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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작 - 개가 개답게 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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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가 개답게 사는 세상<?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진 우 곤
이따금 개가 주인이나 행인을 물어 죽이는 사건을 접할 때마다 씁쓸하기 짝없다. 예로부터 개는 주인에게 충직하고 믿음이 있으며 심지어 잡귀까지 물리치는 가축이라고 한다. 아무리 주인에게 구박을 받을지라도 결코 덤벼들지 않을 만큼 주인에게 대한 순종이 그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다.
개가 위급에 처한 주인을 살린, 즉 보은(報恩)에 관련된 다음과 같은 구슬픈 이야기가 있다.
--- 전북 임실의 ‘영현(寧縣)’이라는 곳에 ‘김개인(金盖仁)’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는 매우 영리한 개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이웃 마을에 볼일이 있어 집을 나서는데 개도 주인을 따라 나서는 게 아닌가.
잔칫집이라도 들렀는지 모르지만 밖에 나간 주인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잔뜩 술에 취해서 집으로 돌아오던 중 산기슭에 누워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런데 갑자기 산불이 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불은 주인과 개가 있는 곳으로 점점 번져오는 게 아닌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위험을 느낀 개는 주인을 구하고자 온 힘을 다해 짖었다. 하지만 주인은 깨어나지 않았다. 옷깃을 물고 끌어도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효과가 없자 개는 산 밑으로 달려 내려가 시냇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주인이 누워있는 곳으로 돌아와 물에 젖은 자신의 몸을 풀밭에 내던져 그 주위를 빙빙 돌면서 풀을 적시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반복했던가. 덕분에 주인은 살아났으나 개는 탈진하여 애석하게도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참 후에 주인이 깨어났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자기를 따라 나섰던 개가 죽어있는 게 아닌가. 어떻게 해서 죽었는지 헤아려지자 그의 가슴은 발기발기 찢어질 것 같았다.
하여 주인은 자신을 살리고 죽은 개를 위하여 마을 옆에 무덤을 만들어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는 그 무덤 옆에 개의 무덤임을 표시하기 위해 지팡이를 꽂았다. 그런데 그 지팡이가 나무가 되었다.
이후 나무가 크게 자라고 그 마을도 커진 뒤 ‘오수(獒樹)’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그 마을 이름이 ‘오수리(獒樹里)’ 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견분곡(犬墳曲)’ 즉, 개의 무덤에 대한 노래가 바로 이것인데 훗날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읊었다.
, “사람은 짐승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만, 공공연히 큰 은혜를 저버린다네. 사람으로서 주인을 위해 죽지 않으면, 개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겠는가?” ---
이 얘기는 고려시대의 정치가인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에 실려 있는 것으로서 전설이냐 아니면 역사적 사실인가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여기서 ‘개나무’라는 뜻인 ‘오수(獒樹)’라는 지명은 현재 ‘전북 임실군 둔남면 오수리’라고 한다. 즉, 개를 기념하기 위해 붙인 지명이라 아니할 수 없다.
비록 짧지만 일명 ‘오수의 충견(忠犬)’이라고 하는 이 이야기를 몇 번씩 읽어도 왜 물리지 않는 것일까. 아니, 곱씹으면 씹을수록 향기마저 느껴진다. 이는 아마도 개로부터 주인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울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긴 지금의 세상은 어떻게 된 게 개가 주인 알기를 개 오줌만치도 여기지 않고 오히려 우습게 알고 심지어 겁 없이 물어 죽이는 판이니 별 희한하기 짝없다.
나는 앞서 언급한 ‘오수의 충견(忠犬)’을 보은(報恩)에 아랑곳하지 않고 당리당략에만 치우치는 작금의 우리 정치판에 대한 일종의 경종(警鐘)이라고 비유하고 싶다. 특히, 개가 주인 노릇을 하려고 드는 것처럼 제 본분을 망각하고 독선과 오만으로 제왕처럼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위정자들을 볼 때마다 이 얘기가 생각나는 것이다. 말로는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늘 밥 먹듯이 말하지만 한낱 구두선(口頭禪)에 불과한 경우가 허다하지 않았던가.
그들의 입후보 당시를 생각하면 입맛이 쓰다. 국민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개처럼 충직한 심부름꾼이 되겠다며 반드시 자신을 뽑아 달라고 허리가 접히도록 절을 하며 호소하지 않았던가. 그런 때는 언제고 일단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물론이요 도지사나 시장, 하다못해 시의원까지 당선되고 나면 태도가 180도로 표변(豹變)하여 마치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이라도 손아귀에 움켜쥔 양 목을 꼿꼿이 세우고 거들먹거리거나 으스대며 고관대작처럼 대접받으려 하는 이가 많다. 참으로 적반하장이 따로 없다. 이건 순전히 개가 주인을 무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충직이 아니라 배반이요, 보은(報恩)은커녕 배은(背恩)이라 아니할 수 없다.
중차대한 법안을 국회에서 신중한 검토나 논의를 거치지 않은 채 단지 자기편의 쪽수가 많다는 것을 무기로 삼아 온갖 편법을 동원하여 날치기로 통과시키는 것을 종종 볼 수가 있다. 이는 하루하루 버겁게 살아가는 국민의 입장에서는 흡사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꼴이요, 둔기로 뒤통수를 세차게 얻어맞은 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상식 밖의 그릇된 일을 자행하고도 그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잘못을 남에게 전가시키다 못해 덮어두려거나 얼버무리려고 혈안이다. 또 그들의 상용 수법인 견강부회(牽强附會)와 아전인수(我田引水)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이에 시시때때로 구토가 나고 분노가 끓어오른다. 왜 민주주의의 근본인 정상적인 절차를 따르지 않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지 못해 안달인가. 진정 이 나라의 주인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국민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이 있는 게 아닌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물론이요 도지사나 시장도 국민투표에 의해서 선출된다. 따라서 선출된 그들은 단지 국민들의 심부름꾼에 불과하다. 결코 주인이 아니다.
