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글
생명의 봄
본문
올해처럼 누굴 대통령으로 뽑아야 할 지 난감하기 그지없는 해도 없다. 짜장 그 모두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그게 그것 같은 감을 떨쳐낼 수 없다. 들추면 들추수록 구린내만 풍기는 모습에 쓸쓸하기만 하다. 차라리 혼자서 생명의 봄이나 노래하는 편이 훨씬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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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우 곤
이제야말로 제대로 된 봄인가 보다. 산과 들, 냇가에 생명을 구가하는 교향곡이 힘차게 울려 퍼진다. 여기저기에 개나리, 벚꽃, 진달래, 목련, 철쭉, 수국이 어우러져 피어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즐겁기 짝이 없는 일이다. 시선을 잡아 끄는 아기자기한 형형색색의 꽃들을 대하노라면 흡사 미인을 보는 듯 눈이 부시기도 하다. 이에 저절로 콧노래가 나오고 마음마저 흐뭇하기 그지없다.
이러매 두꺼운 옷을 벗어 던지듯 심신이 홀가분해진다. 마치 잃어버렸던 젊음을 되찾은 듯 발걸음조차 경쾌하다. 코끝을 스치는 따뜻한 바람과 꽃 향기에 잠시동안만이라도 가졌던 어둡고 우울한 세상사를 까맣게 잊어버린다. 하여 여러 구비를 돌고 돌아 빛이 바랜 세월조차도 봄 옷으로 갈아입고 내게 다가선다. 그리 서러울 것도 안타까울 것도 없는 것으로 자리잡으며 말이다. 이에 세상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말이 절실하게 가슴속에 파고드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문득 수필가 피천득 선생의 '봄'이라는 작품에 '봄이 올 때면 젊음이 다시 오는 것 같다.'라는 글귀가 생각난다. 나 역시 사계절을 두루 사랑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봄에 더 애착이 간다. 이는 옥양목 같은 신선하고 화사한 햇볕 속에 잠시만 놓여도 가슴속에서 그 무엇이든 사랑하고픈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나기 때문이 아닐까. 그것이 절로 작품 속에 옮겨지고, 그 속에는 희망과 사랑이라는 두 단어가 주류를 이루게 된다.
본시 나는 보헤미안적인 기질을 가졌다. 어느 것에 붙박이처럼 얽매여 사는 것을 꺼리는 편이다. 가능하면 갈기를 휘날리며 드넓은 벌판을 힘차게 달리는 말처럼 살고 싶고, 혹은 높디높은 창공을 자유자재로 나르는 독수리처럼 자유분방하게 살고 싶은 욕구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일어나기도 한다. 따라서 내게 있어서 막힘이 없는 무한한 상상력을 갖게 하여 기쁨과 즐거움을 안기는 봄을 더욱 가까이하며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즈음 아내의 손길이 바쁘다. 다름아닌 베란다에 놓인 20여 개의 화분을 돌보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꽃을 가꾸는데 일가견이 있는지 이웃에서 시들시들 죽어간다고 버리겠다는 화초도 굳이 얻어다가 화분에 옮겨 심으면 기이하게도 싱싱하게 되살아난다. 아침에 일어나면 내게 잘 잤느냐고 인사하기에 앞서 베란다로 먼저 달려나가 화초를 눈여겨보는, 소녀와 같은 그의 모습을 보노라면 은근히 질투가 날 때가 있다. 나보다도 저들을 더 사랑하는가 하고 말이다. 그러면서도 생명이 있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산다는 것이 여간 큰 복이 아니라고 자위하며 빙긋이 웃음을 짓고 만다.
