씨가 좋은 한 부잣집에서 살게 되었다. 주인은 그 나라에서 지위가 높은 사람이었는데 ‘찔레’를 친자식처럼 몹시 아끼고 귀여워해 주었다. 아무도 그 소녀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고된 일도 시키지 않도록 했다. 그저 내 집같이 자유롭고 편안하게 지내라고 했으니 ‘찔레’는 비록 고향을 떠나 머나먼 이국 땅으로 끌려온 몸이지만 거의 호강하며 지내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늘 고향에 가 있었다. 아무리 몽고인들이 잘 대해 준다 해도 머릿속엔 자신을 키워준 늙으신 부모와 함께 뛰놀던 친구들, 그리고 아름다운 고향 산천이 떠올랐다. 때때로 말썽을 부리고 심술을 피우긴 해도 자신에게 인정이 많던 동생의 모습도 눈에 어른거렸다. 환한 낮에는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별생각 없이 지낼 수 있었지만 해가 뉘엿뉘엿 하고 땅거미가 지게 되면 고향생각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에 밤에는 잠을 설치기가 다반사였고, 때로는 뜬눈으로 밤을 하얗게 새우기도 했다. 이렇듯 나날이 깊어가는 사무치는 그리움은 그 무엇으로도 달랠 길 없었다.
그렇게 향수에 젖어서 눈물을 흘리며 지낸 지도 어언 10년이 되는 어느 날, 그런 ‘찔레’를 가엾게 여긴 주인이 선처를 베풀었다. 하인더러 고려에 가서 말동무라도 되게 그의 동생을 데려오라고 말이다. 참으로 기껍기 짝이 없는 처사에 ‘찔레’는 제발 모든 일이 잘 되기를 잔뜩 기대를 안고서 기다렸다. 하지만 그 기대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왜냐하면 고려에 갔던 하인이 혼자서 터벅터벅 힘없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가 전한 소식은 아무리 백방으로 수소문해보았지만 ‘찔레’의 가족이 어디에 사는지 행방이 묘연하더라는 게 아닌가. 하긴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도 있으니 사뭇 일리가 갔다.
이에 ‘찔레’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다. 아니, 하늘마저 노랗게 보였다. 참다 못한 ‘찔레’는 즉시 주인에게 간청했다. 자신이 직접 가서 가족을 찾아보겠노라고. 주인은 서슴없이 승낙했다. 그는 혼자 고향에 돌아와서는 그리운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여기저기 산 속을 헤매었다. 하지만 도로무공이었다. 깊은 슬픔과 절망에 빠진 ‘찔레’는 오랑캐 나라로 다시 돌아가느니 차라리 여기서 죽는 편이 낫다고 여기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죽은 후 동생들을 찾아 헤매던 골짜기나 산, 그리고 개울가마다 찔레꽃이 곱게 피어났다. 흰 꽃은 그의 부모형제를 찾지 못해 애타는 마음을, 빨간 꽃은 그가 흘렸던 눈물이며, 동생을 부르던 그 아름다운 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듯한 매혹적인 향기를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사뭇 코끝이 찡한 전설이다. 나는 그것을 생각하며 찔레꽃 곁으로 다가갔다. 줄기들은 대개가 스스로 허리를 꼿꼿하게 펴지 못한 채 마치 부축을 받는 듯 다른 나무에 의지하고 있었다. 이는 아마도 극에 달한 찔레의 슬픔이 죽어서도 여한으로 남은 게 아닐까. 하지만 이 정도는 약과다. 어떤 줄기는 거의 땅에 기듯이 뻗어있었다. 그 모습이 여간 애처롭지 않아 나는 곁에 다가가 그 줄기를 들어올려 다른 나무에 걸쳐주었다.
바로 그때,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향기가 내 콧속으로 파고들어왔다. 하여 나는 찔레꽃에 코를 더욱 가까이 대어보았다. 맡으면 맡을수록 그 향기는 어떤 신비로운 세계로까지 빠져들게 만들었다. 나는 이에 압도당한 채 한참이고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있었다.
대체 그 향기를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전설에 비춰진 대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제격인 향기라 아니할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그 향기는 첫사랑을 느낀 아름다운 소녀의 맑은 눈동자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세상 모르고 잠자는 귀여운 어린아이의 고른 숨결에서 묻어 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 혹은 예술 작품 등에서 종종 발견되는 비장미(悲壯美) 같은 것도 연상되었다. 하지만 나의 이러한 표현도 딱히 꼬집어 형용키 어려운 그저 변죽만 울리는 것에 불과하니 사뭇 답답하고 안타까울 뿐이었다.
나는 한동안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다가 천변에 나갈 것을 포기하고 그 자리를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찔레꽃 향기에나 듬뿍 젖을 심산으로 ‘찔레꽃’ 노래를 조용히 불렀다. 이심전심일까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던 아내도 따라 부르는 게 아닌가. 이에 갑자기 코허리가 시큰거리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더 있다간 왈칵 눈물이라도 쏟아질 듯하여 다시 집 밖으로 나왔다.
그와 함께 살아온 지도 어언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서로 의지하며 위험한 가팔막 길을 아슬아슬하게 오르내리던 세월들이 주마등처럼 피어 오른다. 무엇 하나 변변하게 내세울 게 없는 나를 만나 고생을 달고 살아온 아내다. 그는 어떠한 곤경에 처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는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는 저력을 보였다. 그것이 내게 있어서 커다란 힘이 되어주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이따금 속 깊이 눈물이 고임을 어쩌지 못한다.
아내의 고향은 강릉이다. 그는 나의 전근 발령 때문에 자신의 피와 살 같은 그곳을 떠나 머나먼 타관인 과천으로 올라왔다. 어언 16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말았다. 처음엔 고향이 그리워 못 견뎌 하더니 점차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이제는 남편과 자식이 함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자신의 고향이라고 즐겨 내세운다. 하지만 겉으로야 그렇게 태연자약하더라도 속으론 이따금 ‘찔레’처럼 고향에 있는 부모형제와 친구들, 그리고 산천(山川)을 한없이 그리워할 게다. 내 어머니가 그렇게 살아왔듯이.
이제껏 살아온 날을 헤아려 보니 그에게 남들처럼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기쁨과 즐거움을 챙겨준 적이 별로 없다. 그저 내 일이 바쁘다는 구실로 차일피일 미루기만 해왔다. 그것이 못내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이 살고 있어도 한 지붕 밑에서 오래도록 늘 함께 살아온 내 가족보다 더 소중한 이들이 어디 있으랴.
오늘은 그에게 찔레꽃 전설을 들려주며 그 진하디 진한 향기를 서로 나눠 가져야겠다. 아니, 남부럽지 않게 살기 위해 고생으로 다져진 바위처럼 단단한 그의 마음을 힘껏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솟구친다. 더 늦기 전에 믿음이 가는 자상한 남편으로서 거듭나기 위해서 말이다.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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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문님의 댓글
진작가! 반가우이! 오래간만에 글을 보는군..때늦은 찔레꽃 향기..진하고 향기롭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