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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여기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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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여기 있어요
진 우 곤
작년 봄이었을 게다. 3.1절 내기 골프와 동아일보 여기자 성추행 파문으로 정치판이 한창 뜨거웠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런 파문을 유발한 장본인들의 처신은 참으로 미덥지 못했다. 여론의 질타를 무시하고 깔보는 자세는 더욱 역겹기 그지없었다. 백일하에 드러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깨끗이 물러나기는커녕 한갓 자리보전에 연연하여 뻔뻔스럽게도 시일을 질질 끌며 여론의 추이를 관망하기까지 했다. 흡사 이리저리 고개를 기웃거리는 시궁쥐처럼 말이다. 참으로 비겁하고 간사하기 짝 없는 작태라 아니할 수 없다.
결국 한 사람은 늦었지만 자신의 용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론에 떠밀려 마지못해 사퇴한다는 인상을 풍겨 더더욱 괘씸했다. 또 한 사람은 술김에 여종업원인 줄 알고 껴안았다는 말로 위기를 모면하려다가 여종업원이면 그렇게 추행을 해도 되느냐는 여론의 덜미에 잡히더니 한동안 잠적하여 속을 부글부글 끓이게 만들었다. 이는 모두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힘겨운 국민들을 우롱하는 처사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속담이 있고,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말이 있다. 자신이 잘못하였다면 깨끗이 실토하고 반성하는 게 좋지 이미 드러날 대로 들어난 일을 가지고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다고 우기거나 겨우 그깟 일로 물러날 듯싶으냐고 고래 심줄처럼 버틸 때까지 버텨보자는 심보는 그것을 지켜보는 국민들에게 더더욱 화를 돋우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학창시절의 일이 생각난다. 지금이야 교사의 학생들에 대한 체벌로 논란이 되고 있지만 우리가 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체벌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체벌 중에서도 수업 자세 불량이라든지 누군가의 도심(盜心)으로 말미암아 한 아이가 귀중품을 잃어버렸을 때 종종 단체 기합을 받기가 십상이었다. 그 중에서도 남의 것을 도둑질한 범인을 잡겠다고 주는 단체 기합은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선생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구슬려 속히 그것을 돌려주기를 바라다가 그것도 먹혀들지 않으면 급기야 매를 들고 단체 기합을 주는 극약 처방을 쓰는 게 상용 수법이었다.
이 때 1번부터 순차적으로 나가 매를 맞게 된다. 처음에 맞는 아이는 선생의 화풀이가 담긴 매라 가장 아프겠지만 그 이후는 다른 애들이 맞는 것을 보면서 아픔을 달래면 그만이다. 그러나 뒤에서 기다리는 아이들의 심정은 가일층 매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기 마련이어서 맨 처음 맞는 아이를 오히려 부러워하게 된다. 그래서 맨 끝에 맞을 아이는 온갖 장면을 다 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그 당시는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는 말을 실감했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은 사뭇 달라졌다. 잘못을 범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시쳇말로 남들 다 그러는데 나라고 못할쏘냐, 남 탓할 생각 말고 너나 잘해 하는 식으로 오히려 도둑이 매를 드는 꼴이다. 이런 도덕 불감증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반성보다 그것을 지적한 것에 더 격분하고 싸움까지 불사하겠다는 자세를 취한다. 심하면 칼부림까지 서슴지 않으니 이제는 짐승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불의한 장면을 보아도 섣불리 나섰다가는 뜻밖에 화를 입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렇고 보니 모르는 척 눈감아버리는 게 처세인 양 부각되고 있으니 씁쓸하기 그지없다.
