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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속에 피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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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우 곤
오늘도 나는 외출하려는 그의 몸단장에 마지막으로 공을 들이고 있다. 우선 때묻은 얼굴을 깨끗이 씻기고 쑥대머리도 감긴다. 그리고 나서 거울 앞에 앉게 한 후 머리를 빗으로 곱게 빗겨주는 것을 비롯하여 매사에 여간 까다롭지 않고 꼼꼼한 그가 맘에 든다고 할 때까지 이모저모 살피는 것이다. 판단은 그가 하는 것이지만 내 깜냥으로 어디에 내놓더라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손질에 완벽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그 작업은 오래도록 내 몸에 배인 것이긴 해도 매번 임할 때마다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과 초조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라 여간 버겁지 않다.
뒤에서 밝혀지겠지만 그는 내게 있어서 주인이자 친구이다. 그렇지만 그는 전적으로 나의 절대복종만을 요구하는 주인 행세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당초엔 주인이자 친구로서의 관계로 고락을 같이하자고 계약을 했지만 그것은 단지 허울에 불과한 것으로 변해버렸다. 왜냐하면 그는 시초부터 나를 가르치고 인도하는 입장이었기에 친구로서의 끈끈하고 쫀득쫀득한 우정이 담긴 태도를 보인 적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고 보면 그는 내게 있어서 주인일 뿐이지 친구하는 것은 내가 임의로 편의상 생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야 옳겠다.
그는 성미가 불 같고 괴팍하기 짝없다. 내가 아무리 잘해 주어도 그는 칭찬 한마디 제대로 던지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내가 한 일에 꼬투리를 잡기에 혈안이다. 내 일거일동을 낱낱이 예의 주시하는 그의 눈초리는 여간 매섭고 날카롭지 않다. 조금이라도 수가 틀리다 싶으면 눈살을 잔뜩 찌푸리거나 대번에 벌떡 일어나 길기리 뛰며, 아직도 네놈의 몸 속엔 돼먹지 못한 더럽고 천한 피가 흐른다, 왜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느냐, 그래 가지고 무슨 일을 하겠느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는데 부릅뜬 시선엔 마치 까마득한 벼랑 끝으로까지라도 몰아세울 듯 살기가 등등하다. 그렇게 해서도 분이 풀지 않으면 내게 달려들어 뺨을 냅다 후려갈기거나 아예 숨통마저 끊어놓겠다는 듯 목까지 조르는 경우도 있다.
설마 죽이기야 하지 않을 테지만 이런 기세에 눌린 나는 끽소리도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일쑤다. 등에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그와 시선을 마주치는 것도 징글맞은 뱀을 대하듯 소름이 오싹오싹 돋기도 한다. 그런 일은 밤과 낮 구별이 없다. 하루에도 무시로 일어나고 봄이든 여름이든 가리지 않는다. 혹은 한두 해가 지나면 대우가 좀 나아질까 기대하지만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오히려 더 설쳐대며, 아류(亞流)에 만족하지 말고 뼈를 깎는 노력을 더하라고 호통을 쳐댄다.
듣고 보면 천 번 만 번 맞는 말이다. 워낙 천학비재인 나로서는 무엇으로 변명할 재간은 없다. 물론 나도 인간인지라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듯 간혹 서러워서라도 한 마디의 대거리를 하고 싶을 때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저 내 팔자거니 하면서 꾹꾹 참아낼 수밖에 없다. 이유인즉 그랬다간 까딱하면 당장 문 밖으로 내쫓기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에게서 쫓겨나면 막말로 어디로 갈 데가 없다. 그래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에게 붙여 살아갈 수밖에 달리 뾰족한 수가 없는데 그게 짜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두꺼운 얼음장같이 몰인정한 그도 내가 한 일이 제법 만족스러우면 이따금 흐뭇한 미소를 내게 던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런 예는 잔디밭에서 바늘 줍기처럼 매우 드물디 드문 일이다. 앞서 언뜻 내비쳤지만 그가 내게 불뚝 화를 내고 그것도 모자라 죽일 듯이 폭력까지 행사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그는 항상 간결 명료한 것을 으뜸으로 삼는다. 즉, 애매 모호한 것은 지극히 싫어하는 것이다.
