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가방속에 아버지 가방이 들어있다.
어려서부터 잘 먹어 튼실한 형이 천구네 집 앞에 빙그레 웃으며 서있다. 강화 산골동네에서 인천의 명문 중학교에 당당히 합격을 한 것이다. “형 붙었어?” 코를 벌름거리며 형은 “어. 붙었어.” 학교에서 일찍 퇴근하신 아버지로부터 합격소식을 들은 터라 형의 입이 귀에 걸렸다. 뜀박질에는 소질이 없어도 웅변을 잘했고 초등학교를 2등으로 졸업한 형이 합격의 영광으로 드디어 물설고 낯 설은 인천의 유학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인천은 아버지에게나 형에게 사연이 참 많은 곳이었다. 육이오 전쟁이 끝난 직후 아버지는 잘 다니시던 학교를 그만 두셨다. 쥐꼬리 같은 월급으로 애들 교육시키고 먹고 살려니 희망이 없어 보였다. “여보게 자네, 언제까지 내 누이랑 시골구석에서 썩으려오? 인천에 와서 큰돈을 벌지 그래." 하는 세무 공무원으로 잘 나가고 있는 손위 처남의
권유로 사표를 내고 인천으로 무작정 올라가셨다. 평생 학교에 들고 다니실 줄만 알았던 선생님 가방을 내 던지신 것이다.
강화 건평과 인천을 오가는 여객선에 쌀과 나무장작 그리고 얼마의 돈을 가지고 아내와 어린 자식 둘을 대동하여 인천의 겨울 바닷가 하인천 부두에 내리니 매섭게 불어대는 바람은 앞날의 고생을 알리는 서곡에 불과했다. 배에서 짐을 부릴 때 장작이 흐트러지니 창피하고 귀찮은 나머지 막내로 그저 귀엽게만 자란 아버지는 그걸 그냥 선창가에 버리고 용현동 셋집으로 향했다.
그해 겨울은 몹시 추웠다. 인천세무서에 말단 세무직원으로 취직한 아버지는 전쟁직후의 세금징수 업무가 성격상 맞지 않아 마음고생만하다 얼마 안 있어 그만 두고 말았다. 오히려 월급은 선생보다 적었다. 할 수 없이 손위 처남은 누이동생을 보아 큰돈을 들여 노동조합의 일을 맡기셨다. 그러나 부두 하역작업의 막노동을 하는 인부들은 사나웠고 학생들만 가르치다 온 선비 같은 아버지는 늘 그들에게 욕설과 함께 멱살을 잡히기 일쑤였다. 당시 큰 화물선이 들어와 부두에 일감이 넘치면 노동자들도 돈을 집에 가져갔지만 전쟁 직후라 그런 배가 오지 않아 인부들은 무료함과 배고픔으로 애꿎은 아버지만 붙들고 돈을 달라 괴롭혔다. 마음이 약하신 아버지는 그들이 불쌍해 선금을 내 주었으나 한 푼도 돌려받을 수가 없이 결국 큰돈을 떼이고 말았다.
