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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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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선
어느 날인가 구월사거리 근방에 위치한 수인선이라는 음식점에 모임을 갖은 적이 있었다. 처음 만나는 장소인지라 약도도 없이 전화를 통하여 일러준 대로 찾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변의 간판을 둘러보며 주위를 해매고 있는데 얼핏 수인선이란 간판이 보여 부리나케 달려갔었다. 찾았다는 안도감으로 잠시 숨을 돌린 후 천천히 간판을 다시 보았다. 수인선이란 상호와 나란히 그려진 소래다리에 열차가 지나가는 모습이 새롭게 보인다. 소래다리로 지나가는 열차의 그림을 보노라니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처럼 반갑다. 최면에 걸린 듯 잠시 정신이 몽롱하여 지고 다리도 굳어져 가는 것을 느낀다. 나에게는 그 그림이 과거에 묻힌 기억을 들추어내기에 충분한 기폭제가 되었을 것이다. 마침 내가 들어간 방에도 증기기관차가 검은 연기를 내 뿜고 힘차게 달려오는 대형 사진이 빛바랜 채 걸려 있었다. 분명 그것은 어릴 적 내가 타고 다니던 열차가 아닌가.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할 기관차가 바로 내 곁을 지나가는 듯 힘차게 달려가는 모습은 지금 막 소래다리를 지나려는 순간의 모습이었다. 음식점 이름을 수인선이라 지었다면 조금이나마 수인선에 대한 추억이나 적당한 식견이 있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주인을 불러 그 사진의 내력을 물어 보았다. 학창시절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이라기에 필름이 있으면 하나 뽑아 달라고 부탁을 하니 필름을 잃어버려 다시 뽑진 못한다며 미안해하였다.
수인선이라면 지금은 다니지 않아 인천에 사는 사람이라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라 짐작이 된다. 왜정시절 경기만 일대에서 생산하던 소금과 여주 이천 등지에서 경작한 쌀을 인천항을 통하여 일본으로 수송하려는 목적으로 부설한 철로가 수인선이다. 수인역이라 부르던 남인천역을 시발로 수원을 오갔던 폭 좁은 협괴열차가 다니는 철로였다.
나는 그 기차를 타고 통학한 수년의 세월이 있어 비록 사진이지만 소래다리를 넘어오는 열차를 보니 마음속에서 어린 시절의 모습들이 하나 둘 뽀얗게 떠오른다. 화물칸을 끌고 다니는 열차는 덤으로 객차 대여섯 칸을 달고 소래 건너 군자나 원곡 고잔에서 생산한 곡식과 채소는 물론 철따라 바닷가에서 잡은 생선들을 팔러 인천으로 올라오는 아주머니가 대부분이었다. 그 중에 학생과 직장인이 석여 아침에는 자못 손님들이 많아 출입구에 매달려가던 때를 기억한다. 비린내 나는 객차가 싫었던 것은 아니지만 승객들이 많지 않았어도 출입구에 매달려가는 것을 우리들은 좋아했다 .비릿한 바다냄새도 좋았지만 기차가 달릴 때 얼굴을 스치는 아침바람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아예 화물차를 연결한 고리 부분에 몸을 실려 가던 친구들이 있었으니 지금이라면 위험하다고 출발조차 하지 않았을 터인데 그 때에는 그것이 대수롭지 않은 풍경이었다.