나라고 해서 그것에 전연 까막눈은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의 마음에 들려고 여러 모로 애를 써보지만 그게 식은 죽 먹듯 쉬운 게 아니라는 것에 문제가 있다.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고 그의 몸단장에 몰입하지만 이상하게도 주눅이 드는 경우가 많고 매만지는 손조차 떨리는 바람에 결과물이 이것도 저것도 아니기가 허다하다. 더군다나 한 발 삐끗하면 천 길 벼랑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일이라 더더욱 초조와 긴장 속에 잠기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내가 그에게 얽매여 산다는 것을 잘 아는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안쓰러워 하는 표정을 짓는다. 왜 지옥 같은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처박혀서 사느냐, 과연 일해 준 대가로 밥이라도 제대로 얻어 먹고 지내느냐고 하면서. 사실 그럴 때마다 속이 이만저만 쓰린 게 아니다. 게다가 그런 질문에 선뜻 자신 있게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거나 혹은 이런 궁지를 모면하기 위해 화제를 영 엉뚱한 곳으로 돌려버리기도 하는데 이런 나의 미덥지 못한 태도에 스스로 화가 치밀기도 한다.
그럼에도 나는 여하한 일이 있어도 그에게 허투루 반기를 들 수가 없다. 불변의 철칙이랄 수 있는 절대복종만이 통한다는 것은 앞서 언급했을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오래 전에 내가 자청한 일이기도 하다. 즉, 그와의 계약 당시 내 운명을 고스란히 그의 손에 맡겼던 것이다. 따라서 수시로 당하는, 그가 내뱉는 폭언과 휘두르는 손찌검에 뺨이 얼얼하고 뼈가 바스러지는 듯한 고통이 뒤따라도 감내할 수밖에 없다. 아니꼽고 치사하더라도 그저 내 팔자거니 하고 여기며 꾹꾹 눌러 참고 지내는 게 상책인 셈이다.
주야를 가리지 않고 매일매일 그에게 의무적으로 하는 몸단장. 때로는 귀찮기도 하고 더군다나 그가 내 앞에서 떡 버티고 있다는 것 자체가 거북살스럽고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솔직한 말이지만 늘 숙제처럼 따라붙는 먹고 사는 일 – 무거운 십자가이기도 하지만 - 에 부대껴 심신이 지칠 때마다 더욱 그렇다. 다시 말해서 세상살이에 바쁘다는 구실로 대충대충 어서 빨리 끝내고 싶은 조급한 마음이 동하면 손끝이 떨리기도 한다. 즉, 먹고 사는 일도 화급을 다투는데 언제까지 짐승처럼 갖은 수모와 치욕을 받아가며 그에게 충성해야 하는가, 열 번 잘해도 좋은 소리 한번 제대로 못 듣는 이런 지긋지긋한 일에서 무슨 낙을 찾겠다는 것인가, 게다가 할 말도 당당하게 못하고 그저 숨죽인 채로 넙죽 엎드려 지낸다는 것은 굴욕적인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한번쯤은 나도 시정잡배처럼 목울대를 빳빳이 세우고 막말을 하거나 매끈하게 가다듬지 않은 거친 말을 함부로 내뱉으며 그의 멱살을 틀어 잡고 잘난 체 거들먹거리는 고약한 그의 콧대를 보기 좋게 꺾어 주고도 싶은데 그게 쉽지 않다.
사실상 그런 오만불손한 태도는 언감생심이다. 도리에 어긋난다. 뿐만 아니라 애당초 그와 단단히 맺어진 약속을 위반하는 것이기에 비겁한 일이다. 설령 그렇게 해 봤자 내겐 결코 득이 되지 않는 것이요 제 얼굴에 침 뱉기나 다름없다는 것을 누누이 경험해왔다. 다시 말해서 나만의 쉽고 편한 방식은 그에겐 일절 통하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잔뜩 골을 내며 앵돌아앉거나, 대뜸 아직도 네놈의 몸 속엔 돼먹지 못한 더럽고 천한 피가 흐른다고 일갈대성하며 나를 깔고 짓뭉갤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렇듯 그는 나의 월권 행위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결국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불길처럼 치솟는 불순한 생각의 싹을 도려내거나 잠재우는 것으로 그칠 뿐이다.