오늘일까? 내일일까? 미국서 온다는 배는 들어오지 않았고 부둣가에는 갈매기만 구슬프게 울었다. 용현동 고개를 넘어 오시는 아버지의 어깨는 늘 축 처져 풀이 죽어 있었다. 손위 처남을 쳐다볼 면목이 없었다. 실업자인 빈 털털이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서너 살의 형은 주인집 또래아이를 때려 울렸다. 방세도 안 받고 세를 준 주인집이 고마운 판에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저녁이면 돈푼이나 버는 다른 집은 고기 국을 끓이는 냄새로 온 집안이 진동되어도 어머니는 시장 통 남이 다듬고 버린 시래기를 주어다 국을 끓일 때면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아니 서러웠다. 시골 텃밭에 쌓이고도 남는 것을 여기까지 와서 사서 고생이니 가슴이 마구 무너져 내렸다. 하루는 물을 사려고 지갑을 열어 보니 돈이 한 푼도 없었다. 참 이상하였다. 여태까지 있던 돈이 왜 없어졌을까? 한참을 뒤진 후 형을 찾으니 형은 시장 모퉁이에서 풀빵을 사서 배가 터지도록 먹고 있었다. 어머니가 쫒아가니 형은 냅다 손에 쥐고 있던 잔돈까지 시궁창에 버리고 죽어라 도망을 쳤다. 도저히 따라 잡을 수가 없기에 주위 사람들에게 저 녀석을 잡아 달라 소리치니 어른 한 분이 꼭 붙들어 주었다. 집으로 끌고 와서는 닥치는 대로 형을 때렸다. 얼마나 때렸는지 형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렇게 때린 어머니의 심정은 오죽 마음이 아팠으랴. 돈이 없어 어제 애가 먹을 것을 사달라고 그렇게 졸라도 그럴 형편이 아니었기에 더욱 그랬다. 주인집 아들이 맛있게 무얼 먹는 것을 보고 형은 미닫이 문틈으로 물끄러미 들여 보다가 그 아이가 문을 확 닫는 바람에 머리를 쪄 피가 맺혀 자지러지게 운 날도 있었다. 어느 때는 한 나절을 풀빵 굽는 곳에서 턱을 괘고 죽치고 있어도 풀빵장수는 그 잘 못된 풀빵 하나를 형에게 건네주지 않았다. 홧김에 정신없이 형을 때렸어도 인정이 많은 어머니는 애처로워 아들을 부둥켜안고 한없이 울었다. 서러움이 북받쳤다.
다음날 어머니는 강화에서 가져온 쌀이 점점 떨어져 가는 중에 독에서 큰 마음먹고 쌀을 덜어내어 강냉이를 튀겨주니 형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데 그러던 형이 갑자기 없어졌다. 어머니는 놀라 정신없이 시장을 뒤지고 이웃집에 물어봐도 도통 형을 봤다는 사람이 없었다. 겁이 터럭 내려앉은 어머니는 집에 들어와 거의 실성하다시피 탄식을 하고 있는데 방 저편 구석의 쌀 강냉이 자루가 부스럭거리며 꿈틀거리는 것이 아닌가? 달려가 헤쳐 들여다보니 형이 거기 들어 앉아 강냉이를 퍼 먹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너무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웃음밖에 안 나왔다.
그러나 어머니는 속병과 화병이 겹쳐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그날 저녁 어머니는 아버지가 집에 돌아 오시자마자 목 놓아 울면서 담판을 지으셨다. 당신이 시골로 내려가 학교에 복직을 하지 않으면 나는 이 자리에서 죽고 말겠노라는 최후통첩에 아버지는 손을 들고 정든 고향집 강화로 내려가셨다. 여필종부 하시던 어머니의 반격에 놀라 큰 결단을 내리셨던 것이다. 고생만 하시다 다행이도 복직이 되어 선생님 가방을 다시 들게 되었고 안정된 가방끈을 놓았을 때 얼마나 비참해 지는가를 뼈저리게 느끼셨다.
그런 곳 인천에 10년 만에 다시 온 형은 자취방을 찾아 전전하였다. 간신히 명문고에 진학한 형은 급기야 일학년 때 유급을 하고 말았다. 아래 학년 후배들과 같이 공부하려니 창피했고 뒤에서 노는 문제아였다.
"백목가루를 먹는 아버지를 생각하라."는 담임선생님의 말씀에 과민반응을
보여 학교를 그만두고 취직을 하겠다고 하니 아버지는 얼마나 실망하셨을까? 형의 책가방속에는 스탕딸의 “적과 흙”,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라는 책이 들어 있었다. 학교에 대한 불만이 가득하였다. 그래도 방학이 되면 책가방에 교과서를 가득 넣고 고향집으로 내려왔다. 공부 못하는 학생이 가방만 크다고 배가 늘 불러 있었다. 방학이 끝나 인천으로 돌아 갈 때면 누런 양회포지에 반듯하게 꾸린 주인집에게
전할 백설기 떡이 형의 책가방 가운데에 어김없이 들어 있었다. 그러니 형의 책가방은 터질 듯 배불뚝이가 되곤 하였다. 아버지의 덮개가 달린 검은 색 가방은 점점 회색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월급쟁이 갈급쟁이라는 선생님 월급을 유급한 자식의 하숙비와 학비로 거의 다 털어 넣고 있는데도 희망이 안 보였다.