수인선 열차는 그리 빠른 속력을 내지 못하여 언덕을 오를 때는 천천히 오르는데 용현 역을 출발하여 용현고개를 지날 때는 더욱 그러했다. 이때 제물포 방면이나 주안으로 가는 학생들은 뛰어 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조금이라도 학교에 빨리 등교하려는 마음을 알아서인지 승무원들이 뛰어내리는 것을 심하게 단속하지 않았던 시절이기도 하였다. 그 때에는 그 모습이 어찌나 멋있게 보였던지 나도 한번 뛰어 내릴 요량으로 마음을 단단히 먹고 친구들과 나란히 섰던 날을 기억한다. 임시 정거장이었던 논현역을 천천히 출발하는 열차에서 친구들이 뛰어 내리는 동작을 유심히 살피며 그 자리에서 속성으로 익혀 뛰어 내릴 자세를 취하며 왼발을 내밀었다. 발은 땅을 디딜 자세를 취하나 손은 손잡이에 힘을 더 쥐게 되니 손을 놓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말았다. 천천히 달리는 것 같던 열차는 내가 뛰어 내리려니 이리 빨리 달리는 것인지. 그리고 철로와 나란히 난 길이 이다지도 좁게 보이는지 발 디딜 틈도 없을 만치 좁아 보였다. 끝내 내리기를 포기하고서 홀로 소래역에서 걸어온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초등학교 시절의 소풍가는 모습도 어렴프시 떠오른다. 지금의 유수지는 남동염전 저수지의 일부였다. 유수지 끝에서 원인재 방향으로 가면 아직도 교각이 남아있는데 그 위로 기차가 다니던 남동다리이다. 요양원(적십자병원) 근처의 야산으로 소풍을 나와서 즐겁게 놀고 돌아갈 때에는 선생님의 통제가 느슨해지니 너도나도 지름길로 기차가 다니는 남동다리를 건너가는데 우리의 친구 순식이는 다리를 건너기가 겁이 났나 보다. 소풍 올 때 함께 걸어온 저수지 제방 길을 혼자서 뛰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실긋 웃던 기억도 난다. 물론 우리들은 두고두고 학교에서나 마을에서나 그를 볼 때마다 순식이를 놀려대었다.
서해안 일대의 염전이 사라지고 남동 염전도 남동공단으로 바뀌니 수인선의 운명도 자신이 지나가던 곳에 있는 염전들이 없어지는 것처럼 사라지는 것일까. 남인천역에서 출발하던 것을 송도역으로 단축하여 운행하더니 95년이 지나고 나서는 그나마 운행을 중단한 수인선. 그 수인선을 다시 복원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반가웠던지. 허허벌판이던 연수동 일대가 아파트 숲으로 변하고 요즈음은 논현동까지 신도시로 개발되었으니 예전에 지상으로 다니던 열차를 누가 환영할 터인가.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지하로 설치해 달라는 요구가 대단하였다. 사람들이 별로 살지 않는 곳에는 철로가 지상으로 되건 지하로 되건 시비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수동과 논현동은 이미 도시의 중심이 되었으니 철로를 지상으로 설치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수차례의 공청회를 열어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였지만 적당한 결말이 나지 않으니 수인선의 복원은 차일피일 밀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세월에 서해안을 달릴지 염려가 되는데 송도를 기점으로 인천역까지는 지하로 소래역까지는 지상으로 결말이 난 모양이다. 사실 철로가 지상으로 설치하든 지하로 만드는가는 시행기관의 의지가 결정적이지만 대도시가 형성되고 환경을 중시하는 요즈음의 추세로 보면 도시 한가운데를 지상으로 관통하는 것은 미래를 생각하는 마음이 부족한 것은 아닐지. 천만년 소중히 지녀야 할 것이라면 비용이 추가되더라도 도시의 미관과 발전을 위하여 지하로 노여야 할 것이었다. 아무튼 지상으로라도 빨리 건설되었으면 하였는데 설치되는 역의 위치로 주민과 시행자간의 위치 선정에 대한 시비가 생겨 또다시 시간을 끌고 있다. 원래 계획했던 자리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에 대한 불만인 것이다. 역이 생기면 그 지역의 생활은 편리해지고 편리해진 만큼 땅이나 건물 시세도 올라가는 것이니 자기들의 건물과 이웃한다하여 반겼던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옮긴다하니 원래의 계획대로 설치하라는 시위일 것이다.
일번지에 생기나 이번지에 생기나 관계없는 사람들은 무어라 말도 못하고 되어가는 추이를 바라만 보고 있자니 마음만 답답하다. 일을 하다보면 더 좋은 방안이 떠오르기도 하고, 하고자 했던 방식이 잘못 설계될 수도 있어 설계변경을 하는 경우는 이해하지만 처음부터 역 하나 제대로 선정하지도 못하고 불협화음의 원인을 제공하다니 딱한 일이다. 원안대로 추진하든지 반대하는 사람들을 잘 설득하여 훌륭한 전철이 등장하기를 바랄 뿐이다. 어떠한 것이건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 지는 것임을 주민들도 잘 알고 있는지라 언젠가 분쟁의 실마리는 풀릴 것이니까.
