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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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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은
행복이 저 산 너머 있다기에 산 넘고 물 건너 찾아갔더니 사람들은 또 저 산 너머에 행복이 있다고 하던 칼 부세의 “저 산 너머”는 우리를 씁쓸하게 한다.
무지개가 있는 아름다운 곳을 찾아 가는 것은 더 가까운 곳에서 무지개를 볼 수 있을 거라는 가슴 부푼 희망을 가지고 떠나지만 발길은 언제나 그 자리, 나와 행복의 간격은 좁혀지지 않고 언제나 같은 거리에서 손짓을 하는 유혹에 포기하지도 못하고 마냥 행복을 찾아가는 우리들이다.
생활의 만족을 찾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희망이요 본능이라 하지만 우리는 행복이 무엇인가, 또 어디에 있는가를 모른 채 찾아 나서는 것은 아닌지.
사람들이 행복을 바라는 것은 모두가 원하는 것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이 다 같은 것은 아니다.
색깔을 좋아하는 습성도 어떤 이는 파란색을 좋아하고 어떤 이는 빨간색을 좋아한다. 또 어떤 이는 노란색을 좋아한다.
노란색 중에서도 연노란 색을 좋아하는 사람과 진노란 색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노란색에 빨간색을 섞거나 파란색을 섞은 배합의 색깔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색을 좋아하는 것은 각자의 취향이다. 자신의 생활에 맞게 자신의 성격에 맞게 색을 선별하여 치장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꽃도 장미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며 국화를 좋아하는 사람과 난초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듯이 행복을 찾는 모양도 사람들마다 조금씩 다르다.
어떤 이는 권력을 행복이라 여기고 어떤 이는 재산을 행복이라 여긴다.
어떤 이는 명예라 한다.
남들에게 보일 수 있는 것들이 행복이라면 행복은 많이 가진 자만이 누릴 수 있을 것인데 되어가는 세상은 그렇지도 않나보다.
방글라데시가 행복지수가 가장 높다고 하니 못 산다고 불행한 것이 아니요 잘 산다고 행복한 것은 아닐 것이다.
권력이라는 것도 그렇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으로 싸우는 경우가 허다하다.
권력을 위하여 아들을 죽이고 형제를 해치는 일이 다반사요. 아버지에 대항하여 싸운 아들들이 얼마인가. 부모형제를 해치고 권력을 잡은들 행복하다고 할 것인가.
재산도 넉넉하면 편리할 것이다. 필요한 것을 아무 걱정 없이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비굴하지 않아 좋고 추접하지 않아 좋고 인심 써서 좋고 도와주어 좋을 것이다.
넉넉한 사람이 넉넉한 생활을 한다면 필경 그는 행복할 것이다.
행복한 사람의 세상은 정말로 아름다울 것이다.
푸른 하늘이 좋고 그 하늘 밑에 뭉게구름도 멋있고 그 구름이 모이고 모여 먹구름이 되어도 아름답고 먹구름이 비가 되어 땅으로 내려와도 고마움을 느낄 것이다. 모든 것이 아름다울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이 세상살이, 가진 자는 넉넉한 줄 모르고 더 움켜지려는 마음이 생기고 더 많이 움켜쥐면 쥘수록 행복하다고 생각하다가 소유의 노예가 되어 마침내 형제간의 싸움으로 번지고 부자간의 싸움으로 확대되기도 하는 것을 요즘에도 종종 듣는다.
그것은 넉넉함을 더 하고자하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아픔이요 상처일 것이다.
알렉산더는 땅을 넓히고자 무수한 나라를 정복했지만 그 정복한 땅에서 젊은 나이로 죽음을 맞는다.
생전에 알렉산더는 디오게네스의 명성을 듣고 그에게 지혜를 얻고 그 값으로 요구하는 무엇을 줄 마음에 동굴 앞에서 일광욕을 하는 누더기 옷을 입은 그를 만나서 “햇빛을 가리지 마시오.”라는 말을 듣고 비켜주는 대왕은 벌써 줄 것이 사라진 것이다.
“너에게 무엇을 줄꼬.” 하였다면 “나는 이미 받았으니 돌아가시오.”란 대답을 듣고 물러나는 상황을 맞이할 뿐이다.
가장 많이 가진 자와 가진 것이라곤 누더기 옷과 여물통 밖에 없는 가장 가난한 자와의 만남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 것인가?