그 와중에 일진이 아주 안 좋은 어느 날, 아버지는 형의 학비와 하숙비를 그 가방에 가지고 인천행 완행버스를 타셨는데 가방털이범에 걸려 그 돈을 모두 잃어버리고 낙담을 하여 차에서 뛰어 내려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후 형은 재수, 삼수, 대학입시마다 늘 떨어지니 아버지는 매달 빈 월급을 타신 거나 마찬가지였다. 형에게 돈을 부치고 나면 아버지의 가방에는 빈 월급봉투만 남아 배를 곯고 있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낙심하지 않으시고 섬 근무를 마다않으며 가족과 후학양성을 위해 묵묵히 말없이 검은 색 가방을 절대로 내려놓지 않으셨다. 옛날의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로 굳은 결심을 하신 것이다.
그 후 아들 삼형제의 대학 등록금을 대시려니 더욱더 허리가 휘청 거리셨다. 아랫마을 신 서방네서 매번 돈을 빌리셨다. 그리고 다음 달에 일부를 갚으셨다. 그런 식으로 큰 아들인 형을 대학까지 졸업을 시켰는데 취직은 안하고 고시공부에 매달리니 아버지의 시름은 언제 끝날지 깜깜하였다. 이제 아버지의 가방은 낡아 보잘 것 없었다. 점점 말라 엉덩이뼈가 뾰족하시던 아버지는 터미널에 떨어진 동전마저 아쉬워 하셨다. 그러던 차 내가 운 좋게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아왔다. 아버지의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고생한 보람을 잠시 맛 보셨다. 형도 죽어라 공부한 결과 공무원 시험에 당당히 합격하여 코를 벌름거렸다. 일이 하나씩 풀리기 시작하였다. 공무원 자녀들에게 학자금 대출제도도 새로 생겨났다. 한시름을 더신 것이다.
그렇게 길고 긴 아버지의 선생님 가방도 혈색이 돌아 원기를 찾아가고 있을 무렵 어느덧 시간이 흘러 아버지는 정년퇴임을 맞으셨다. 정확히 44년 10개월의 교편생활을 마감하시는 날이 되었다. 회고사를 하시는 아버지의 어깨가 그날따라 유난히 떨렸다. 형은 뒷좌석에서 연신 눈가를 훔치고 있었다. 다음날도 아버지는 평소대로 일어나 가방을 챙기셨다. 어머니가 놀라 “여보, 어디 가시려고요?” 아버지는 쑥스러워 하시며 낡고 낡은 검은 색 가방을 힘없이 내려 놓으셨다. 습관처럼 움직이시다 정신을 차리시고 회한의 그 해어진 가방을 물끄러미 쳐다보셨다. 이제 가방을 드시고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그리고 바쁘다는 핑계로 내려오지도 않는 자식들을 용내뜰 다리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계셨다. 점점 기다림에 익숙해지고 계셨다.
안정을 찾으실 만하니 어머니의 건강이 악화 되셨다.
아버지의 박봉에 도움이 되려고 일꾼을 사지 않고 더운 여름날 농약을 치시다
쓰러져 기관지를 다 버려 평생 기침이 끊일 날이 없는 어머니, 육이오 전쟁 통에
학교에 태극기를 올리시다 인민군에 붙들려 죽음의 문턱까지 가셨던 남편을
기지를 발휘해 구해내신 어머니가 겨울날 새벽기도를 나섰다가 집을 못 찾으신
것이다.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치매가 드셨다.
아버지는 치료에 정성을 쏟아 부우셨다.
쑥스럽다며 어머니와 생전 손잡고 걸으시지도 않던 분이 다소곳 손을 잡고
동행이 되셨다. 좋을만하니 신경변성 치매에 걸리신 당신의 사랑하는 아내의 병수발을
아버지는 자처하셨다.
그리고 자꾸만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를 무척이나 안타까워하셨다.
어떤 날은 골방에서 울며 기도도 하셨다.