꽃을 사랑하는 마음처럼 우리네 인생살이도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매일 접하게 되는 살인, 강간, 자살, 강도, 사기 사건을 접할 때마다 모골이 송연하고 간담이 서늘해진다. 이젠 범죄의 수법도 점점 다양해져 때로는 그 기상천외함에 인간으로서 차마 그럴 수 있는가 하고 혀를 끌끌 차지 않을 수 없다. 누구의 말마따나 이제는 맹수가 무서운 게 아니라 사람이 무서운 세상이 되어버렸다. 때로는 누군가의 성의 있는 친절조차 의심하기도 하는 것이니 가히 불신의 시대라 아니할 수 없다.
또, 자기의 목소리를 높이기에 여념이 없는 세월이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목소리가 큰 자가 이기는 세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 아는 잘못을 범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도리어 적반하장 격으로 눈을 부릅뜨며 상대방에게 뒤집어씌우려 한다. 이렇듯 왕방울로 솥을 가시는 듯 시끄럽게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기에만 급급하니 쉽게 해결될 일도 오히려 실이 엉키듯 갈 데까지 가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러매 인심은 갈수록 각박해지고 이기심이 팽배해지고 있다. 직장 내에서도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며 서로간에 경쟁을 부추긴다. 그러다 보니 같은 부서 내에서도 너와 나의 생각이 다르면 바로 적으로 간주하고 증오와 배신의 불씨를 지피기에 혈안이다. 이는 마치 콩나물이 부패할 때 풍기는 고약한 냄새와 다를 바 없다. 결국 퇴근길은 꼭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하고 입술을 지그시 누르는 무거운 발걸음이고 만다.
더군다나 경제가 어려워서 일까 온통 물질주의에 대한 맹신이 난타 공연처럼 우리네 삶을 뒤흔들고 있다. 만나는 사람마다 누구는 아파트와 땅에 투자하여 얼마를 벌었다는 둥, 누구는 주식 투자로 얼마를 날렸다는 둥 거개가 부동산이나 주식 투자 얘기다. 그러면서 결론은 그것만이 살길이라고 목청을 드높인다. 이런 터라 어떻게 사는 게 올바른가에 대한 삶의 본질에 대해서 입도 벙긋할 수 없을뿐더러 설사 말을 꺼냈다 쳐도 자다가 봉창 두드리느냐는 핀잔을 받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이와 같이 삶의 본질에 대해서 거론하는 것이 씨도 먹히지 않는 세상이 되고 보니 문학이고 철학이고 예술이고 역사든지 어느 것 하나 올바른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배고픈 자에게 그게 무슨 소용이 닿느냐고 하면서 즉, 그런 것은 배가 부르고 등이 따스울 때나 할 일이라고 푸대접을 받기가 비일비재하다. 이러매 삶의 근간이 되어야 하는 인문학이 속절없이 죽어가도 누구 하나 선뜻 나서서 해결책을 내놓으려 하지 않고 수수방관만 하는 실정이니 씁쓸하기 짝없다.
문득 내가 잘 아는 이가 술좌석에서 들려 준 얘기가 생각난다. 여류 수필가인 그 분은 한 잡지사로부터 원고 청탁이 있어 어려운 형편에 원고료라도 몇 푼 나올까 기대하고 수필 한 편을 써준 적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웬걸 아이들 껌 값이나 될 정도의 턱없는 원고료 앞에 허탈하기 짝이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내막인즉 해당 잡지사가 경영난에 허덕이는 터라 원고료를 충분히 지불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원고 게재만으로도 고맙게 여겨주었으면 하는 눈치까지 보이기에 두말 않고 물러서고 말았다며 쓸쓸히 웃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세상은 뭐가 뭔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뒤죽박죽 변하고 있다. 우선 먹고 사는 것이 급선무이기 때문에 결국 삶의 본질조차 흩뜨려놓는, 우후죽순처럼 자라나는 물질만능주의 앞에 그 누구도 고개를 숙이며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아파트 및 땅 투기를 한다고 해서 뭐가 잘못되었느냐, 괜히 고상한 척 책잡지 말라,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흐름이지 않느냐는 반박에 사실 할말을 잃는다.
