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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몸으로 얘기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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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우 곤
오전에 눈이 흩날리더니 오후에 들어서자 멈췄다. 그러자 바람이 코끝이 아리도록 매섭게 분다. 한동안 날씨가 포근하기에 머지않아 봄이 올 것이라는 성급한 기대가 보기 좋게 무너지고 마니 쓴웃음이 나옴을 어쩌지 못한다. 이렇듯 세상일이란 예측불허의 변수가 요소요소에 깔려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속히 희망 찬 봄을 기다리는 이 시대의 절박한 갈망이 언제까지 더 연장되어야 하는 것인가에 가슴만 답답할 뿐이다.
도처에 보이는 헐벗은 나무들 속에 오로지 이가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이고 서있는 소나무만 푸르다. 마음 같아서는 느긋함과 나다움의 자세를 견지하며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으나 어째 세상 돌아가는 형편은 갈수록 발걸음을 휘청거리게 하고 가슴만 저리게 하는가. 혼탁한 세상에 물들지 않으려는 몸부림과, 먹고 살기 위해서는 더럽고 치사하더라도 아부하고 아첨하며 버틸 대로 버텨야 한다는 대세의 흐름에 순응하는 게 정도라는 얼토당토않은 말에 더더욱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말고,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수없이 되뇌며 먼 훗날을 위해서 참고 또 참자고 주먹을 불끈 쥐면서도 때때로 시답지 않고 꼴 같지도 않는 일에 고개를 숙이며 내 자존심을 꺾어야 하는 것에 진정 내가 나답게 살고 있는가 하는 자조 섞인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이렇게 세월을 낭비하다간 죽도 밥도 안 되리란 결론도 내려지지만 먹고 사는 문제가 걸림돌로 작용할 때마다 수학방정식을 푸는 것보다 더 어려움을 절실히 느낀다.
겨울에 소나무의 푸르름이 돋보이듯이 나도 수많은 인간들 속에 푸르름을 가져보겠다고 욕심을 부려보지만 결코 쉽지가 않다. 앞서 얘기했듯이 도처에 깔려있는 예측불허의 변수 때문이다. 이제는 알몸으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흔치 않다. 저마다 제 앞가림하기에 급급하기 때문이다. 생활의 여유라는 것 즉, 나 자신이 누구인지 찾아보겠다는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한 채 그날그날을 보내고 만다. 여기에 무슨 삶의 의미가 있겠는가. 갈수록 버거워지는 생활의 무게 앞에 무력해지는 정신적인 삶이여!
어제는 문인협회 총회가 있어 여러 회원들과 어울려 밤이 늦도록 거나하게 술을 마셔댔다. 그런데도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 알몸으로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기 때문일까 갈수록 정신이 맑아지는 게 아닌가. 진실과 순수로 가득 찬 가슴들이 서로 스스럼없이 맞닿으니 더 그랬다. 마음이 가난하지 않으면 문학을 할 수 없다고 누가 먼저 랄 것 없이 결론을 내리며 훌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바로 그것이었다. 생활의 윤택함이란 정신적인 것이 물질적인 것보다 우위에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시간이나마 가졌다는 게 발걸음을 가볍게 하였다.
바람이 점점 맵다. 가슴조차 헤집고 들어오는, 점점 무거워지는 생활의 무게. 아니, 흡사 얇은 얼음판을 딛고 가는 기분이다. 그 아슬아슬함이 결국 인생이란 말인가. 기껏해야 100년 안팎의 삶인데 꼭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에 나오는 여주인공 '잔느'의 고백처럼 '인생이란 그리 즐거울 것도 없고, 그리 슬플 것도 없다'는 말처럼 그저 흘러가는 물처럼 살면 그뿐인데 말이다.
오늘따라 소나무의 푸르름이 유난히 부럽기 만하고, 그 소나무와 알몸으로 얘기하고 싶은 욕구가 불쑥불쑥 솟구쳐 오름은 왜 일까. 그것은 을씨년스러운 생활의 무게에서 벗어나 보겠다는 일종의 몸짓이기도 하겠지만 내게 이것조차 없다면 오늘 하루도 헛되이 보내고 마는 꼴이 아니겠는가.
(2007년 1월)
댓글목록 0
윤인문(74회)님의 댓글
진작가! 언제 목욕탕이나 찜질방에서 알몸으로 만나봐야겠구먼..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