과거 10년 동안 국민들은 속고 또 속아왔다. 하루속히 사회적 안정과 경제의 회복을 간절히 바라건만 그때마다 정부와 여당의 생각은 물과 기름처럼 영 엉뚱한 곳에 가 있지 않았던가. 허구한날 입만 열면 개혁, 개혁 하고 부르짖으며 요란법석을 떨었지만 결국 자가당착이라는 딜레마에 빠져 헤매기가 다반사였다. 구호만 무성했지 실속 없는 실패작으로 끝나지 않았던가.
그것은 자업자득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뜻을 제대로 살펴서 정책에 반영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들 입맛대로만 꾸려가려고 한데서 기인한 것이다. 마치 물가에 가지 않겠다고 발버둥치며 버티는 말을 억지로 끌고 가려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그게 먹히지 않으면 온갖 오기와 생떼를 쓰다 못해 국민들이 무식해서 그렇다고 화살을 국민들에게 돌리지 않았던가. 이러고서 무슨 균형적인 발전을 기대하며 밝은 희망을 품을 수가 있단 말인가.
모름지기 잘하는 정치란 국민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겸허하게 귀담아들어야 한다. 그 속에서 절실하게 필요한 공통 분모가 무엇인지 찾아내어 올바른 방향의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함에 있다. 그게 정치의 본질이요 상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 주인을 지키고, 위기에 처하면 주인을 구해야 하는 개의 본분을 망각한 채 어쩌자고 늑대나 여우새끼처럼 주인을 속이고 물어뜯고 호가호위(狐假虎威)처럼 간교한 수법을 동원하여 주인 행세를 하려고 기를 쓰는가.
이제는 주인의 진정한 뜻을 묻지 않고 늘 써먹어왔던, 우격다짐으로 제멋대로 하는 정치는 제발 그만두었으면 싶다. 실효성 없는, 국민을 짜증나게 하고 불편하게 만들며, 피로를 느끼게 하는 저질의 정치는 걷어치워야 하고, 무리수나 꼼수도 과감히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결단코 순리가 아니요 역행이기 때문이다. 민심은 천심이라고 했듯이 민심이 노하면 천길 벼랑으로 떨어질 것을 각오해야만 한다. 더 이상 민심 이반이라는 철퇴를 맞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할 뿐이다.
오늘도 매스컴에서는 개가 주인을 무는 장면을 단골 메뉴로 내놓고 있다. 선량한 국민들은 하루하루 버텨나가기가 고달프기 그지없는데, 어쩌자고 만나기만 하면 진흙 밭의 개싸움처럼 탁상공론이나 말장난, 중상모략, 흑색비방, 심지어 시정잡배들이나 할 수 있는 폭력이 난무하는 추태를 보이며 허송세월하고 있는가. 밝은 미래에 대한 청사진의 제시는커녕 오로지 자기들만의 구복(口腹)을 채우려 들고 명리(名利) 추구에만 급급해하니 지나가던 개도 웃을 꼴불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개만도 못한 놈들이 정치한다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지 말았으면 하는 게 간절한 바람이건만 그게 그리도 쉽지 않은 것인가.
올해는 4월에 제18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다. 그간 정치에 식상한 유권자들이 얼마나 자신에게 주어진 신성한 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할 지는 미지수다. 제발 정치가 국민을 위한 것임을 제대로 알고 살신성인(殺身成仁)할 수 있는 대범한 선량(選良)들이 대거 뽑혔으면 좋겠다. 만일 그 나물에 그 밥처럼 과거와 똑같은 복사판이 재현된다면 국민은 더 이상 주인을 몰라보는 개만도 못한 이들이 정치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뿐더러 굳이 투표해야 하는가 하고 주저주저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아, 언제 우리는 진정 개가 개답게 사는 세상을 볼 수 있을까.
(2008년 1월)
댓글목록 0
윤인문님의 댓글
見物生心이라는 사자성어가 이런데서 생긴 것일까?
000님의 댓글
개 같이 사는 집 우리집입니다.개가 조카고 성격,언변 모두 개 개가신인 집
이연종님의 댓글
4년을 또 기다릴수밖에~~~
崔秉秀(69回)님의 댓글
개를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서 - 으뜸인 사람 -
69회 별명이 `똥개`라는 동창이 있습니다..
계양산 아래서 지금은 2마리 키우고 있지요.
가이가 사람보다 더 나아서 키운다나???
이동열님의 댓글
남원 오수에 가면 충견탑이 있는데 바로 거기서 30미터쯤 떨어진곳에 유~~명한 보신탕집이 있습니다.지금도 있는진 모르겠으나,,,진짜루,,,
이환성(70회)님의 댓글
70회도 별명이 `똥개`라는 동창이 있습니다..
그는 강아지 두마리 로고달린 티샤츠만 고집합니다
우리 愛 멜주소가 ddonggai 했다가 ddonggaing 로 바껐답니다
진우곤작가님 글올린후 다시 댓글을 돌봐주세요..
옛적 우리 강아지는 항상 반갑다고 꼬리칩니다
복술머린 아니지만..
항상 감사드립니다..
윤인문님의 댓글
모두가 사람이 사랍답게 사는 방법을 많이 연구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