이런 터에 문학을 논하고 철학을 논하고 예술을 논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어떤 모임에 가든 나는 마치 진흙 밭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다. 대화의 주류가 천편일률적으로 물질적인 풍요의 추구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의상 끝까지 얘기에 동참하기는 하지만 달갑지 않은 대화라 수시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어진다. 까닭인즉 나 혼자만 나무를 보되 숲은 보지 못하는 격으로 도도한 세상 흐름을 제대로 잡아채지 못하고 까막눈이 된 게 아닌가 하고 우울해지기 때문이다.
아침을 먹고 나니 아내가 봄나들이를 가자고 말하기에 가벼운 옷차림으로 나섰다. 보도 블록 사이에도 피어난 민들레를 본다. 그의 강인한 생명력에도 따뜻한 시선이 간다. 또, 귀엽게 생긴 어린 아기의 앙증맞은 고사리 손 같은 연두 빛 단풍나무 잎들이 내 시선을 잡아 끈다. 아내의 눈길은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않은 것처럼 연신 화원 쪽으로 가 있다. 오늘도 그는 분명코 꽃이 담긴 화분을 사리라.
해가 거듭될수록 새치가 사뭇 늘어난다. 이따금 손으로 새치를 뽑기는 하지만 남들처럼 젊게 보이겠다며 인위적으로 염색하지 않고 산다. 언제까지 그런 배짱을 가지고 살지는 모르지만 아직은 여유를 부리고 싶다. 봄이 왔으니 그냥 봄빛으로 물들게 놔두자. 쇼 윈도우에 서있는 마네킹이 아무리 멋들어져 보이더라도 생명이 깃든 것들을 더 사랑하자. 마음에도 없는 칭찬과 박수보다는 진정에서 우러난 칭찬과 박수를 보내자. 너는 너대로 나는 나 대로가 아니라, 너와 내가 손잡았을 때 느끼는 따뜻함을 모아서 우정과 사랑의 집을 짓자.
그저께는 퇴근길에 과천으로 가는 지하철을 갈아타려고 환승역인 사당 역에서 내렸다. 때마침 그곳에서 지하철 예술 무대의 일환인 봄맞이 연주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하여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각 악기마다 제 소리를 내며 어우러진 모습에서 나는 넋을 잃고 감상했다.
그렇다. 바로 저것이다. 삶이란 저마다 제 위치에서 최선을 다함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슴의 아름다움은 뿔에 있다. 하지만 정작 깊은 산속에서 사자에게 쫓겨 도망치게 될 때는 평소 빈약하고 초라하게 보이던 가냘픈 다리가 제 구실을 한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다. 색안경을 끼고 보면 얻는 게 없다. 비록 하찮은 것이라도 짙은 관심과 따뜻한 애정을 가지고 대하면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고 깨닫게 된다.
오늘 저녁에 예정된 문인협회의 주요 행사가 아니었더라면 오래도록 그 연주를 지켜보았을 텐데 아쉽게 그 자리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생명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나니, 생명이 있는 곳에 평화가 있나니…….
생명의 봄은 노래하고 있다.
사랑과 평화를.
오늘도 베란다에 나갔던 아내가 내게 다가와 여보, 유도화가 제 구실을 하려는 것 같아요, 누가 쓰레기통 옆에 내던져버린 것을 보니 불쌍해서 주워 왔는데…… 하고 기쁨에 찬 얼굴로 말하기에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베란다로 나가 살펴보니 정말이지 새싹이 나와 있었다. 나는 슬며시 아내의 손을 잡으며, 당신 정성 놀라워, 그러니 내가 당신을 내 사람으로 선택했지 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2006년 3월)
댓글목록 0
윤인문(74회)님의 댓글
아직 겨울을 안지냈는데 봄을 얘기하니 이번 겨울은 따뜻하게 지낼 수 있겠네..ㅎㅎ
이동열님의 댓글
사람이 살아가면서 늘 잊고 사는 "사랑"을 생각하면서 사는게 어려워요^^