자식들에게 짐이 되기 싫어 시골 성당에서 사제회장으로 제단을 지키다
어머니와 같이 가시겠노라는 굳은 약속도 결국 자식들의 간곡한 청에 못 이겨
정든 고향집 대문에 자물쇠를 굳게 물리고 어쩔 수 없이 누님 댁 옆으로
오시게 되었다.
깊은 잠에 빠져 침묵하고 있는 고향집 다락방 어딘가에 결코 아버지가
버리지 않았을 만년필이 들린 가방이 걸려있을 것이다.
지금도 눈에 선한 아버지가 그렇게 아끼시던 그 검은색 가방 말이다.
오늘도 어머니를 보살피며 산수 숙제를 내시는 아버지의 가방은 우리 자식들 책가방속에 깊숙이 각인되어 들어있다.
어린 날 달리기의 요령을 알려 주시던 아버지, 팔씨름을 자주하자시던
아버지, 시커먼 눈썹과 우렁찬 목소리를 물려주신 아버지,
정직과 사랑이 뭔지를 몸소 실천해 보이셨던 스승이자 아버지,
때론 엄격히 회초리를 들다가도 자율을 강조하시며 민주주의적
사고방식을 전수해주신 아버지의 가방이 오늘따라 그립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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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웅님의 댓글
우리 시대의 부모님상 이제 내가 부모가 되고 할아버지란 말을 들으니 새삼 죄송한 마음뿐 ,,,,가슴이 찡 하네요...글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윤용혁님의 댓글
박영웅 선배님, 친히 댓글을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십분 헤아려봅니다. 그 은혜를 잊을 수가 없지요. 좋은 시간 되세요.
오윤제님의 댓글
자식은 언제나 부모에게 모자라는 것이겠지요. 떠날 때가 되서야 아니 떠나고 나서야 알까 그래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고
윤용혁님의 댓글
오윤제선배님,그간 안녕하셨어요? 맞습니다. 떠나서야 아는 무지몽매함을 반복하지요.
귀한 지적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되세요.
윤인문님의 댓글
지금 우리의 교직생활에 비하면 참 어려웠던 시절에 교직을 하셨군요. 요즘 신세대 선생들을 볼때마다 격세지감을 많이 느낍니다. 이런 글이 신춘문예에 떨어진 글인가..난 근처도 못가겠네..용혁후배
윤용혁님의 댓글
인문형님, 형님의 교육에 바치시는 열정과 노력에 찬사와 존경을 보냅니다. 멋진 형님이 계시기에 후배는 든든합니다. 더욱 건강하시고 좋은 주말되세요.
이기호 67님의 댓글
떨어지고 붙는건 백지 한장 차이! 용혁후배! 계속 정진하여 꿈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내가 심사위원이었다면, 쩔꺼덕 붙여줬을 텐데... 스땅달의 적과흑, 이런책 나두 읽고 싶었는데... ㅋㅋ
이연종님의 댓글
인생 뭐 별거있나,또 해보는거지...^^*
봉원대님의 댓글
글 잘읽었습니다. 읽는동안 맘 한켠이 찡하고, 문단을 자꾸놓쳐 몇번을 되네어 읽곤 했습니다. 오후엔 부모님 뵈러 가야겠습니다.
윤용혁님의 댓글
존경하옵는 이기호선배님,그간 안녕하셨는지요? 마음속에는 언제나 선배님의 지난 번 저와 저의 부모님에게 베풀어주신 후의를 잊지않고 간직하고 있지요. 잔잔하신 미소의 선배님을 그리워한답니다. 언제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윤용혁님의 댓글
이연종 선배님, 감사합니다. 선배님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가 되세요.
윤용혁님의 댓글
봉원대 후배, 늘 후배님의 댓글과 마음을 나누는 따스하고 고운 마음씨에 감동이라오. 잘 지내고 언제나 인고인으로서 긍지를 가지세.잘 지내시게.
성기상님의 댓글
윤선배 글 잘읽었습니다.윤선배 글 자주 접했는데 댓글은 처음이네요.저도 부모님 생각에 찡하네요.글쟁이는 분명하시넼ㅋㅋㅋ
윤용혁님의 댓글
성후배, 반갑네. 어제 어버이날이 지났네.언제나 부모님은 큰 그늘이 되었주었다네.잘 지내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