더군다나 물질에 대한 맹신이 우리의 삶을 휘어잡고 있다. 그 중에서도 처녀 불알도 살 수 있다는 돈의 위력은 모든 가치관을 좌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때로 여러 사람과 대화를 하다보면 대개의 경우 아파트나 땅, 주식 관련이 주된 화제가 된다. 그 이외에는 더 이상 관심을 표명하려 하지 않는다. 이에 아무리 철학과 삶의 본질에 대해 논해도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맞장구를 치는 시늉을 보이지만 그리 공감하지 않는 기색을 엿볼 수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실속위주의 세상살이에는 한물간 구시대의 낡은 사고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모임도 마찬가지다. 특히, 동창회 같은 경우는 더욱 그렇다. 처음엔 학창시절의 순수했던 우정을 견고히 다지고자 적극 동참하며 힘차게 출발한다. 뭔가 의기투합으로 한동안 활성화되는가 싶다가도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면 잘나가는 동창들 위주의 끼리끼리 모임으로 변질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의 심리라는 것이 묘해서 직장이나 사업장에서 어느 정도 성공이나 출세하게 되면 맨 먼저 동창들에게 명함을 내밀며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려 든다. 즉, 나도 너만 못지않다는 잘나간다는 제스처인 것이다.
이때부터 모임은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될 수 있으면 남보다 우위에 서고 싶어 안달인 세상 흐름 앞에 이러저러한 연유로 사는 형편이 딱한 동창들은 자격지심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거나 소식마저 끊어버리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아무리 친구들끼리의 모임이라 해도 기가 죽거나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할 뿐더러 근황을 얘기하기도 멋쩍기 때문이다. 이렇고 보니 하다못해 친구 사이에도 잘났든 못났든 우선 출세하고 돈부터 있고 보아야 위신이 서고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다.
비단 이에 그치랴. 지금의 세태는 저마다 제 앞가림하기에 급급해 주위를 돌아볼 여유조차 없이 살아간다. 역지사지는 옛말이 된 지 오래다. 나만 좋고 편하면 그만이라는 이기심이 날로 팽배하고 있다. 이러매 삶의 본질에 다가가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을 시간의 낭비라며 아예 기피하기가 일쑤다. 대개의 경우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일로 끝장을 보려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너는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을 때를 가정해보자. 이 질문의 요지는 단 하루를 살아도 삶의 보람과 긍지를 맛보기 위해 가치 있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자신에게 주어진 세월을 얼마나 아끼고 부지런히 살아가느냐다. 다시 말하면 각자의 위치에서 진정한 자기답게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의 여부인데 이때 과연 '나, 여기 있어요.'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봄은 왔으되 봄 같지 않다(春來不似春)는 시구가 자꾸만 가슴 안을 파고드는 요즈음이다. 눈만 뜨면 접하는 불유쾌한 사건이나 사고. 천륜(天倫)도 인륜(人倫)도 두려워하지 않는 범죄들. 특히, 불특정 살인 사건에 집 밖으로 선뜻 나서기조차 두려운 세상이다.
도처에 저마다 잘났다고 뻐기는 소란스러움이 무수히 피어나고 있다. '나, 여기 있어요.'라고 당당히 말하지 못하고 주저주저하는 이상한 모양새. 때때로 내 발걸음조차 어디로 향해 가는지 고개가 갸우뚱거려지기도 한다.
나는 봄이면 민들레를 좋아한다. 그의 강인한 생명력은 물론 해맑은 얼굴로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당당한 자세가 여간 부럽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목련처럼 기품이 있고 우아하지도 않지만 흡사 자신을 세상에 보내준 것을 조물주에게 감사하게 여기는 모습처럼 여겨진다. 아니, '나, 여기 있어요.'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는 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마음을 보는 것 같다.
이와 같이 내 생활에도 민들레처럼 '나, 여기 있어요.'라고 대답할 수 있는 리듬과 윤기를 되찾아야겠다. 없는 재주일망정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서슴없이 달려가고 싶다. 그리하여 ‘나, 여기 있어요.'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방법을 배우련다.
'나, 여기 있어요.'
'나, 여기 있어요.'
.......................
(2007년 3월)
댓글목록 0
윤인문님의 댓글
진작가는 좋은 글이 많아서 환성혐님이 문집에 올릴 글을 선정하는데 고심이 많았을 듯..ㅎㅎ
이환성(70회)님의 댓글
버킹검입니다...SS패션..
李聖鉉님의 댓글
나두 여기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