그렇게 살얼음판을 밟듯 살아온 지도 어언 십여 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내가 처음으로 그를 만난 것은 30대 후반이었다. 그를 만나기 전 나는 지망(志望)없이 그저 먹고 사는 일에만 골몰하며 살아왔었다. 즉, 내일에 대한 희망조차 품지 않은 채 물에 물 탄 듯한 생활의 연속이었고 어중이떠중이처럼 살아가는 삶이었다. 결국 그것은 나로 하여금 삶의 대한 회의를 갖게 하였고, 자연적으로 정신적인 방황과 직결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엔가 이렇게 살아선 안 된다는, 가슴 밑바닥에서 울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뭐라도 흔적을 남겨야 할 게 아니냐, 이왕지사 세상에 태어났으면 이름값을 하고 떠나가야 한다, 언제까지 아무런 보람과 긍지를 느끼지 못하는 삶에서 허우적대려느냐고 나를 강하게 질타하는 게 아닌가. 날이면 날마다 들려오는 그 소리. 그때부터 나는 스스로 반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를 고려해보던 중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언뜻언뜻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하던, 언젠가 걸어가고 싶던 길을 걸으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즉, 그에게 평생의 머슴살이를 하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이에 나는 즉시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는 내 위아래를 훑어보기만 할 뿐 쓰다, 달다 일절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나를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즉, 나를 기꺼이 받아줄 수 없음을 단박에 읽어낼 수 있었다. 이에 나는 여기서 쉬 물러날 수는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곧바로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내가 나답게 살기 위해서는 그것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고 절박한 심정을 세세히 털어놓았다. 죽으라면 죽겠다고 내 삶의 전부를 내던지듯이 매달렸다.
처음엔 썩 달가워하지 않은 눈치를 보이던 그도 나의 간청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남들처럼 세상을 편하게 살 것이지 왜 고생을 사서 하려느냐, 나와 함께하는 생활은 만만치 않을 것이며 고통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텐데 정말 그걸 감내할 용기가 있는 것이냐, 중도에서 포기할 양이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일찌감치 단념하는 게 나을 게라고 말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면서 굳이 원한다면 일단 시도해보자는 게 아닌가.
이렇게 해서 그와 나의 주종관계가 이뤄졌다. 그는 전보다 더 위엄을 갖추며 자신에게 절대복종만이 있다고 단단히 못을 박으며 혹시라도 자신을 마치 죽마고우처럼 오래 전부터 잘 아는 듯이 상대하기 녹록한 존재로 여기지 말라, 교만과 완력으로 자신을 휘어잡으려는 시건방진 마음조차 먹지 말라고 말했다. 그 말에 나는 몇 번이고 그에게 허리를 굽히며 절을 했다.
그 이후 그는 내게 여러 가지 숙제를 내주었다. 너무나 할 일이 많았다. 역시 예견한 대로 순탄치 않은 나날이었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내게는 온통 자갈밭이요, 지뢰밭만이 눈에 띄었다. 수시로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의 심한 비바람과 눈보라가 치고 때로는 짙은 농무도 끼어 있어 대체 어디로 가야 할 지 참으로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숙제를 제대로 하지 못한 날엔 거대한 바위 앞에 선 듯 숨이 턱턱 막혔다. 지금에 와서 고백하지만 주종관계를 맺으면서도 나는 속으로 조금만 고생하면 차차 나아지겠지 하고 안이한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실상을 접할 때마다 갈수록 태산이었다. 단시일 내에 뛰어넘을 수 없는 큰 고개요 온 힘을 다해 밀어도 끄떡도 않는 단단한 바위와 같았다. 이에 나는 기가 질리고 맥조차 탁 풀렸다. 하여 그의 앞에만 서면 늘 주눅이 들어 전전긍긍하기가 다반사였다.
섣부른 선택이었을까?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본질과 실체에 다가가기가 여간 지난하지 않았다. 이런 절망감에 하루하루가 그야말로 지옥 같은 삶이었다. 그는 다혈질인 데다 냉혹한 성격조차 지니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진실이 담기지 않은, 그저 우격다짐으로 그의 몸단장을 할 때마다 그는 나에게 현기증이 날 정도로 추궁을 해댔다. 그러함에도 내 솜씨는 엉망이었다. 늘 답보상태에 머물렀다. 그게 나를 숨막히게 했다. 망연자실과 허탈, 당혹감, 자괴감이 날마다 나를 짓눌러 대었다.