철학자의 꿋꿋한 마음을 볼 것인가, 갖지 않은 자의 편안함을 볼 것인가.
물질을 추구하지 않는 마음이 꿋꿋하여 좋고 갖기 않으려는 무소유의 편안함도 좋다.
그에게는 바라고자 하는 욕망이 없으니 무엇을 요구하지 않았을 것이고 무소유의 편안함을 알았으니 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디오게네스는 디오게네스이고 나는 나, 나에게도 알렉산더가 나타나 똑같은 질문을 하는 그런 행운이 온다면 나는 지체 없이 귀한 재화나 높은 벼슬자리를 청하지 않았을까.
가진 것이 하나 둘 늘어가는 재미가 상당할 것 같고 벼슬자리 한 번도 못 하였으니 그 단맛에 푹 빠지는 기회를 잠시 동안 누려봄직도 하다.
가진 자의 교만한 행동을 마음대로 하고 높은 자의 거드름을 피우며 지내는 것도 나름대로의 즐거움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주위 사람들의 아첨은 정말 재미있을 것 같다.
이런 재미를 누려 보다가 싫증이라도 나면 (싫증을 느낄 시간도 없이 벼슬자리에서 쫓겨날게 분명하겠지만) 벼슬길을 물러나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찾아다니는 맛도 대단하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그치니 한비야의 독백이 떠오른다.
‘정말 힘들어 죽겠군.
무쇠로 만든 사람이라도 녹고 말겠다.
누가 시켰어? 그렇게 힘들면 그만 두면 되잖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럼 왜 계속하고 싶은 건데?
답은 간단하다. 이 일이 내 가슴에 뛰고 있기 때문이다. 내 피를 끊게 하기 때문이다. 몸은 고생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
정말 그렇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불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비야는 힘든 일을 스스로 하면서 인생을 찾는다.
그 인생이 남이 보기엔 행복한가아닌가는 상관하지 않고 지구 곳곳을 헤맨다. 봉사를 위하여 낮선 지역을 탐험하듯 행군하는 것에 행복하다 하였으니 고생이나 고단한 것도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이에게는 다 행복한 모양이다.
불행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위안을 삼고 행복하다고 여긴다면 그게 행복이지 행복이 특별한 것은 아닐 것이다.
부부와 금슬이 좋으면 행복이요, 고부와 관계가 좋으면 행복이 아닌가.
친구와 술 한 잔 나누고 껄껄 웃는 웃음 속에서도 행복은 있는 것이고 모처럼 마주 앉아 오랜만에 나누는 부자지간의 대화에서도 행복은 있을 것이다.
행복은 찾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리라.
직장에 다니는 것은 물론 돈을 얻기 위하여 다니는 것이지만 억만금을 준다한들 마음이 불편하고 몸이 부자유하다 느끼면 그곳에 있기 어려울 것이다. 다소 받는 품삯이 적고 몸은 고되더라도 마음이 편하고 즐거우면 직장을 떠나기 어려우 듯이 우리네 삶은 마음이 편안 할 때 일할 맛도 나고 살맛도 나는 것이다.
좋아서 하는 일은 분명 일이 잘 풀리게 될 것이고 잘 풀리게 되면 보람도 생기고 기쁨도 올 것이다. 더불어 칭찬도 올 것이다. 사람은 이런 맛에 사는 것이고 이런 것이 행복일 것이다.
행복은 내가 하는 일에서 열심히 하다보면 스스로 찾아와 기쁨과 즐거움을 줄 것이다.
저 산 너머에 행복이 있다고 찾아가지 않고 행복이 찾아오게 하는 일에의 열정, 아니 자신에의 열정이 혹시 행복이 아닐지.
댓글목록 0
이환성(70회)님의 댓글
조경수의 행복이란 노래 생각납니다...
안태문님의 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불행할때 그것이 곧 행복임을 깨닫는 것 또한 행복의 제1조건이 아닐 런지요.
신명철님의 댓글
윤제형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br>
환성형님 집들이 안해요??<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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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문(74회)님의 댓글
하루 세 끼 먹을 수 있는 <br>
양식이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br>
비가 새도 바람을 막을 집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br>
감사하게 느끼는 사람은 <br>
생활이 궁핍하다 해도 행복한 사람이다이라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