그날이 오면 나는 송도역에서 전철을 타고 우선 남동역에서 내려 전에 걸었던 길을 따라 걸어가고 싶다. 개흙으로 곱게 다져진 길을 걸어가면서 지금은 다 사라져서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것이다. 소금창고에 가득한 소금이 열린 문틈으로 흰 살결을 뽀얗게 내어 보일 테고 갓 퍼 올린 소금은 물이 뚝뚝 떨어져서 금방 잡은 생선처럼 싱싱하여 소금의 진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금파리를 깔아놓은 염전에서는 소금이 점점 자라고 있을 것이다. 뜨거운 햇볕에서 자란 소금들을 더 크게 자라도록 알맞은 방으로 옮기려고 염부가 쓰레질 할 때마다 사각사각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연신 흘러내린 땀을 수건으로 닦으며 물을 푸는 염부의 모습도 볼 것이다. 아마 이때쯤 한화에서 퇴근하는 여사원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왜 그 아가씨들을 그리 놀려댔는지 그때의 짓궂은 장난을 사과하고 반가운 마음으로 손을 흔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전철을 타고 소래다리를 힘차게 달리고 싶다.
군자를 지나 일리, 야목을 거쳐 고색에서 수원까지 달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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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언님의 댓글
나의 Wife는 6년간 수인선으로 통학을 하며 고충과 애환이 많은 추억의 수인선였다고 많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추억의 수인선이 다시 태어난다니 반갑구요. 기대 합니다.
윤용혁님의 댓글
대학시절, 약대후배들과 추억의 수인선을 달리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좁은 협궤를 털컹거리며 달리는 그 모습이 아련이 떠 오르네요.
좋은 글 감사드려요.
이동열님의 댓글
수인선이 그립습니다,,,새우젖냄새나는 좁은 객차안,,,,기차가 서기전에 뛰어 내리던,
이동열님의 댓글
<EMBED
src="http://mediafile.paran.com/MEDIA_2122338/BLOG/200508/1125048320_김연숙 - 고니-통기타라이브.mp3" loop="-1" volume="0">
오윤제님의 댓글
형수님도 수인선을 타셨군요. 어쩌면 얼굴이라도 보았을지도 모르겠네요. 혁이 후배님은 기차 연결하는 곳에 탄건 아니겠지요? 정말 특등칸입니다.
이연종님의 댓글
수인선 통학생들은 막차시간에 쫒기곤 하였기에 종례는 물론이고 청소도 당연히못하고 갔지.해서 지금도 만나면 중고시절6년동안 청소한번 하지않은 놈덜이라고 놀리곤했던 생각이 나누먼,물론 지각 또한 면죄였지...인고는 가까워서 좀 나은편이었는데 동산이나 제고는 많이 힘들었을거야...^)^*
오윤제님의 댓글
어찌 아시나요? 아참 조원오 선배님이 계셨군요. 몇 번 보이시더니 보이지 않네요.
劉載峻 67回님의 댓글
집이 인천 여고 앞 전동이었던 전 전혀 모르는 내용이나 윤제 아우님의 수려한 글 솜씨에서 정취가 물씬 풍겼음을 감지케 합니다 연종아 정말 그랬냐? 동렬 아우 노래 참 좋군요 진언 형님의 근면하심 본 받겠습니다 원오가 수인선 통학을? 혁이 아우도 오셨군
오윤제님의 댓글
저도 노래 좋다고 생각했는데 선배님도 같은 생각이시군요. 원오 선배님은 논현하교 몇 않되는 동문이셨지요. 위분은 아래 사람 잘 알지 못하나 아랫사람은 위분들을 알게되지요.
이연종님의 댓글
수인선은 그래도 좀 나은편이야,,,개건너(서구)에서 다니던 동창이 둘 있었지 그중 하나는 해군사관학교26기로 제독으로 예편하고 현재 방위사업청차관으로 재직중인 김종민이거든..야들은 날씨가 않좋을때는, 점심시간에 출석하고 바로 집으로 돌아간적도 여러번 있었지...^)^* 아~ 옛날이여~~~ .
윤인문님의 댓글
수인선 협궤열차<img src="http://www.inkoin.com/enjoy/img_upload/suin.jpg">
윤인문님의 댓글
수인선 철길<img src="http://www.inkoin.com/enjoy/img_upload/suin2.jpg">
오윤제(69회)님의 댓글
아하! 우리는 기동차라 하여 승객만 태우던 달랑 두대로 운행하던 것이지요. 증기기관이 아닌 가솔린 이었던가.
이환성(70회)님의 댓글
수인선서는 뭘 드셨나요..수인선땜시 요즘 시흥정왕동이 뜬다던데..가수인지 탈랜트인지 경인선이라고 있었죠?..선배님 뵐 면목이 없습니다..ㅎㅎ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