마침내 견디다 못한 나는 그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는 그럴 줄 알았다며 나의 끈기와 인내력 부족을 타박하는 것이었다. 첫술에 배부른 게 어디 있느냐, 조금만 더 참으면 되는데 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 그는 언제든 생각나면 다시 돌아오라고 일렀다. 나는 그럴 기회가 없을 게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 듣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하지만 막상 갈 곳이 없었다. 그에게서 벗어나면 새처럼 날아갈 듯 자유로울 것이라 예상했는데 웬걸 그게 아니었다. 허전한 가슴과 함께 어떤 일을 하더라도 기쁨이나 즐거움을 맛볼 수가 없었다. 삶의 대한 진지함도 자리를 잡지 않았다. 그저 따분함만이 알게 모르게 스며드는 게 아닌가. 나는 그것을 떨쳐내고자 아무런 가치도 없는 세속적인 것에 자꾸 탐닉하거나 매몰되어갔다. 무엇 때문에 사는지조차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금싸라기 같은 세월을 무의미하게 흘려 보내기가 일쑤였다. 이래선 안 된다고 마음 속에서는 강력히 부르짖고 있었으나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대체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과 갈등이 날이면 날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가슴 속에선 아우성을 쳤다. 언제까지 부초(浮草)와 같은 삶을 영위할 것이냐, 당장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이다. 그때였다. 진정 내가 나답게 살고 있느냐는 것이 화살처럼 내 가슴속에 깊이 박히는 게 아닌가. 그와 동시에 환한 햇살이 사방에서 쏟아져 내렸다. 이에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목청껏 외쳤다. 그래, 내가 살 수 있는 길은 그에게로 다시 돌아가는 거야 하고 말이다. 그것은 물 떠난 고기의 신세가 얼마나 참담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끝에 내려진 결론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이로써 나의 기나긴 방황이 끝났다. 나는 그에게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쑥스러웠지만 머리를 깊이 숙이며 지난날의 내 잘못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진정 뱀이 허물을 벗듯 안개처럼 떠돌던 가식과 교만의 껍질을 훌훌 털어낼 수 있으리라고 보았던 것이다. 여기저기 입은 깊은 상처와 시퍼런 멍도 그에게 부끄럼 없이 내보였다. 그러자 전신으로 후련함이 속속들이 배어드는 게 아닌가.
나는 그에게 힘찬 재결합의 손을 내밀었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을지라도 끝까지 참고 견디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진작부터 그럴 줄 알았다며 내 어깨를 두드리며 냉큼 껴안는 게 아닌가. 그때 나는 다짐했다. 용렬한 재주밖에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라고.
이후 나는 단번에 위대해지겠다는 허욕을 과감히 떨쳐내었다. 사실 내가 그와의 1차 만남에서 오래 견디지 못했던 근인(根因)은 바로 그 놈의 허욕 때문이었다. 게다가 기초부터 착실히 배우지 않고 수박 겉 핥기 식으로 넘어가려 했던 자세였다. 그것은 족히 욕먹을 짓이었고 나로서도 떳떳하지 못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서 나 자신이 비겁하다 보니 그의 얼굴을 대하기가 부끄러워 도망치듯 뛰쳐나왔다고 하는 게 더 옳겠다.
새로운 각오로 임하자 나는 그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치열한 도전정신이었다. 아울러 진실한 나의 태도도 요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제가 그는 말했다.
“우선 참된 너 자신을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너 자신만의 진실한 목소리를 찾아야 한다. 진실이 담기지 않은 솜씨는 생명이 없는 나무와 다름없다. 고양이는 결코 죽은 쥐를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말을 명심해야 한다. 언제까지 남이 씹다 버린 껌을 도로 씹으려 하느냐. 네 스스로 발로 뛰고 땀을 흘려서 얻은 것만이 진실에 가까워진다. 산이 그리우면 산으로 가보고 바다가 그리우면 바다로 가보라. 생선 비린내를 맡고 싶으면 부둣가 어시장으로 가보라. 유충이 매미가 되려면 허물을 벗어야 하듯이 일상의 상투적인 껍질을 벗겨내야 한다. 결코 어설픈 몸짓이나 어정쩡한 발걸음이어선 안 된다. 무엇보다도 자신감을 가져라. 기왕에 시작한 일이라면 비와 바람을 견뎌낸 돌보다 더 단단한 열매를 맺으려고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 치열함이 없다면 감히 나를 안다고 하지 말라. 목숨을 건 승부사로서의 근성을 가져야 한다. 비바람 속에서도 꽃이 의연히 피듯이 말이다. 그렇다고 너무 서두르지 마라. 때로는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밥도 뜸이 들어야 제 맛이 나고, 제철의 과일이 아름다운 향기를 내는 법이 아닌가. 머릿속이 복잡하거든 잠시 쉬어라. 건강을 잃으면 공든 탑이 무너지듯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일이다.”
정곡을 찌르는 그 말에 나는 가슴이 뛰었다. 그랬다. 예전에 나는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는 자세를 취하지 않았고 따끔한 충고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내 방식대로 한다며 멋대로 하는 것을 능사로 삼았다. 그런 무책임과 불성실로 말미암아 아귀에 맞는 집 하나 제대로 짓지 못했다. 오르내리는 목재 계단은 늘 삐걱거렸고 대문도 잘 열고 닫히지 않았다. 왜냐하면 거기엔 내 체취가 들어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수치심과 자괴감에 나는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가.
그의 말을 듣고 난 후 나는 생활 속에 깊이 박혀있는 한 줌도 안 되는 체면이나 자존심도 모두 헌신짝처럼 내던져버렸다. 허위와 가식의 탈을 훌훌 벗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무엇이 두려우랴 하면서 지나온 세월을 이리저리 할퀴며 아작아작 물어뜯어보았다. 그리고 망망대해를 내려다보기 위해 아찔한 절벽 위에 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내 몸 속에 흐르는 순수하지 못한 피를 밖으로 깡그리 뽑아내어 따가운 햇살에 바짝 말리거나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뿌린 눈물의 냄새도 직접 코로 맡아 보았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도 가까이 다가가서 그 속을 짯짯이 들여다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때 환한 빛이 내게 다가왔다. 밑 빠진 두레박으로는 내면에 고여 있는 맑은 향기를 제대로 길어 올릴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위험이 닥치면 비겁하게 베돌던 방관자의 모습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이러자면 변죽만 울리거나 거죽만 보지 말고 본질적인 내면의 세계로 눈을 돌리지 않으면 안 된다. 내 몸 속에 피처럼 흐르는 삶의 원형을 말이다. 삶의 문제를 깊이 파고들어가 다루기 위해선 무엇보다 굳게 걸어놓은 고정관념과 허위의 빗장을 풀어놓아야 한다. 웃자란 잡풀을 걷어내듯이 나를 모조리 발가벗기지 않으면 참된 나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나는 하늘에 뛰어오를 듯 기뻤다. 그가 내게서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임을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감지할 수 있었다. 배알이 틀리는 세상일에도 나는 초연했다. 별것도 아닌 일에 목숨을 걸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나는 아직도 그를 제대로 만족시켜 주지 못하고 있으나 초조해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지적한 대로 순수와 진실을 바탕으로 그의 몸단장에 만전을 기하려 애쓸 뿐이다. 이따금 그가 내 손길로 애근히 일궈낸 자신의 말쑥한 차림을 거울에 이리저리 비춰보며, 바로 이거야, 이제 됐네, 더 이상 고칠 게 없군 하고 나의 수고를 언급할 때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을 얻은 듯하다. 늘 그가 강조하는, 비바람 속에서도 의연히 핀 꽃 한 송이를 찾아낸 듯이 말이다.
앞서 말한 대로 천당과 지옥을 오르내리는 듯한 그의 몸단장엔 기한이 없다. 운이 좋으면 몇 시간 안에 끝날 수 있지만 불운하면 몇 일이고 몇 달이고 걸릴 수 있고 몇 년이 흘러도 완성되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따라서 그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진땀을 빼거나 식은땀이 흐르는 날이 부지기수다. 스스로 밤을 하얗게 새우는 일도 있다.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가슴을 쥐어뜯으며 통곡해보기도 한다.
우여곡절 끝에 몸단장이 종료되면 그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 나는 구태여 그의 행방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게 오래된 습성이다 – 콧노래를 부르며, 언제쯤에야 돌아온다는 기약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린다. 이에 나도 한시름이 놓일 뿐더러 할 일을 다한 듯 홀가분해지는 마음을 가눌 수 없다.
하여 나 역시 그가 부재중인 틈을 타서 외출을 단행한다. 때로는 연락처도 남기지 않고 외박도 서슴지 않는다. 가능하면 이제껏 살아오면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곳으로 달려가는 경우가 많다. 산 위에 오르거나 냇가를 거닐기도 한다. 이유인즉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것에 대해서 깡그리 잊고자 함에 있다. 허구한 날 걸핏하면 그에게 당했던 어둡고 아픈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전개될 때마다 저절로 오열함으로써 그에 대한 분노와 원망을 말끔히 씻어내고 원래의 나를 찾기에 골몰한다. 즉, 내가 있어야 할 자리로 되돌아오기 위해서 말이다. 다음에는 어떤 솜씨로 그를 만족시켜줄 것인가. 기실 나는 이것 때문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도 나는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냄새를 느끼기 위해 혹은 생선 비린내를 맡기 위해 부둣가로 나가고 있다. 그의 말대로 남이 씹다 버린 껌을 도로 씹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아니, 대중없이 부는 바람 속에서도 의연히 피어 날 또다른 한 떨기의 꽃을 찾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게 더 옳겠다.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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